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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May 23. 2024

Venezia : 굿바이 로마, 헬로 베네치아

4월 5일 (5일차)

오전 9시 35분 기차를 타기 위해서 테르미니 역에 9시까지는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침에 짐을 다 꾸려놓고 8시쯤 몸만 잠깐 빠져나와서 커피바에 들렀다. 체크 아웃을 하고 갈 수도 있었지만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로마의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지나 아침을 먹으러 가기는 좀 부담스러웠으니까.

꼬르네또 2개와 카푸치노 2잔. 에스프레소를 마셔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침에 빵과 함께 먹을 때는 결국 주문하는 건 언제나 카푸치노였다. 오늘 로마를 떠나니까 마지막 5유로의 행복이었다. 아니지, 3주 뒤쯤 다시 로마로 돌아오니까, 그때 다시 오면 되니까 엄밀히 말해 마지막은 아니었다. 기분 좋게 배를 살짝 채운 우리는 방으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빠진 짐이 없나 확인하고 로비로 내려갔다. 체크 아웃할 때 이탈리아는 도시세금(City Tax)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역시나 내야 하더라. 직원이 1인 1일에 4유로라고 했다. 2인이니까 하루에 8유로. 5일 치 총 40유로를 지불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래서 더 이상 무섭지 않은 로마의 골목길을 지나 우리는 닷새 전 주변을 경계하며 빠져나왔던 그 테르미니 역으로 다시 들어갔다.


(2023년 4월 5일 수요일)

공항에서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를 타고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던 첫날 밤엔 호텔을 찾아가는 일이 급선무라 역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겨를이 없었는데 아침에 보니 무척 넓고 사람들로 붐볐다. 전면에 설치된 큰 광고판 양 옆으로 공항처럼 출도착을 알리는 커다란 전광판이 하나씩 걸려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왼쪽 전광판은 테르미니 역에 도착하는 열차의 번호와 출발지명, 시각, 게이트 번호를 위한 것이었고, 오른쪽은 여기서 출발하는 열차의 마찬가지 내용을 위한 전광판이었다. 그리고 전광판 밑으로는 안내 이정표가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플랫폼 위치부터 공항철도편 방향, 화장실, 엘리베이터 등 각종 편의시설까지 안내하고 있었다. 2층에 대합실 및 바(Bar)와 레스토랑 등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어서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시간도 애매하고, 이미 커피와 빵을 흡입한 상태여서 우리는 캐리어 두 개를 나란히 붙여두고, 전방의 전광판에 우리의 기차가 도착하는 플랫폼 번호가 뜨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보면 의외로 쉽게 되어있는 테르미니 역 전광판

5분쯤 기다렸을까? 2인 1조로 짝을 이뤄 다니는 경찰(Polizia)이 순찰을 돌다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한국이라면 아무 일도 아니었겠지만 이탈리아에선 모든 것이 처음이라 제법 긴장되었다. 여행객이라고 대답하고, 한국인이라고 대답하고, 여권을 보여주자 스캔해서 확인하는 절차가 잠깐 동안 진행되었다. 이상 없이 확인을 마치고는 웃으며 좋은 여행 되라며 자리를 떠나는 두 경찰.

잠시 뒤 방금 우리를 떠난 경찰이 다른 관광객에게 가서 여권을 확인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사회와 중년생은 마주 보고 진정한 안도의 미소를 교환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두 사람의 마음속에 ‘진짜 경찰은 맞겠지?’하는 의구심이 스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우리 열차 떴다!” 그때 사회가 외쳤다. 우리는 전광판에서 베네치아행 열차의 번호와 플랫폼 번호를 번갈아 꼼꼼히 확인하고는 온라인 예매로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탑승권의 QR코드를 개찰구에 찍고 들어갔다. 잠시 뒤 열차가 들어왔다. 사회와 중년생은 한 손으로는 캐리어 손잡이를, 다른 한 손으로는 앞으로 둘러 맨 크로스 백의 지퍼 부분을 꼭 잡고 있었다. 이제 시내를 다니는 정도는 익숙해져서 전혀 긴장되지 않았지만 기차는 상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공항 철도인 레오나르도 익스프레스를 제외하면 첫 번째 기차 이용인 데다 남부투어 때 식당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모녀분이 들려준 경험담이 떠올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몇 년 전 가족여행. 기차에 탑승하려는 찰나, 임산부로 보이는 분이 앞에서 넘어져서 부축해 주는 사이 할머니와 아이 등이 갑자기 몰려들었고 정신 차려보니 다 털어갔다는 생생한 이야기. 행색이 너무 일반인스러워서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긴장이 무색하게도 스탠더드(Standard) 탑승칸 쪽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데 비해 두 사람이 서있는 비즈니스(Business) 탑승칸 앞은 대체로 한산했다. 임산부나 할머니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소매치기가 겁도 나고, 기차에서 캐리어 도난이 많이 일어난다는 인터넷 포스팅을 많이 접해서 일부러 비즈니스를 예매했었는데 성공이라면 성공이었다. 내부가 한산하고 넓어서 시야에 다 들어오기 때문에 소매치기나 도둑이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심했다. 사람이 적으니 짐을 놓을 공간도 경쟁할 필요 없이 큰 캐리어를 눈에 보이는 좌석과 좌석 사이에 넣을 수 있어서 더욱 편했다. 4시간 가까이 가는, 우리가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탑승할 차편 중 가장 장거리 열차였기 때문에 다른 비용을 줄이고 여기에 지출을 좀 더 하더라도 맘 편히 가고 싶었다. 안전을 위한 선택적인 호사라고나 할까.

빼꼼히 보이는 안전하게 보관된 사회의 캐리어 (feat. 좌측 빼꼼히 보이는 사회와 여행 반려 머플러)

멈춰있던 고급진(?) 우리의 열차가 다시 바퀴를 움직여 플랫폼을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여기서 잠깐! 출발하는 열차 안에서 찍은 로마 테르미니 역 플랫폼 사진이 이번 회차의 표지 이미지(로마, 3주 후에 뵙겠습니다!)로 선정되었음을 밝힌다. 비록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지라도 강제로 알려드리는 바이다.


열차가 속도를 올리자 승무원이 모습을 비췄고, 비즈니스 석에는 물 한 병과 감차칩, 커피, 냅킨 등 약간의 씹을 거리가 서비스로 제공되었다. 그 어떤 소매치기라도 올라탈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어느새 두 사람은 긴장이 풀리고 여정을 즐기는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 창 밖의 아름다운 풍경을 영화 삼아 감자칩에 커피를 곁들이는 색다른 즐거움을 맛보는 사이, 우리를 태운 열차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북쪽을 향해 질주했다. 로마 테르미니(Roma Termini) 역에서 출발한 열차는 로마 티부르티나(Roma Tiburtina), 피렌체 산타마리아노벨라(Firenze Santa Maria Novela), 볼로냐 센트랄레(Bologna Centrale), 페라라(Ferrara), 파도바(Padova)를 거쳐 오후 1시 30분경에 베네치아 메스트레(Venezia Mestre) 역에 도착했다. 메스트레 역은 많은 기차가 오고 가는 것에 비해 구조는 비교적 단순해서 헤매지 않고 역 밖으로 빠져나오기 쉬웠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작은 건널목 바로 건너편으로 우리가 예약한 숙소가 보였다. 앞으로 베네치아에서의 7박을 책임질, 우리의 이탈리아 두 번째 집이었다. 호텔은 깨끗하고 쾌적했다. 방도 상당히 넓었고 밝았다. 사실 로마에서는 거의 매일 투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이동이 편리한 위치인가가 중요했을 뿐 시설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었는데, 베네치아에서 묵는 동안은 휴식이 주목적이어서 메스트레 역 쪽으로 정했던 것이 적중했다. 검색한 정보에 따르면 소위 우리가 생각하는(마을 안에 물길이 지나는) 베네치아를 ‘본섬’이라고 부르는데 그쪽에 숙소를 잡으면, 멋진 경치를 얻는 대신 비싼 가격과 좁고 불편한 시설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섬의 건축물들은 역사를 그대로 담고 유지하기 위해 간단한 보수 정도만 할 뿐이어서 현대식 건물의 편리함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본섬에서 기차로 한 정거장, 버스로는 15분 정도 떨어진 메스트레 역 부근은 이동이 다소 불편한 반면, 현대적인 호텔이 많고 가격도 저렴한 것이 장점이었다. 선택의 문제지만 이때의 우리에겐 이동의 불편함보다는 호텔의 편리함이 더 큰 장점으로 다가왔고,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도착 당시, 체크인 시간이 한 시간 넘게 남아서 우리는 로비에 짐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직원분이 청소된 방이 있나 확인하더니 바로 키를 주셨다. 신이 난 우리는 방에 짐을 두고 잠시 여유를 부리다가 간단히 배를 채우러 나가보기로 했다. 호텔 앞은 삼거리 구조였다. 한쪽 건너편으로는 메스트레 역, 또 한쪽 건너편으로는 다른 호텔과 그 옆으로 붙은 중식당 하나가 보일 뿐 눈에 띄는 다른 음식점이나 상점은 없었다. 이 부근은 상업시설이 밀집된 느낌이 아니어서 번화가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좀 걸어가야 할 듯싶었다. 우리는 중식을 먹을 정도(기름진 음식이 많은 특성상)로 배고프진 않았고, 그렇다고 멀리까지 걷기도 무엇해서 메스트레 역 안에 한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처음,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편에는 매표소와 플랫폼이 바로 보이고, 왼편에는 푸드코트처럼 몇몇 먹을거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얼핏 봐도 갖춘 구색이 나쁘지 않았다. 가장 안쪽으로 눈길을 던져보니 우리에게 익숙한 맥도날드도 있었다.

짧지만 굵은 고심 끝에(배고파서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는 피자. 가게 이름도 이탈리아어로 ‘안녕’이라는 뜻의 차오(Caio)가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친근했다. 네모 모양으로 된 조각 피자를 파는 곳이었고, 우리는 마르게리타와 살라메 피칸테, 제로 코크 한 병을 주문했다. 우리는 받아 들고 곳곳에 서서 먹을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는 바(Bar)로 가져가 무심코 한입씩 베어 물었다. “뭐야?? 이거 너무 맛있잖아!” 우리는 흡입한 뒤, 바로 한 조각씩 더 주문했다. 피자 4조각에 콜라 1병. 총 21.8유로. 저렴하다고 할 순 없는 가격이었지만 1조각의 크기는 매우 컸다. 더구나 기차역에서 판매하는 피자가 이렇게 맛있다니. 역시 분명한 피자의 나라였다.

배도 채웠겠다 우리는 바로 옆 편의점에서 사회가 좋아하는 젤리 2통(7.8유로)까지 사고는 역 밖으로 나왔다. 동네랄 것 없는 한적한 주변 거리를 소화도 할 겸 맛보기로 산책한 다음, 호텔로 돌아가서 짐을 풀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좀 쉬다가 우리가 예약한 베네치아 야경투어 프로그램 약속시간인 오후 5시까지 본섬으로 갈 생각이었다. 오늘도 날이 상당히 쌀쌀했다. 잠깐 산책했을 뿐인데도 으슬으슬했다. 평소 추위를 잘 타지 않는 중년생이지만 오늘만큼은 야경투어가 걱정될 만큼 기온도 바람도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두 사람은 최대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 남은 시간 동안 필사적으로 빈둥거렸다. 드러누웠다가 새하얀 호텔 침대 시트 위에 걸터앉아서 뒹굴대기도 하다가 또, 사온 젤리를 집어 먹기도 하면서 에너지를 충전시켰다. 그러다 보니 금세 4시가 되었다. 둘은 얼마간 늘어졌던 몸뚱이를 일으켜 옷에다 집어넣고는 다시 코앞의 기차역으로 향했다.


베네치아 메스트레 역에서 본섬인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까지는 기차로 1 정거장. 십여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지만 본섬과 연결된 다리를 건너기 때문에 경치가 눈부셨다. 티켓은 2인에 2.9유로. 탁 트인 파란 하늘과 같은 색의 바다가 가는 내내 이어졌다. 메스트레 역 주변에서는 나지 않았던 베네치아에 온 실감이 온몸을 서서히 휘감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한 베네치아 산타루치아 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앞으로 큰 물길이 지나가고 그곳을 오가는 각종 수상버스와 택시. 그리고 그 때문에 파도처럼 출렁이는 물결과 그 위를 건너는 다리. 건너편에 서있는 성당과 그림 같은 건물들까지. 심장이 멋대로 두근두근거렸다. 그리고 이 모든 비현실적인 장관과 마주한 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런 식의 풍경은 모두 베네치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겠구나.’라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자연스레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현실로 돌아와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아있었다. 우리는 역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노란색 간판이 걸린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오늘 야경투어에서도 이용해야 하는 수상버스인 바포레토(Vaporetto) 탑승권을 미리 사두기 위함인데, 1회 권부터, 1일권, 3일권, 7일권... 이런 식으로 기호에 따라 구매할 수 있는 티켓 종류가 많았다. 우리는 고심 끝에 3일권을 구매했다. 1인에 45유로. 총 90유로였다. 티켓 이름은 우니카 카드(VENEZIA UNICA)로 바포레토 이용 외에도 본섬과 오고 가는 시내버스까지 구매한 기간 내에 무제한 탑승 가능한 티켓이었다. 구매 후, 우리는 옆의 다리를 건너 본섬에 입성했고, 투어 집합 장소인 천주교 성당(Chiesa di San Simeon Piccolo)으로 향했다. 이 성당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산타루치아 역을 나와 보이는 건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이었다.(그냥 성당 앞 계단에서 보자고 하면, 처음 와도 여기인 줄 저절로 알게 된다.)

오른쪽에 산타루치아 역, 왼쪽에 에메랄드 색 천주교 성당과 계단 @옆의 다리 위에서 찍음

우리는 아직 시간이 남아서 성당 돔 앞 계단에 앉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눈앞으로 흐르는 물결과 그 위로 비추는 햇살을 멍 때리듯 감상하다가 어느덧 춥다는 생각이 들 때쯤 계단 아래로 가이드가 등장했고, 로마에서 투어를 몇 번 해서인지 이후 흐름은 익숙했다. 인사하고 인원 체크하고 수신기 받아 착용하고... 하지만 오늘은 합쳐서 세 팀뿐이었기 때문에 거의 바로 투어가 시작되었다. 성당 뒤쪽으로 나있는 골목길로 들어서며 오늘 코스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산타루치아 역을 나서자마자 이어지는, 관광객들의 행렬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는 기본적인 본섬 도보 루트가 아닌, 현지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도록 짜인 코스라는 내용과 중간중간 포토 스팟에서 가이드가 직접 사진을 찍어준다는 팁까지.

다른 사람이 사진 찍어주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회와 중년생이었기에 다소 부담은 있었지만 색다른 코스 구성이 맘에 쏙 들었다. 낡은 건물 벽 곳곳에 박힌 철심이 건물의 균열을 막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대학교 건물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도, 물 위에 지어진 섬이라 버틸 수 있는 전체 하중의 한계 때문에 건물을 높게 짓지 못했으며 무게를 줄이기 위해 창문을 많이 냈다는 사실까지, 하나하나 알찬 설명을 들으며 춥지만 초롱초롱한 눈으로 베네치아 곳곳을 거닐었다. 특히, 기사에서만 접하던 뱅크시의 작품이 어느 건물 벽에 그려져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움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림도 그림인데 어떻게 저기에 그렸을까? (feat. 뱅크시)

투어 일행은 7시경에 바포레토를 타고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성당(Abbazia di San Giorgio Maggiore)이 있는 작은 섬으로 향했다. 성당 앞 광장에서 바라보는 건너편엔 유명한 산마르코 광장에 서있는 종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점점 붉어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가이드가 사진을 찍어 주었다. 부끄럽고 말고 가 아니라 무조건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춥지만 않았다면 몇 시간이든 마냥 감상하고 싶었다. 우리는 다시 바포레토를 타고 물을 건너 산마르코 광장 뒤 쪽으로 이동했다. 수상버스에서 내려 잠시 가진 자유시간에 사회와 중년생은 가이드에게 제안하여 셋이서 근처 커피바로 들어가 에스프레소를 한잔씩 했다. 당연히 커피는 대접했고, 대신 감사하게도 이것저것 여행 알짜 정보를 들었다. 세잔에 3.6유로. 추위도 녹이고 화장실도 들른 값 치고는 저렴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여행 팁까지 전수받았으니 남는 장사였다(절대로 의도한 건 아니었다. 콜록콜록).

다시 투어가 이어졌다. 아름답고 작은 돌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두칼레 궁전의 법정과 운하 건너편의 감옥을 이어주는 다리로, 죄수들이 수감 전 마지막으로 바깥세상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고 한 데서 유래된 뜻을 가진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 이름과는 다르게 너무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탄식이 나온, 탄식의 다리

이어서, 운치 있는 가로등에 쓰인 유리가 베네치아 무라노 섬의 유명한 유리라는 설명을 하는 도중, 때마침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을 때는 가이드가 얼마나 세세한 시간까지 고려해서 일정을 짰는지 느껴져서 감동이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점등 시간을 맞추느라 휴식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하니 프로 의식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가로등이 켜진 베네치아 거리 (feat. 주인공은 갈매기)

놀라기는 일렀다. 궁전을 오른편으로 끼고 코너를 돌아 들어가니 잠시 후 일행들의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드디어 베네치아 하면 떠오르는 산마르코 광장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광장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게 컸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한 번에 담기지 않는 규모였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으로 한 바퀴 둘러보는 사이 하늘은 삽시간에 어두워졌고, 그럴수록 건물에 들어온 불빛은 빠르게 찬란해졌다. 야경이 특히나 아름답다는 산마르코 광장의 소문은 사실, 그 이상이었다. 사회와 중년생은 아까보다 한층 더 크게 벌어진 입으로 차가운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이윽고, 8시. 시계탑의 숫자가 바뀌며 광장에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야경 투어가 종료되었다.

산마르코 광장과 두칼레 궁전 (feat. 너무 넓어 안 찍힌 종탑은 나중에)

추위와 감동이 맞물려 코 끝이 더 찡해졌다. 일행들은 흩어졌고, 사회와 중년생은 가이드와 함께 바포레토를 타고 기차역이 아닌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버스까지 무료로 이용 가능한 3일(72시간) 탑승권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류장에서 가이드와 간단한 작별인사(사실 너무 추워져서 뛰면서 인사했다)를 나누고 우리는 2번 버스에 올라탔다. 조금 설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로마에서는 한 번도 버스를 타지 않았으니까.

이유는 소매치기 걱정도 아주 조금은 있었지만, 그보다는 골목길을 걷는 것을 둘 다 좋아해서였다. 게다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 나라의 골목길. 다리가 좀 아프더라도 가능한 걸어서 다니고 싶어 하다 보니 베네치아에 와서야 이탈리아 첫 버스를 타게 된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니 9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밤이 되자 추위도 극심해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몰려드는 더 극심한 배고픔. 이미 밤은 어두웠지만 그냥 호텔로 갈 수는 없었다. 피곤함을 이기는 배고픔이 우리의 발걸음을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라멘(RAMEN)이라고 쓰여 있는 중식당 앞이었다. 이탈리아는 밤 9시 경이 저녁식사 피크타임이라서 식당 카운터는 북새통이었다. 포장대기인지 좌석대기인지 모를 사람 몇몇도 서 있었다. 다행히 중국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중년생이 나서서 카운터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자리에 앉아 주문을 했다. 우리의 선택은 중국식 소고기 라면과 춘권, 그리고 오이무침, 미역줄기무침과 물 한 병이었다. 결과는 중국에서 유학했던 중년생은 물론이거니와 중식을 좋아하는 사회 모두 대만족이었다. 맛도 맛이지만 정말 추웠던 오늘이기에 따뜻한 국물이 몸 전체에 위로를 선사했다.

추위 타파! 허기 타파! 중식 라면! (춘권은 이미 뱃속에)

가격은 총 35유로. 나갈 때 카운터 하단의 자동 계산기기에 지폐를 넣으면 알아서 영수증도 발급되고 거스름돈도 나오는 시스템이어서 재미까지 있었다. 호텔방으로 올라가니 10시가 훨씬 넘은 시각. 그러고는 씻고 바로 잤느냐 하면 아니었다. 피곤했지만 내일부터 일정은 완전 자유인 데다가 방이 넓고 밝아서 충분히 여유 부리다 자고 싶었다. 우리는 침대 위에서 영수증 정리도 하고 내일 본섬에서 가볍게 쉴지, 바포레토 3일권도 끊은 김에 본섬 주위의 다른 섬들을 가볼지 고민하며 그 후로도 수다를 한참 동안 이어갔다. 틀어 놓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이탈리아 토크쇼에서도 패널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수다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였을까? 수다들 사이로 꿈이 조금씩 섞여 들기 시작하더니 두 사람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방의 불도 TV도 꺼야 한다는 습관적인 의지는 행동이 되지 못한 채 희미해지고 있었다. 술 대신 야경과 추위에 한껏 취했던 베네치아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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