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4일차)
푹 자고 일어난 것이 확실했다. 오늘은 따로 정해 놓은 일정이 없어 스마트폰의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눈이 떠진 걸 보면.
정신이 든 김에 빠르게 씻고 일단 나가기로 했다. 로마 시내를 천천히 돌아보면서 앞으로의 구체적인 일정을 세울 셈이었다. 일단 우리나라에서 출국 전에 미리 예매해 둔 다음 행선지로 가는 기차는 내일 오전 티켓이었다. 목적지는 베네치아(Venezia). 한 달 기간으로 로마 인 아웃인 비행기 편이었기에 로마로 들어가서 며칠 묵고, 이탈리아의 북쪽인 베네치아로 올라갔다가 천천히 아래쪽으로 훑고 내려오면서 마지막에 다시 로마에 들러 귀국할 생각이었다. 정리하자면 큰 그림은 이랬다.
3/31~4/5(5박) 로마
4/5~4/12(7박) 베네치아
4/12~4/16(4박) 미정
4/16~4/25(9박) 피렌체
4/25~4/30(5박) 다시 로마
일단 베네치아행 기차표와 숙박시설까지는 예약했기 때문에 그다음이 고민이었는데 어제 남부투어를 함께한 가이드의 소위 ‘가정방문’(지난 편 참조) 시간이 큰 도움이 되었다. 조언에 따라 어젯밤 급히 베네치아 첫날 저녁의 시내야경투어를 예약했다. 7박 8일이나 묵는 베네치아에서 첫째 날 간단히 설명을 들으며 시내를 둘러보고 나면 뒷 일정을 정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초반에 투어를 해야 어제처럼 가이드의 크고 작은 팁을 듣고, 이후에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사실 우리가 로마에 오자마자 3일 연속으로 가이드 투어를 잡은 것도 마찬가지 생각 때문이었다. 잘 모를 때 설명을 들어두면 그 이후의 여행에서 시야가 넓어질 것이고, 출국을 위해 다시 로마로 돌아왔을 때는 정말 더 여유로울 거라는 막연하지만 꽤 괜찮은 아이디어. 베네치아에서 시내투어를 해보고 효과(?)가 좋으면 피렌체도 예약할 생각이었다. 쨌든 우리는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객실 전화기가 놓인 테이블 위에 팁으로 2유로짜리 동전 하나를 올려두고 문을 나섰다.
(2023년 4월 4일 화요일)
오전 8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상의를 한 것도 아닌데 사회와 중년생이 호텔을 나가자마자 홀린 듯 향한 곳은 3일 전에 갔던 근처 커피바(bar)였다. 맛있고 편한 분위기라 매일 가고 싶었는데 그제와 어제는 투어의 집합시간에 맞추려면 바 오픈시간(오전 7시)보다 일찍 움직여야 해서 아쉽게도 갈 수 없었다. 역시나 맛있는 빵과 커피. 테이블에 편히 앉아서 먹어도 괜찮다며 오늘도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주인아주머니. 게다가 급할 것 하나 없는 오늘이기에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잠시 여유를 부리기로 했다. 여기서 잠깐! 오늘의 표지 이미지는 다름 아닌 이 커피바(bar) 테이블에서 찍은 꼬르네또와 카푸치노 사진(365일도 먹을 수 있어요) 임을 밝히고 넘어가는 바이다.
“베네치아는 어떨까?”, “중간에 4박 5일이 비는데 어디를 가볼까?”, “베로나? 볼로냐?”, “피렌체에서는 우피치 미술관이 가고 싶던데 역시 가이드 투어를 해야겠지?”, “맞다, 나중에 다시 로마로 와서도 5박 6일이나 있어야 하는데 오늘 돌면서 우리가 묵고 싶은 위치를 정해서 그쪽으로 호텔을 예약할까?”, “그건 그렇고, 우리 당장 오늘은 어디를 돌아보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온전히 이탈리아 생각에 집중하는 동안, 힘들었던 우리의 지난 넉 달과는 끊어져 있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레 찾아온, 그토록 우리가 원했던 완벽한 단절이었다. 여행은 부자연스럽지 않게 우리를 북돋아 주었다. 사회와 중년생은 고심 끝에 우선 판테온(Pantheon)에 가보기로 결정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라치에 밀레!” 5유로의 행복이었다.
날씨가 쌀쌀했다. 가져온 옷 중에 그나마 바람막이 재킷이 가장 따뜻한 옷이어서 챙겨 입었는데도 어림없었다. 여행 오기 전에 슬쩍 검색해 봤을 때는 이탈리아의 4월은 여름 전이어서 상당히 따뜻하다고 나와있었는데 전혀 달랐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이상기후가 유행인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덕분에 오늘도 거리에는 경량 패딩 재킷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걸으면 따뜻해지겠지.’ 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가다 보니 건물에 걸려 있는 대형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폰 14의 광고판이었다. ‘Hello giallo’(헬로 지알로)라는 큼지막한 카피가 일러스트와 함께 배치되어 걸려있었다. ‘안녕 노란색’ 정도의 뜻으로, 아이폰의 노란색 컬러 출시 광고인데 이탈리아어로 단어의 ‘라임’이 맞아 사용한 것 같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한국 광고의 카피는 ‘나랑 노랑’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노란색을 드러내는 것과 라임을 활용하는 것. 국가는 달라도 이 두 가지가 광고의 공통 미션이었지 않았을까?’ 중년생은 걸음을 잠시 멈추고 직업병처럼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좇다가 찾아드는 냉기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지나는 수많은 자동차와 연신 색이 바뀌는 신호등이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전 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어디를 둘러봐도 역사, 그 자체인 로마지만 지금은 2023년. 어쩔 수 없이 오늘의 문명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옛 도시의 여전한 생명력에 감탄하며 걷다 보니 트레비 분수가 나타났다. 그제 처음 봤을 때 분수 주변이 인산인해여서 다음을 기약했는데, 오전 9시경인데도 관광객이 제법 많았다. 아무래도 정말 한산한 모습을 만나려면 아주 새벽에 와야 되지 싶었다. 잠시만 서 있었을 뿐인데 금세 손이 시려왔다. 둘 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각자 빠르게 지도를 검색해 보고 나눈 목적지에 대한 의견 역시 같았다. 선택은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카페 타짜도로(Tazza D’oro). 로마를 대표하는 소위 3대 카페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판테온 바로 옆에 있었다. 바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몸 좀 녹인 후, 판테온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침이라선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름에 ‘황금 잔’이라는 뜻을 가진 타짜도로는 길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입구로 들어서면 보이는 카운터에서 먼저 계산하고, 그 옆으로 늘어선 바에서 커피를 받으면 되는 구조였다. 우리는 맨 왼쪽 입구로 들어가 카페(에스프레소)를 두 잔 주문하고 바에서 바로 마셨다. 바 너머로 따뜻하게 데워져 엎어놓은 상태로 준비된 수많은 에스프레소 잔과 회전초밥집 접시처럼 높게 쌓아 올려진 커피 접시, 그리고 커피를 추출할 때 뿜어져 나오는 따뜻한 김이 은근한 볼거리였다. 다른 곳보다는 다소 길쭉하고 연한 녹색으로 그림이 들어간 에스프레소 잔도 독특해서 예뻤다. 갖고 싶었다. 예쁜 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가져다 댔다. 쓸 줄 알고 미리 눈을 찌푸렸는데 고소함이 따뜻함과 함께 온몸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런 거였으면 당연히 에스프레소 마셔야지.” 중년생이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말을 마침 사회가 입으로 내뱉었다. 직접 경험해 보니 이탈리아 사람들이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이유는 단순한 거였다. 그냥 맛있으니까.
추위를 녹이고 다시 거리로 나오자 곧 판테온을 만났다. 타짜도로 옆에서 골목이 끝나고 광장과 이어지는데 그곳에 들어서면 바로 판테온이 보이기 때문이다. 커피도 커피지만 위치가 바로 옆이어서 선택했던 것도 있었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고대 건축물은 생각보다 웅장했고 너무 멋져서 당황했다. 사실 오늘 이곳을 목적지로 삼은 이유는 어제 가이드의 확신에 찬 멘트가 가장 컸다. “만약, 로마에서 건축물 하나만 보고 가라고 한다면 전 판테온입니다.” 실물을 보니 그 말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고 안으로 들어서니 경이로웠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엄청난 규모의 돔과 천장 한가운데 뚫려있는 비현실적인 구멍(oculus)까지. 내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보면 묘한 기분에 전율까지 느껴졌다. 미켈란젤로가 판테온을 두고 사람이 아닌 천사가 만든 작품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아그리파가 세웠고 서기 125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만신전(모든 신을 위한 신전)이라는 뜻의 판테온이 더 놀라운 것은 재건 연도 기준으로 생각해 봐도 약 1,900년이 지난 건축물인데도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완벽’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피렌체의 두오모 같은 르네상스의 대표 건축물들이 판테온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실감하며 사회와 중년생은 넋을 놓은 채 한참을 서서 감상했다. 아니, 그 압도적인 위압감과 성스러움에 그저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슬슬 다리가 아플 시간이 되자 둘은 앉아서 쉴만한 광장을 찾기로 했다. 지도 검색을 해보니 말로만 듣던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이 멀지 않았다. 거대한 규모였던 전차 경기장의 타원형 모양을 그대로 살려두고, 주위로 바로크 풍의 멋진 건축물을 세운 광장. 전차 경기장이었어서 그런지 느껴지는 웅장함에 세 개의 분수(넵튠의 분수, 모로의 분수, 4대 강의 분수)가 주는 우아한 아름다움이 더해진, 그야말로 실물이 훨씬 매력적인 광장이었다. 우리는 분수 근처에 돌로 만들어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새파랗게 뻥 뚫린 하늘의 해를 그대로 받아내야 했지만 다행히 날이 추워서 오히려 햇살이 반갑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걸어오는 길에 봤던 큰 길가에 위치한 호텔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며칠뿐이긴 했지만 우리가 매일 걷는 동선과 항상 겹치는 길 위의 멋진 호텔. 둘 다 마음에 들어 검색해 보니 마침, 우리가 로마로 다시 돌아와서 출국 전까지 머무를 5박 6일(4/25~4/30) 일정으로 방이 남아 있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두 사람. 어느 순간 결심한 듯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체 없이 사회가 손가락을 움직여 예약버튼을 눌렀다.
광장은 마냥 머무르기 좋았다. 분수가 쏟아내는,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만 같은 물줄기를 한참 동안 멍하니 쳐다보니 무언가 그 물이 정신의 상처를 씻어내 주는 기분까지 들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추위와 배고픔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가 좀 넘은 시각. 12시는 되어야 대부분의 식당들이 열 테니 일단 추위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특히 추위를 많이 타는 [사회]였기에 계속 참고만 다니다가는 아무래도 감기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순간, 로마 시내 어딘가에서 자라(ZARA Rome)를 본 기억이 났다. 기념품이나 선물을 살 목적이었다면 한국에 없는 브랜드를 찾아 나섰겠지만 추위 해결이 급선무인 지금. 실패 확률이 적은, 이미 잘 아는 브랜드만 한 것이 없었다. 골목을 몇 개 지나가자 저 멀리 우리가 찾던 건물이 보였다.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잰걸음으로 추위를 피해 들어간 실내는 역시 따뜻했다. 분위기가 익숙했다. 같은 브랜드라도 국가에 따라 제품이 많이 다른 경우도 있지만 이곳은 마치 한국에 있는 것처럼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춥고 낯섦에 움츠러들었던 허리와 어깨가 바람이 채워지는 튜브인형처럼 천천히 펴지고 있었다. 쓱 한 바퀴 둘러본 두 사람. 외투를 사기에는 부담스럽기도 해서 사회는 고심 끝에 긴 갈색 머플러를 하나 샀다. 23.10유로.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잘한 쇼핑이었다. 여행 중반까지는 상당히 쌀쌀한 날이 많아서 언제나 사회의 체온을 든든히 지켜주는 은인 같은 머플러였으니까.
계산을 마치고 매장을 나서기 전에 둘은 회의를 했다. 의제는 ‘점심을 어디서 무얼 먹을 것인가?’였다. 밖은 추웠기 때문에 정하지 않고 나가서 방황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출국 전 이탈리아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이것저것 찾아봤던 기억이 떠올라 그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최종 선택은 이탈리아 가이드 분의 채널에서 봤던, 할머니가 운영하시고 메뉴도 할머니 마음대로인 트라토리아(Trattoria)였다. 오픈시간은 12시. 다행히 우리가 천천히 걸어서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땐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있었다. 햇살이 너무 밝아 실내가 밖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영업하시는 거 맞나?’ 생각하며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마침 안에서 인상 좋은 아저씨 한 분이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나오셨다. 우리는 가게 앞 야외 천막 자리를 선택했다. 그리곤 물 하나와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잠시 가게 안으로 사라졌던 아저씨가 하우스 와인이 담긴 작은 유리병 하나와 와인잔이 아닌 투명 물컵을 가져다주셨고, 곧이어 음식이 알아서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선 식전빵과 렌틸콩, 올리브 양파절임, 가벼운 튀김볼, 프로슈토, 모짜렐라 덩어리 치즈(한입 모양)가 한 번에 세팅되었다. 예쁘게 담지도 않았고 평범한 하얀 접시에 툭툭 올려져서 나오는데 어쩐지 가정식 분위기가 나서 오히려 정감이 갔다. 물론 유튜브에서 그런 느낌을 보고 찾아온 거긴 했지만.
별 게 아닌 것 같은데 너무 맛있었다. 화이트 와인 한 모금 마시고 모짜렐라 치즈를 프로슈토로 감싸 와앙- 한입에 먹으면 또다시 입에 당기는 와인 한 모금. 올리브 양파절임으로 입을 개운하게 하고선 식전빵 위에 렌틸콩을 올려 크게 한입 더. 지루할 땐 치즈와 다진 고기 튀김볼 한 개. 그리곤 다시 와인 한 모금. 벗어날 수 없는 무한 루트였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본식 같은 애피타이저 6종 세트를 다 흡입해 버린 상태였다. 잠시 뒤 접시를 치우시러 온 아저씨가 싹 비운 접시를 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으셨다. 다음은 파스타 차례였다. 아마트리치아나(Amatriciana)와 까르보나라(Carbonara)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것 같았는데 우리는 처음이고 관광객이기도 해서 둘 다 맛보라고 반반으로 해주셨다. 둘 다 로마의 전통 파스타인데 마늘이나 관찰레, 치즈가 들어가는 것은 같지만 아마트리치아나는 토마토가 들어가 붉은색을 띠고 까르보나라는 달걀노른자가 들어가 노란색을 띠는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까르보나라는 우리나라에서 먹는 크림소스의 까르보나라와 다르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실제로 접해 보니 정말 이름만 같았지 전혀 다른 음식이었다. 질퍽한 크림소스 대신 달걀노른자에 버무려진, 비주얼부터가 다른 음식이었다. 찾아보니 오리지널 까르보나라에서 달걀노른자는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마 사람이 한국에 와서 까르보나라를 먹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우리가 로마에 가서 발견한 한식집에서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된장이 안 들어간 느낌이지 않을까? 사회와 중년생은 얘기하며 쉴 새 없이 웃었고, 파스타 그릇의 바닥을 향한 포크질도 멈출 새 없었다. 다음으로는 삶아서 소스를 끼얹은 돼지고기와 볶은 나물, 감자칩이었다. 이미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지만 온통 맛있는 음식뿐인지라 어느 것 하나라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올 클리어.
한참 먹고 있는데 족히 90살은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맞다! 그 할머니!” 사회와 중년생은 음식에 정신이 팔려 여기가 할머니 식당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환한 미소로 맛있냐며 인사를 하셨고, 급기야는 사회의 어깨를 안고 머리에 뽀뽀까지 날려주셨다(자본주의 사랑이 다소 들어가긴 했지만 기분 좋았다). 하하하- 귀여우신 할머니. 우리는 디저트 치즈케이크까지 먹는 기염을 토하며 화려한 점심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언젠가 로마를 다시 가게 된다면, 다시 들러보고 싶은 식당이었다.
배도 부르고 와인으로 기분도 오른 우리는 그제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 투어 때 가이드 분이 알려주신 언덕에 걸어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큰 문제는 언덕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 “포로 로마노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신 곳이니까 지도에서 이쯤이지 않을까?” 중년생이 말했다.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사회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했다. 잠시 의논 끝에 정한 곳은 캄피돌리오 언덕. 생각했던 곳이 맞아도, 아니어도 사실 상관없었다. 어디든 멋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걷다 보니 갈림길 아닌 갈림길이 나타났다. 왼쪽엔 계단이 위로 쭉 쌓아진 길, 오른쪽엔 구불구불 걸어 올라가는 길이었다. 둘은 짧고 굵어 보이는 왼쪽 계단 길을 선택했다. 올라가 보니 잘 못 온 것 같았다. 캄피돌리오 언덕이 아니었다. 성당 하나가 있을 뿐 다른 곳으로 갈 순 없었다. 하지만 뒤돌아 서서 우리가 올라온 계단 쪽을 바라보니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 검색해 보니 이 계단의 이름은 천국의 계단(Ara Coeli Staircase)이었고 위의 성당은 1,200년대 지어진, 프레스코화로 유명한 산타마리아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in Ara coeli)이었다. 잘못 찾아간 곳에도 당연하다는 듯 멋진 유적이 기다리고 있다니 혀가 내둘러졌다. 사회와 중년생은 가슴 벅찬 로마의 전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며 우리가 이탈리아에 온 것을, 그리고 지금 유럽 역사의 심장부에 서 있음을 실감했다.
걸어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우리가 오늘 오전에 예약한, 20일쯤 뒤에 머무를 호텔의 안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실물을 보고 예약하니 마음이 놓였다. 긴 여행의 특권이라고나 할까? 웃음이 났다. 몸은 피곤했지만 둘 다 배는 아직 부른 상태. 점심에 할머니 식당에서 너무 과식을 하는 바람에 저녁은 생략하기로 했다. 우리는 곧장 숙소로 와서는 씻고 침대에 누워 내일 아침 기차표를 점검했다. 트렌잇(Trenit!)이라는 어플인데 이탈리아의 기차 노선은 모두 이 어플로 확인이 가능해서 상당히 편리했다. 우리가 예매한 남부의 살레르노(Salerno) 발 트렌이탈리아 열차는 09:35분에 로마 테르미니역을 출발하여 13:23분 베네치아 메스트레(Mestre) 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베네치아에서 묵는 숙소는 본섬이 아닌 메스트레 역 바로 앞에 잡았기 때문에 역에서 내리면 바로 호텔이라 이동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좋다고 수다를 떨다가 서서히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 다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기분 좋은 신호였다. 꿈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베네치아행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신호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던 것 같았다. 오늘은 2023년 4월 4일 화요일, 그리고 로마에서 우리의 진정한 첫 휴일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