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3일차)
때는 지난 편 후반부. 간신히 몸뚱이를 이끌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들른 마트에서 착한 가격으로 저녁 식사거리를 구입한 두 사람. 양손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벼워진 채 걸어가는 중년생의 뒷모습이 오늘의 표지 이미지(제목: 어깨가 처진 게 아니라 짐이 무거운 거예요)로 선정되었음을 간단히 밝히고 다음 날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2023년 4월 3일 월요일)
누가 쉬어가는 여행이라고 했을까? 사회와 중년생은 오늘도 새벽같이 기상했다. 로마에 오자마자 시작된 3일 연속 가이드 투어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제와 그제의 반나절 투어 정도가 아닌, 아침 7시부터 대략 밤 9시까지 온종일 강행군으로 진행되는 투어였다.
이름하야 [남부 환상 투어]. 로마에서 버스로 출발하여 남부지방의 아말피 해안도로와 포지타노, 소렌토 등을 들른 후, 거의 1,700년 동안 묻혀있다 발굴된 두근두근 폼페이 유적까지 둘러보고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코스. 그저 눈만 떴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밀린 피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고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너무 기대되는 날이었다. 눈, 코, 귀, 입에 지식욕까지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오늘 하루 다리 한쌍쯤은 마음껏 혹사시켜 주마. 게다가 오늘 이후의 일정은 딱히 정해두지 않았기에 내일 하루 정도는 쉬면 그만이었다.
아침 6시 반 조금 못 되어 우리는 그새 조금 익숙해진 “본 조르노!”를 어제보다 큰 소리로 외치며 호텔 로비를 나서고 있었다. 투어 약속 시간이 6시 50분이니까 20여 분 남은 시각. 하지만 오늘은 발걸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온 내내 배꼽 정중앙에 딱 붙들어 메고 다녔던 가방도 다소 옆구리 쪽으로 느슨하게 흘러내린 상태였다. 이유인즉슨 집결 장소가 구글 맵으로 걸어서 10분도 채 되지 않는, 그것도 어제 가본 경로에 있는 곳이었고, 로마에 와서 이삼일 가량 긴장하고 지켜본 결과, 사람이 밀쳐질 정도의 관광지가 아닌 이상은 소매치기를 너무 심하게 걱정할 필요까진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멘 가방처럼 약간은 느슨해져 편안해진 마음으로 바라본 새벽의 로마는 참 예뻤다. 하늘은 이미 파랗게 올라왔지만 아직은 어두워서 가로등이 켜져 있는 깨끗하고 맑은 거리. [상쾌하다]는 단어와 꼭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7분 정도나 걸었을까? 벌써 약속 장소인 큰 길가 모퉁이가 나타났다. 우리 것으로 보이는 버스도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주위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 15분 전이었다. “우리 잘못 온 건 아니겠지?” 여유롭던 사회와 중년생이 갑자기 서로 불안해하는 순간, 세워진 버스 쪽에서 언뜻 봐도 쾌활함으로 무장한 한 사람이 나타나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남부 투어세요? 오늘 1등이십니다. 예약자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하하하!” 다행이었다. 우리는 이름을 대고 출석 체크를 마친 후, 실내등을 켜지 않아 아직 어두운 버스의 앞쪽 문으로 올라섰다. 잘 생긴 이탈리아인 기사님께 웃으며 인사를 하고 인도 쪽 세 번째 줄에 나란히 앉아 오늘의 일행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지나니 하나 둘 버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그 넓은 버스 빈자리가 블록 쌓기를 하듯 순식간에 사람들로 착착 채워졌다. 불과 10분 새에 탑승이 완료되고 버스 출입문이 닫혔다. 이어서 버스 실내등이 켜지고 멋진 안경이 인상적인 가이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행되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일사천리로 스르륵- 출발하는 버스. 오전 7:00시 정각이었다. 약속 잘 지키는 한국인들 후훗.
가는 동안 오늘 목적지들에 관한 가이드의 열정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입담이 워낙 생생해서 아름다운 아말피 해안도로와 절벽 위에 세워진 낭만적인 도시 포지타노,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노래로 익숙한 소렌토(사실 사회중년생에겐 프랜차이즈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더 익숙한 이름이지만)를 거쳐 폼페이 유적지까지 이야기가 이르렀을 땐 이미 엉덩이가 들썩들썩했다. 빨리 가보고 싶었지만 그전에 우리가 먼저 향한 곳은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남북으로 긴 이탈리아라서 남부까지는 버스로 오랜 시간 이동해야 했고, 때문에 출발시간이 너무 일러서 아무것도 못 먹고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기에 간단히 요기를 하라는 가이드의 배려였다. 물론, 화장실 이용도 함께.
버스에서 들었던 가이드의 설명 중에는 휴게소 이용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머무는 시간이 길지는 않으니 간단히 커피와 빵 정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이용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먼저 계산대에서 계산부터 한다. 둘째, 커피와 빵 코너에 가서 영수증을 바(bar) 위에 올려둔다.(사람들이 많을 경우 마냥 기다리다간 버스가 출발하니 사람들 틈으로 한쪽 어깨를 살짝 들이밀고 당당하게 영수증을 척- 하고 올려둔다) 셋째, 직원이 눈을 맞추면 내가 원하는 메뉴를 말한다. 넷째 받아서 맛있게 먹고 나온다.
이윽고 버스가 넓은 휴게소 주차장에 천천히 멈춰 섰다. 사람이 없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가자 계산대에도 바에도 온통 아이들이 바글거렸다. 수학여행이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이미 교육을 받은 우리는 침착하게 순서대로 했다. 버스에서 수없이 반복해 외웠던 이탈리아어를 계산대에서 비장하게 외쳤다. “두에 카푸키노, 에- 두에 꼬르네또!”(카푸치노 2잔과 꼬르네또 2개) 한 번에 알아듣고 계산해 주는 고마운 직원. 총 7.6유로. 뒤에서 안심하는 [사회]를 의식하며 뿌듯해하는 [중년생]이었다. 첫째 미션 석세스!
이어지는 다음 미션. 빵 코너. 엄청 붐비는 아이들 사이에서 기회를 보다가 냅다 영수증을 내밀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남자 점원분이 다행히 우리를 보셨다. “두에 꼬르네또!” “쵸콜라또 에 크레마!” 우리는 수 없이 되뇌었던 이탈리아어를 기계적으로 내뱉고는 초콜릿과 크림 꼬르네또를 무사히 받아 들었다. 특히 초콜릿 꼬르네또는 그 자리에서 직접 누텔라 초코크림을 쭈욱 짜서 집어넣어 주는 최고 인기 품목이었다. 빵 속으로 행복도 쭈욱- 함께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또다시 미션 클리어!
마지막 미션인 커피 받기는 한산해서 의외로 쉽게 해결했다. 애들이 커피 안 마시는 건 아무리 커피의 나라인 이탈리아일지라도 똑같은가 보다. 그러고는 바 한 구석에서 먹는데 어찌나 꿀맛이던지. 다 먹고 화장실까지 들르고 나자 모든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 때문인지 무언가 마음이 든든해졌다. 다시 버스에 올랐고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아 인원체크를 마치자마자 버스는 다시 바퀴를 움직였다. 때마침 가이드가 음악을 몇 곡 틀어주었다. 루치아노 파파로티가 부른 ‘오 솔레미오(O Sole Mio)’와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A Surriento)’, 조수미가 부른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안드레아 보첼리가 부른 ‘Time To Say Goodbye(Con Te Partiro)’와 ‘카루소(Caruso)’,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 등 대부분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거나 귀에 익은 노래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르게 들리다니.
마치 이름은 익숙하지만 실상은 전혀 몰랐던 이탈리아처럼, 유명하긴 하지만 딱히 가슴에 와닿는지는 모르며 들었던 노래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진짜 소렌토로 가는 버스 안에서 들으니 한 소절 한 소절이 몸에 와닿는 기분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노래 역시 아는 만큼 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덧 우리도 모르게 따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외국인들도 한국에 와서 아리랑을 들으면 비슷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바다 절경이 내려다 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해안도로 위를 달리던 감성 충만 버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멈춰 섰다. 그러고는 가이드의 안내가 이어졌다. 내려서 잠시 사진을 찍다가 곧 도착할 작은 버스 2대로 나누어 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렌토(Sorrento)부터 살레르노(Salerno)까지 바닷가 절경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그래서 유명 영화에서 주인공이 멋진 스포츠카를 몰고 질주하는 씬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말피 해변도로. 그중에서도 단체관광을 위해 포지타노로 가는 길엔 대형 버스는 안 되고, 허가받은 운전사가 모는 작은 버스로만 이동이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 일행이 나누어 탄 2대의 버스는 옛날 대관령 고개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심하게 구불거리는, 멋지지만 무지막지한 길(비범한 운전실력이 아니고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극악 난이도)을 지나 다행히 포지타노에 살아서 도착했다. 이윽고 내려서 모두의 생존(?)을 확인한 후, 간단한 설명과 함께 주어진 자유시간. 아직 추워서 보트는 운행하지 않는다고 했다. 날씨가 아주 맑지는 않았다. 구름이 많고 바람이 강해서 생각보다 쌀쌀했기 때문에 사회와 중년생은 짧은 논의 끝에 해변 쪽 카페에 가기로 결정했다. 아기자기한 마을을 감상하며 언덕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얼마간 걸어내려가니 작은 성당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계단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해변에 발이 닿았다.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 신혼부부로 보이는 커플 한 쌍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해변. 하지만 너무 세찬 바람 때문에 오랜 감상은 무리였다.
우리는 날아갈 듯한 모자를 붙잡고 펄럭이는 점퍼를 진정시키며 걸은 끝에 해변 오른쪽 구석에 있는 작은 호텔 1층에 위치한 하얗고 예쁜 카페로 입성했다. 주문할 메뉴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있었다. 레몬이 유명하다는 포지타노에서 먹는 소르베또 리모네(레몬 샤베트). 커다란 레몬 윗부분을 따서 안을 파내고 그걸로 샤베트를 만들어 다시 껍질 속에 채워 내놓는 디저트였다. 생각보다 맛있고 생각보다 시리고 생각보다 훨씬 컸다. 우리는 기분이 좋아져 예쁜 미니 케이크 하나와 에스프레소 한잔도 함께 먹었다. 총 25유로. 호텔 카페라 비쌌지만 더욱 강해진 바람을 피하는 데에는 최상의 안식처였다.
자유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마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 집결 장소로 올라갔다. 듣던 대로 예쁜 마을이었지만 둘러보기에 시간이 너무 짧아서였을까, 아니면 날이 추워서였을까. 큰 감동은 없었다. 아름다운 부산의 영도가 생각났다. 우리나라도 참말 예쁘구나. 이탈리아에서 우리나라의 장점을 찾게 되다니 정말 신기했다. 포지타노는 여름에 와서 여유롭게 한동안 머물면 훨씬 좋을 것 같은 곳이었다.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제 남은 건 폼페이. 하지만 도착해서 입장하기 전에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투어비용에 점심 식사가 포함되어 있어서 가이드의 안내와 함께 폼페이 유적지 코앞에 위치한 식당으로 향했다. 둥근 테이블 여러 개에 일행이 나누어 앉았다. 우리 테이블엔 사회와 중년생 외에 어머니와 딸로 보이는 두 분이 함께 앉았다. 정해진 음식이 순서대로 쫘악 깔렸다. 토마토 스파게티, 마르게리따 피자, 오징어와 새우등 해산물 튀김, 빠에야 같은 밥도 있었다. 식사는 무료지만 그 외에 음료는 개인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공지가 있었다. 우리는 물 큰 병을 시켰고, 앞의 모녀는 콜라 한 캔을 주문했다. 어차피 둘이 마시기엔 물병이 너무 컸기에 좀 나누어 드리며 인사를 건넸더니 입을 떼시며 이것저것 조심스레 물어보시는 어머니. 질문이 점점 늘어나자 옆에서 딸이 그만 좀 물어보라고 툭툭 쳤다. 시집가서 외국에서 사는 딸과 한국에 계시는 어머니가 시간 내서 함께 여행을 온 거라는 두 분의 사이가 좋아 보여 미소가 지어졌다. 이야기 끝에 우리가 한 달 일정으로 이탈리아에 머문다고 하니 놀라셨다. 사실 우리도 놀랍다고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가 지금 이탈리아에 있을지. 그것도 한 달이나 여행을 떠나올지 몰랐으니까.
배가 불러갈 즈음 식당 직원이 다가와 우리 테이블의 음료 값이 7유로라고 했다. 팀 별이 아닌 테이블 별로 계산되는 시스템이었다. 잔돈을 나눠 내기도 애매하고 금액이 많지 않아 우리가 계산했다. 콜라 한 병일뿐인데도 상당히 미안해하시며 또 고마워하셨다. 이름 모를 사이좋은 모녀께 이 글을 빌어 닿지 않는 안부를 전해본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은 가이드의 인솔하에 드디어 폼페이 유적지로 입성했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던 그 당시는 어땠을까? 그때 바람의 방향이 하필 폼페이 쪽으로 바뀌는 바람에 하룻밤 사이에 도시 전체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으며 유적지를 걸으니 몸에 전율이 돋았다. 그리고 화산재 속에 덮인 채 잊혔던 도시가 거의 1,700년 만에 발굴되었는데도 상당히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이 너무 신기했다. 특히 놀랐던 것은 그 옛날 화덕의 모습이 지금의 것과 구조가 똑같았다는 점이었다.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니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모습을 보고 따라 만든 것이 지금의 화덕이라고 했다.
그 옛날의 문화 수준이 이 정도로 높았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그 당시 시장이 있던 터에 그려진 벽화는 과연 2,000년 이전의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생해서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폼페이 유적지의 클라이맥스는 화산재에 덮인 채로 마지막을 맞이했던 사람들의 실제를 본뜬 석고상이었다. 누워서 코를 막고 있는 사람을 보니 가슴이 아팠고, 쪼그려 앉아 기도를 하듯 두 손을 모아 코를 막고 있는 사람의 석상 앞에선 눈물이 나왔다. 실제 사람이 화산재를 덮어쓴 상태 그대로 녹아버려 발굴 당시 빈 공간이 생긴 곳에 석고를 부어서 석상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때의 동작이나 절실한 표정까지 세밀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한참을 더 돌아보고 다시 로마행 버스에 오를 시간이 되었는데도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또, 지는 석양을 보며 로마로 가면서도 폼페이에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가 오전에 버스에서 서 왜 그렇게 폼페이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며 매번 가는데도 매번 흥분된다는 이야기를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순간, 남부 환상 투어가 아니라 남부 환장(?) 투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와 중년생 모두 환상적인 폼페이에 완벽하게 매료되었으니까.
붉은 해가 고단한 몸에 와서 닿았다. 피곤했지만 오늘 하루 따뜻하고 짜릿했다. 돌아올 때는 가이드가 모두의 체력을 고려하여 휴게소에 들르지 않고 우리가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참이 지나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고 어느 정도 시간을 둔 후에는 소위 ‘가정방문’ 시간이 이어졌다. 가이드가 버스 맨 뒷자리에서부터 한 팀 씩 상담하며 앞으로 오는 시간이었는데 여기서 상담이란 곧 ‘질문’이었다. 우리가 이탈리아나 여행에 관해 가이드에게 물어보고 싶은 모든 것이 해당된다고 했다. 앞으로의 일정이 모호한 사회와 중년생은 알차게 물어보기로 했다. 한 달 계획으로 왔지만 계획이 없다는 우리의 첫마디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가이드. 하지만 이내 열정적인 눈빛으로 바뀌었다. 불쌍한 너희들의 일정을 알차게 채워주겠노라는 듯이.
우리가 모레 기차표를 끊어놓은 베네치아와 그 이후 어디가 좋은지, 또 어디는 뭐가 맛있고 볼거리는 뭐가 있는지부터 식사예절과 너무 사소해서 물어보기 뭣하지만 여행객들이 궁금해하는 소소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까지. 우리는 가이드의 육성을 통해. 그리고 아이폰의 에어드롭을 통해 비책이 적힌 메모장까지 전수받았다. 그리고 우리의 남은 여행 대부분의 일정은 이날 전수받은 내용을 기반으로 수립되었다. 이 시간을 빌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담으로 우리 바로 전에 ‘가정방문’을 한 팀은 젊은 어머니와 10대 아이들 둘(남 1, 여 1)로 구성된 가정이었는데 소매치기에 대한 걱정을 가이드에게 상담했다.
어머니: “가이드 님, 지하철이나 버스에 소매치기가 많다고 하셨는데 그럼, 택시는 괜찮을까요?”
가이드: “네? 택시에서 걱정이시라면 혹시, 바가지요금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머니: “아니 소매치기가 혹시 택시기사로 변장해서 있을 수도...”
가이드: “...... 어머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하.”
너무나 소녀처럼 순수한 어머니의 질문에 주위 사람들이 함께 웃고 말았다. 고의로 엿들은 것이 아니라 자리가 바로 앞이라서 듣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바이다.
우리는 거의 맨 앞쪽에 탔기 때문에 우리의 상담이 끝나자 마지막 한 팀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해는 이미 져서 어두웠고 버스는 로마에 바퀴를 들이밀었다. 도착시간은 밤 9시 10분 전이었다. 차가 멈춰 서자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별은 쿨하게~ 내리실 때 수고하신 기사님께 감사하다고 인사해 주시고 내리시면 뒤도 돌아보지 마시고 가세요! 하하!” 우리는 내리면서 준비했던 멘트를 기사님께 날렸다. “그라치에 밀레~” 감사하다는 말에 mille(대단히)라는 단어 하나만 붙였는데도 기사님이 방긋 웃어주셨다. 그러고는 사회와 중년생은 쿨하지 못하게 담당 가이드에게 오늘 최고였다고 감사의 쌍따봉을 날리고 헤어졌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나중에 알았지만 사실 이탈리아 기준으로 밤 9시면 한창 저녁식사 할 시간이었다.) 일단 숙소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제 귀갓길에 호텔 옆 골목에서 발견했던 어쩐지 맛있어 보이던 피자집이 떠올랐다. 우리는 거기로 가서 피자를 포장하기로 했다. 이제 며칠 지나서 밤이 그닥 무섭지 않기도 했고, 오늘 너무 체력소모를 많이 한 탓에 절대로 공복에 잠이 들 것 같지 않기도 해서였다. 가게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있었고 밖에 한 두 팀 정도 대기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가서 물어보니 포장은 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칼조네 피자 한판과 마르게리따 피자 한판을 주문했다. 16.5유로. 먹어보지 않아도 풍기는 분위기와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맛을 알 것 같았다. 피자를 받고 호텔로 가는 길에 미니마켓에서 맥주 작은 병 2개와 과자 한 봉지까지(7유로) 샀다. 맥주 이름은 이끄누사(Ichnusa). 사고 나서 검색해서 알게 됐는데 남부의 사르데냐 맥주란다. 오늘 남부 투어를 했으니 의미도 딱이었다. 번개같이 씻고, 아니 번개보다 빨랐을지 모른다. 이날 밤 배고팠던 우리 둘의 속도는. 맥주병을 따고 마르게리따 한 조각씩을 입에 물었다. 먹어 본 피자 중 최고였다. 치즈는 너무 부드럽고 풍부했으며 토마토는 또 원래 이렇게 맛있는 과일(혹은 채소)이었나 싶었다. 도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포장을 기다릴 때 가게 안에 서있으면서 본 내부 화덕이 폼페이에서 봤던 것과 같은 구조여서 더 기대됐는데 천상의 맛이었다. 칼조네 피자는 우리가 아는 칼조네처럼 완전 만두모양은 아니었고 속이 보이게 피자를 살짝 만 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안에 든 치즈와 토마토, 그리고 짭짤한 안초비. 맥주와 너무 잘 어울렸다. 맥주 맛은 어땠냐고? 우리의 선택은 탁월했다. 나중에 보니 이끄누사는 현지에서도 손꼽히는 맛있는 맥주였으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피자랑 잘 어울리나 했는데 이것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피자집은 유명한 나폴리 피자 맛집이었다. 남부식 피자에 남부식 맥주니 서로 안 어울릴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내일 하루는 천천히 쉬면서 나머지 여행의 일정을 정하기로 하고, 두 사람은 늦게까지 걱정 없는 수다를 이어갔다. 우리의 밤은 행복했고 우리의 위장은 더없이 황홀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