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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oke Jul 03. 2020

시키는 대로 안 해봤습니다.

(곧) 30대의 사춘기 반항기

나는 지금 사춘기다. 확실하다. 29살에 맞는 사춘기라니. 적어도 남들보다 10년은 늦었다. 늦게 부는 바람이 더 무섭다더니. 옛말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낀다.


내 신상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있다. 이 직장을 가지기 위해 '바르고 성실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엄마에게 나는 그 누구보다 키우기 쉬운 딸이었고, 선생님에게 나는 그 누구보다 가르치기 쉬운 학생이었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왠지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 열심히 했고 좋다는 대학에 갔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어렵다면 어려운 자칭 '고시'에 한 번에 합격했고, 직장을 다니면서는 좋다는 대학원도 다녔다. 그렇다. 나는 남들이 '좋다는' 길을 단 한 번의 방황도 의심도 고민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걸어왔다.


사춘기 없이, 탄탄대로를 걸었다며 엄마의 자랑이었던 나는 요즘 엄마의 주름을 깊게 만드는 주범이다. 30년간 스스로가 무엇이 좋은지 모른 채, 남들이 '좋다는' 길만 좇다 보니 스펙은 그럴 듯 하지만 속은 텅 빈 나만 남았다. 나는 왜 인생에서 '왜'를 묻지 않았을까. 왜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았을까. '왜'를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지금껏 그 많은 것들을 열심히 해 왔던 걸까. 어떻게... 왜... 도대체 왜????? 약 10년을 외면했던 고민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이제는 '왜'를 찾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글 속에도 복잡한 심경의 내가 느껴지는가. 난 지금도 마음이 복잡해 죽겠다. 독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뭔데... 너무 두루뭉술해... 자세히 말을 해야 알지..."




자세한 사연은 이렇다. 나의 직업은 n 년에 한 번, 자격증 갱신을 위해 특수한 연수를 들어야 한다. 꼭 갱신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연수를 듣고 갱신한다. 이 직종의 사람이라면 98%는 수료하는 기본적인 연수다. 심지어 연수기간 동안 직장 대신 연수원으로 출근하는 공적인 연수라고 하면 감이 올 것이다. 나중에 승진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연수라고들 한다. 이 연수를 듣지 않으면 승진은 포기라고 간주할 정도이다. 나는 그 연수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수를 '왜'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다. 먼저, 승진에 뜻이 없다. 직장은 내게 '적당량 일을 하고 적당한 월급을 받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이다. 나의 자아실현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다음으로, 나의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 질의 연수는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왕복 3~4시간의 거리를 몇 주씩 왔다 갔다 할 동기를 도저히 못 찾겠다. 땡볕에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연수 내용을 흡수할 자신이 없다. 아마 피곤에 지쳐 꿀잠을 자지 않을까... 사실 다 핑계다. 가장 핵심 이유는, 그것이 도저히 '내가 원하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어제, 연수 포기서를 제출해버렸다.






남들이 좋대서 간 대학교, 남들이 좋대서 간 직장, 남들이 필요하대서 간 대학원.

나의 인생은 줄곧 남들이 좋다는 인생이었다. 넌 안 좋았냐고? 아니, 나도 사실 좋았다. 남들이 좋대서 선택한 것들이지만, 우연히 나에게도 좋았다.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아주 먼 길을 돌아와야만 했을 테니까.


" 그런데 뭐가 문제야? 너도 좋다며!" 할지 모르겠다. 그게 문제다. 이제야 내가 좋은 것을 알아버린 게 문제였다. 줄곧 남들이 좋다는 것만 알아왔지, 내가 좋은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 감정이 좋다고 사인을 보내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네가 좋은 건 중요하지 않아. 남들이 별로라잖아.' 남들이 좋다면 그저 같이 좋았고, 남들이 싫다면 그저 같이 싫었다. 그렇게 30년을 살았고, 참다못한 내 안의 내가 예고도 없이 최근에 불쑥 튀어나와버린 것이다. 그렇게 억눌려온 자아는 그동안의 세월에 복수라도 하듯이 이곳저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는다. 쉴 새 없이 묻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남들이 좋다는 거 말고, 너는 뭐가 좋은데?"

"남들이 다 하는 거 말고, 너는 뭐를 하고 싶은데?"

"그게 네가 정말 원하는 게 맞니?"  


그래서 난 지금, 98%의 사람들이 듣는다는 연수를 '남들 하니까 나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 정신 차려. 다들 그냥 듣잖아. 너도 들으면 안 돼? 해봐야 고작 2주인데. 2주 못 참니? 그냥 하자 제발. 그냥 남들 하는 대로 똑같이. " 엄마의 표정이 말한다.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건, 30년간 말 잘 듣고 살아온 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일 것이다. 나도 그냥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전의 내가 부럽다. '왜'를 찾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억지로 하면서도, 억지로 하고 있는지조차 못 느끼던 그때가 그립다. 지금은 많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불구의 몸이 된 느낌이다.


참나, 포기서를 제출했으면 후련하기라도 하던가. 포기해놓고 찝찝한 이 마음은 도대체 뭐야? 내가 좋다는 대로 했잖아! 처음으로 남들 말고 내 말 들었잖아! 근데 기분이 왜 이래?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원. 내 솔직한 상태가 이렇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 대가. 사회의 말을 듣지 않아 내려지는 벌.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인 벌. 그것은 '불안'이었다.



처음으로 남들과 반하는 선택을 해 본 내가 얻은 것은 불안과 자유, 그리고 시간이다. 한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이토록 불안할 일이라니. 동시에 나는 얼마나 자유롭지 않게 살아왔던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불안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이미 엎어진 물, 이제 버티는 일만 남았다.


불안하면서 자유로울 것인가,

안정되면서 구속될 것인가.


안정과 불안,

구속과 자유.


나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이제 시작이다. 이 힘겨루기의 끝에 어떤 결론을 맞이할지는 모르겠으나, 결국에는 자유 속에서 안정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불안한 마음이 익숙해질 때쯤,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으며, 내 시간의 유일한 주인으로써 살아본 몇 주가 기막힌 안정감을 주더라고. 잠깐의 불안에 지지 말라고. 불안은 곧 지나간다고. 익숙하지 않아 낯설 뿐이라고. 불안을 넘어서면 맛있는 자유가 있다고. 맛보지 않으면 평생 모를 그러한 자유였다고. '나'를 추구하는 일이 그만큼 의미 있다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가리라고. 언젠가 그러한 소식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그림을 그려보았다. 서툴러도 나다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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