(나라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 유아인이 내게 전한 메시지
한 인간이 삶을 살면서 몇 번이나 이사를 할 수 있을까? 하려면 날마다 할 수야 있겠지만 ‘이사’라는 단어에는 단순히 주거공간을 옮기는 것 이상의 번잡함과 수고스러움이 들어있다. 그래서 형편이 되는 한 우리는 삶에서 ‘이사’를 최소화하려고 한다.
내 나이 29살, 내가 해본 경험 중 챔피언의 자리에 오를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사 횟수다. 여러분은 삶에서 이사를 몇 번 해보았는가? 나는 지금의 집에 살기 까지, 기억이 시작되는 7살부터 세어도, 최소 10번의 이사를 겪었다. 29살 부문, 이사 횟수, 대상은... (3초 쉬고) ‘부케’님이 수상하셨습니다. 곧 유년시절 내내 주거의 불안정과 함께 자랐음을 뜻한다.
10번의 이사를 겪으며 성장한 성인 여성이 주거공간에 가지는 집착의 세기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당연하게, 어쩌면 비정상적으로 나는 주거공간의 소유, 즉 아파트의 매매에 집착했다. 생활을 쪼들리게 할 정도로 과도한 저축이 뒤따랐다. 나는 브랜드 샌들이나 좋은 차, 명품 가방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집이 필요했다. 내가 살 집. 되도록이면 좋은 곳에 있는 내 집. 시간이 지나면 자기 몸값의 두 배가 되어있을 집. 가만히 있어도 돈을 벌어들여줄 집.
하지만 아파트는 냉정하게도 나의 예외적인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나의 집착과 상관없이. 내 과도한 저축을 비웃듯이. 애써 축적한 부동산 지식에 콧방귀를 뀌며. 아파트는 가파르게 몸값을 높이더니 이제는 감히 쳐다도 못 볼 천상의 세계에 속해있다. 아파트를 사기엔 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랬기에 한동안 실패자로 살았다. 집을 가질 수 없는 나는 실패자였다. 인생에 이사가 몇 번이나 더 추가될까. 나는 몇 번의 이사를 겪고 나서야 죽을 수 있을까. 집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저기 저 집에서 살 수만 있다면. 그게 마지막 이사라면. 어딘가에 영원히 정착할 수만 있다면.
이태원에 있다는 58억짜리 집에 사는 유아인이 tv에 나왔다. 집이 말 그대로 으 리 으 리 하다. 3층으로 되어있는데 한 층이 우리 집보다 크다. 부럽다. 그런 집에 산다면 평생 이사를 갈 필요가 없다. 유아인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데 정작 그 집에 살고 있는 그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불안해 보였다. 차라리 이 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더 안정적인 상태에 있는 느낌. 그는 방송을 통해 의외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물질적으로 다 가졌다. 가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본인이 갖기 싫어서이지, 못 가져서가 아니다. 내 기준에서 그 누구보다 행복해야 하는 이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해고 있었다. 오히려 물질들에 둘러싸여 갑갑해하는 느낌. 다 비워내고 싶어 하는 몸짓. (고급스러운) 물건들과 자신 사이의 불일치감. 그는 물질과 끝내 일치되지 못했다. 겉이 번지르르한 물건과, 그들과 합치되지 못한 채 동떨어진 자신을 분리하고 있었다. 방송 내내 그가 물질에 갖는 무의식, 즉 물질들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인식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물질로 써가 아닌, 오직 자신으로서만 존재하고 싶어 발버둥 하는 한 영혼을 보았다.
그렇다면 저 집은 다 무어냐. 저 차와 저 장식품들은 다 무어냐. 자신을 찾기 이전에 그도 한때는 자신을 치장할 것들, 이를테면 가면들을 찾아 헤맸던 것 같다. 예전에는 신발장에 신발이 꽉 차있으면 부자가 되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 처음에는 더 많이 갖는 것에, 나중에는 더 좋은 것을 갖는 것에 집착했을 것이다. 한 인간을 그가 소유하는 물질로 평가하는 우리 사회에서 큰 집을 갖고, 좋은 차를 갖고, 신발을 꽉 채우는 것은 마치 성공한 인생을 사는 것 같은 착각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일시적인 '땜빵'일 뿐이다. (아주 적절한 표현에 박수를!)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나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게 맞나 불안할 때는 비싼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잠시 불안감을 잠재울 수는 있다. '너 잘 살고 있는 거 맞아! 이렇게 비싼 물건도 턱턱 살 수 있잖아!' 하고 땜빵식 자기 위로한다. 하지만 땜빵은 본질을 가릴 수 없다. 결국 깨달을 수밖에 없는 본질. 그 물건들은 내가 되지 못한다. 나는 그 물건들이 되지 못한다. 아무리 껍데기로 치장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사모았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족쇄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그는 방송 내내 '비워내기'에 몰두했다. 안 신는 신발을 정리하고, 옷을 정리하려 드레스룸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다. 급기야는 시상식에서 받은 트로피와 집에 걸려있던 자신의 사진들도 비웠다. 자신이 아닌 것들, 남들은 멋지다고 열광하지만 그래도 내가 아닌 것들은 미련 없이 비워버린다. 비워내면 어렴풋이 드러나는 자신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오래 잃어왔던 자신을 이제는 마침내 찾고 싶은 표정을 했다.
혹자는 유아인이 '영리한 연출'을 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방송에서 제대로 flex 해버리면 시청자들의 원성을 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관심을 영리하게 돌려버렸다고 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눈빛에서 나의 눈빛을 읽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가난을 치장하기 위한 가면을 썼고, 그도 무언가를 치장하기 위한 가면을 썼다. 가면이 답답한 사람은 세상 밖으로 자신을 내놓고 싶은 갈망, 이제 내놓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는 간절함, 그것들이 고스란히 담긴 눈빛을 읽을 수 있다.
만약 유아인이 자신을 찾기를 포기하고 flex 하고 산다면? 편할 것이다. 지금처럼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시청자 앞에 나설 필요도 없다. 물질과 나를 일치시키면 사실, 편하다. 고민할 게 없다. 능력도 있으니 돈 펑펑 쓰면 된다. 남들은 멋있다고 부럽다고 난리다. 뭐가 문제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자신을 잃는다는데 있고, 그것은 한 개인에게 닥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이다. 그걸 느낀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이 아닌 모든 것들이 낯설다. 가면에 진절머리가 난다. 짐작컨데, 유아인은 그 단계에 와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서로 정반대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니, 그것도 참 아이러니하다. 나는 가난으로, 그는 부유함으로 빚어진 껍데기를 깨고 싶다.
다시 주거 불안의 걱정으로 돌아와서. 아이러니하게도 58억짜리 집을 가진 유아인은 나에게 '너 잘 살아가고 있어. 그거 맞아.' 하는 안정감을 주었다. 집은 없으나, 껍데기를 벗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는 내게 옳다고 말해주는 느낌이다. 모든 것을 다 가져도 나를 가질 수 없다면 내 눈동자는 그의 눈동자처럼 공허할 테니까.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은 집이 아니었다. 내가 가져야 하는 것은 차가 아니었다. 내가 마침내 가져야 하는 단 하나의 것은 '나'였으니 말이다.
최근 또 발표된 부동산 대책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언론에서는 30대에게 지금 아니면 정말 집을 못 살 거라는 겁을 주기까지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집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이 불안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이 방송을 꺼내보리라. 그의 집 말고, 그의 차 말고,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리라. 모든 것을 가져도 공허한 눈동자. 나를 가져야만 채워지는 눈동자. 마침내 조금씩 자신을 찾아가는 그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를 다시 나에게로 이끌어줄 테니. 남들은 이해하지 못한대도, 남들은 열광하는 껍데기를 벗겨내고,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 꿈틀대는 그와 나를 응원한다!
(이미지 출처 : MBC '나 혼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