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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May 02. 2024

Roma : 우리의 콜로세움은 프리

4월 2일 (2일차)

지난 편에 바티칸 박물관 관람 후 지칠 대로 지친 우리의 이날 마지막 사진이 오후 4시 10분 30초라고 했는데 오늘 표지 이미지(사람 둘을 살린 젤라또)가 바로 그 사진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힘들었던 날이기에 기념할 겸 올려두고 다음 날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하겠다.


(2023년 4월 2일 일요일)

오전 7시가 채 되기 전, 로마 시내의 어느 거리. 각각 크로스백과 힙색을 앞으로 메고 주변을 경계하며 열심히 걷고 있는 수상한 두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이름은 [사회], 그리고 [중년생]. 각자의 백 안에 든 것은 가이드 수신기에 연결할 검은색 유선 이어폰 하나, 스마트폰 한 대, 약간의 티슈, 금액 단위별로 한 두장씩 챙긴 유로화 지폐였다. 추가로 사회의 크로스백에는 호텔을 출발할 때 로비 자판기에서 뽑아 온 미니 초코볼과 프레첼 과자(총 2유로)가 들어 있었다. 어제처럼 당 부족 비상사태가 벌어졌을 경우를 위한 최소한의, 그러나 비장한 대비였다. 이게 이렇게까지 심각할 일이야?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작은 사탕이나 초콜릿, 과자류 등을 꼭 챙겨서 다니길 추천하는 바이다. 로마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볼 거리가 많아서 정신 없이 다니다가는 정신 차렸을 땐 이미 늦어버리니까. 다리도 위장도 모두 다. 


일정상 바쁘게 움직여야만 하는 패키지 여행도 아닌데 두 사람이 어제 아침보다 더 빨리 일어난 이유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어젯밤에(정확히 말하면 어제 낮에) 심하게 일찍부터 자서 새벽에 깰 수 밖에 없었고, 둘째는(이게 진짜 이유지만) 오전 7시 40분까지 지하철B(파란색 라인) 콜로세오(Colosseo) 역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티칸에 이은 우리의 두 번째 가이드 투어인 콜로세움 & 포로 로마노 투어의 집합장소가 바로 거기였다. 

레푸블리카(Repubblica) 광장에서 조국의 제단이 있는 대로로 걸어내려가다가 콜로세움이 있는 좌측 방향으로 난 길(Via degli Annibaldi)로 들어서서 조금 걷자 저 멀리 골목 끝으로 벌써부터 콜로세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몇 백미터 앞 콜로세움의 설레는 자태

세계사를 다룬 TV 프로그램이나 여행책자의 메인 페이지에서 줄곧 봐왔던 건축물이긴 했지만 실물의 존재감은 달랐다. 저 멀리서 단지 손톱만큼 드러났을 뿐인데도 막 설레기 시작했다. 중년생은 움츠렸던 허리를 펴고 다소 여유있게 콜로세움을 똑바로 쳐다보며 걸었다. 소매치기에 대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주변에 사람 자체가 없었으니까. 

덕분에 역사가 남겨놓은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눈앞에서 점점 커지는 콜로세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웅장했다. 이탈리아든 로마든 콜로세움이든 어려서부터 너무나 당연히 이름을 알고 있는 국가와 수도, 건축물이었지만 사실 나에게는 유명 연예인 같은 곳이었다. 여기저기서 자주 보고 접하지만 실상은 너무나도 먼. 

그렇게 동경하던 연예인을 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 연예인이 나를 정면에서 똑바로 쳐다보며 눈 앞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는 꼴이었으니 비현실적이고 설레는 건 당연했다. 지금은 볼거리가 넘치는 시대지만 TV가 아닌 실제 야구장에만 가도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그 옛날 이 길을 따라 검투사들의 경기를 구경하러 가던 로마인들의 가슴은 얼마나 뛰었을까? 담아두고 싶어 각기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두 사람. 잠시 후 지하철 역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의 담당 가이드가 어제 보내준 단체 카톡이 생각나 확인차 어플을 켰다. 오늘 만나는 정확한 위치는 콜로세오 지하철 역 1층 출입구 앞이었다. 도보로 이동한 우리가 도착한 곳은 2층 출입구여서 안으로 들어가 한층 내려가야 했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도착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가이드로 예상되는 차림(어제 처럼 깃발을 들었다거나 수신기가 가득 든 가방을 메고 있다거나 하는)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도 남았겠다 사회와 중년생은 합성한 것처럼 바로 뒤에 버티고 있는 콜로세움을 몇 장 더 찍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걸을 땐 몰랐는데 서있으니 상당히 쌀쌀한 날씨였다. 그래도 다행히 파란 하늘. 기분에도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콜로세오 역에서 바라본 콜로세움의 비현실적인 외모


“자~ 오늘 콜로세움 & 포로 로마노 투어 오신분들 이쪽으로 모이실게요!” 갑자기 나는 큰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수십명의 한국사람들과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나타났다. 인원이 상당히 많아 세 팀으로 쪼개서 진행 한다는 공지와 함께, 세 명의 가이드들이 빠르게 서로 얘기를 나누더니 먼저 와있던 사람들부터 이름을 묻고 명단과 대조한 후 체크를 했다. 어느 정도 인원이 되면 1팀을 마감하고 그 뒤부터는 2팀, 더 늦게 오는 사람들은 자연히 3팀에 배정되는 시스템이었다. 우리는 거의 맨 처음에 왔으니 당연히 1팀. 코트에 가까운 길이의 가죽재킷을 입은 활달한 가이드가 배정되었다. 

자! 이제 들어갈 차례였다. 지하철 역 입구에서 콜로세움 쪽으로 난 작은 내리막길을 내려가서 매표소 방향으로 이동하다보니 바티칸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긴 대기줄이 나타났다. 당연히 어제처럼 지나쳐서 바로 입장하겠거니 생각하는 순간 가이드는 그 줄의 끝에 붙듯이 이어서 섰다. 

아? 아!!! 그제야 생각이 났다. 오늘 우리가 예매한 것은 줄을 서야하는 무료투어였다. 예매할 때 날짜가 맞아서 무심코 했는데 어쩐지 티켓 가격이 나와있지 않았었다. 어플을 켜고 다시 한 번 예매내역을 확인했다. [매달 첫째주 일요일] 콜로세움 무료 입장!!! 이것이 제목이었다. 한달에 한 번 있는 무료개방의 날에 진행하는 가이드 투어라 티켓은 무료지만 대신 줄을 서야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가이드가 그래도 우리가 선 줄은 맨 앞쪽이라고 했다. 입장 시작 시간이 1시간은 남아서 기다리는 것일 뿐 거의 바로 입장할 거라는 말도 함께. 

기다리는 시간은 의외로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바빴다. 먼저 수신기를 하나씩 받고 1인당 대여료 3유로 씩을 냈다. 그러고는 가이드가 준비해 온 자료를 보면서 미리 콜로세움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을 들었고, 그 후에는 입장 줄 뒤로 보이는 사진 스팟까지 한팀씩 교대로 달려가서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찍고 다시 달려와서 다음 팀과 교대했다. 열정 넘치는 친절한 가이드가 우리의 스마트폰을 받아서 한장 한장 신속하고 정확하게 찍어주었다. 그러다 보니 입장시간까지 순삭이었다. 뛴 덕분에 땀이 나서 쌀쌀함도 자취를 감춰버렸고, 하늘은 아까보다 구름을 밀어내고 더 파랗고 환해진 얼굴을 자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당당히 콜로세움 안으로 입성했다. 


막시무스가 된 듯 오버하게 되는 콜로세움 내부

2층으로 올라가면 내부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지하층이 인상적이었다. 원래 바닥이 있어야 할 자리가 개방되어서 지하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 그 곳이 동물이나 검투사들이 대기하던 장소라 했다. 중년생은 영화 글래디에이터가 생각났다. 막시무스가 대기하던 바로 그 장소. 재미있게 봤던 영화의 실제 현장에 와 있다니 어린아이처럼 흥분됐다. 아직 영화를 못봤다는 사회와 함께 한국에 돌아가면 같이 보기로 약속하고 관람을 계속했다. 그 유명한 네로 황제의 인공호수 자리에 세웠다는 콜로세움.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몇 달 동안이나 매일 검투 경기를 계속했다는 이야기도 왕부터 천민까지 관람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책에서 보기만 했었는데 지금 그 안에 직접 들어와 서있다니 웃음이 났다. 순간, 진짜 로마에 온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자유시간이 충분해서 구석구석 걸어보다가 사진도 찍다가 바람을 느끼며 한참을 서 있어 보기도 했다. 처음엔 신나고 흥분됐는데 가만히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이렇게 멋진 곳이 옛날엔 피 흘리며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경기장이었다는 사실이 왠지 씁쓸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천천히 일행과 다시 모여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포로 로마노(Foro Romano)로 향할 차례였다. 

입구의 티투스 개선문(Arco di Tito)의 아름다운 자태를 감상하고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얼마간 올라가니 잘 다듬어진 정원 끝 팔라티노 언덕(Palatino)에 다다랐다. 신전, 광장, 공회당 등이 있는 옛 로마의 중심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하늘은 너무 파랗고 화창했다. 야외 투어 날인데 흐리거나 비가 온다는 얘기가 있어서 좀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이 때는 여행 초반이라 몰랐지만 돌이켜 보면 내내 날씨 요정이 우리를 따라다닌 것이 분명했다. 

팔라티노 언덕에서의 포로 로마노 조망 feat.날씨요정


언덕에서 내려와 천천히 가이드의 알찬 설명을 들으며 수 많은 황제들의 흔적을 지나 마지막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신전터와 화장터에 다다랐을 땐 경이롭기까지 했다. 10년만 지나면 내가 가던 가게는 커녕, 골목 자체까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급변하는 우리나라에서 살다가 1~2천년 전에도 있던 도시 위에 서 있어보니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평소 ‘타임머신을 탄 것 같다.’는 표현을 진부하다 여겨왔는데 이 때는 정확하게 이 단어 외에는 쓸 말이 없었다.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를 처음 갈 계획을 가진 분들이 있다면 꼭 가이드 투어 하시길 권해드린다. 지식 없이 보면 한낱 부서진 돌 덩어리로 스쳐지나가기 십상일테니까.


카이사르의 마지막이 깃들어 있는 곳 앞에서 가이드가 사진촬영을 일행 별로 한 번 더 해주었고, 그것을 끝으로 정오가 되기 직전에 투어는 끝이 났다. 

역시 투어 중에는 집중해서 몰랐었는데 끝이라고 하자마자 피로와 배고픔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바로 숙소로 가서 잘 수 없었다. 먹은 게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어제 아침에 갔던 커피바조차 아침 7시에 오픈하는 관계로 못간 상태였다. 그 때 가이드의 천사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투어는 여기서 끝이 났구요. 근데 점심 시간이라 제가 레스토랑에서 선배랑 만나기로 했는데, 따로 식사 장소 못 정하신 분들은 저랑 같이 가셔도 됩니다.” 몇 팀이 호응하며 따라나섰고, 그 안엔 우리 둘도 함께였다. 그제 밤에 도착해서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저녁 만찬은 커녕, 단 한끼도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콜로세움에서 멀지 않은 골목에 깔끔해 보이는 레스토랑이 나타났다. 가이드와 몇몇은 안쪽 자리에 앉았고, 우리는 뭔가 밖에 앉고 싶어서 테라스 자리를 택했다. 잠시 뒤 친절한 미소를 장착한 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메뉴를 건넸다. 이미 카톡으로 가이드가 몇가지 괜찮은 메뉴를 알려주었는데도 살짝 떨렸다. 이탈리아에 와서 첫 식당이니 메뉴판 보고 주문하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잠시 후 직원이 다가왔다. 먼저 물 한 병과 중년생은 화이트 와인 1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예쁜 초록색 병에 든 물과(AQUA PANNA라고 적힌) 화이트 와인(pinot grigio 품종) 1잔이 나왔다. 우리 뒤 테이블에 앉은 일행은 물이 무료냐고 물어본 후, 직원이 아니라고 하자 물은 주문하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선 물도 사서 마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목도 많이 말라 물은 꼭 마셔야 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탈리아에서 물을 주문하면 반드시 일반물(나뚜랄레)인지 탄산수(프리잔떼)인지를 묻는다. 기억해두면 편리하다. 

디자인도 꼭 마음에 들었던 우리의 생명수


해가 쨍쨍해져서 땀이 난 상태였는데 차갑게 칠링된 화이트 와인 한모금을 마시자 소리를 지를만큼 상큼하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식사를 주문할 차례였다. 눈을 맞추자 웃으며 다가와 준비됐냐고 묻는 직원. 너무 배고픈 상태였고 읽기 어려운 메뉴판을 일일이 보고 고를 자신감도 없었던 우리는 좀 전에 가이드가 추천해준 메뉴가 적힌 카톡 메시지 화면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렇게 주문한 Pizza diavolo(매운 햄 올라간 피자), Carbonara(까르보나라), Suppli(밥 튀김), Fiori di zucca(호박꽃 튀김)이 차례로 나오자 처음엔 안 마시겠다던 사회도 홀린 듯 화이트 와인 한 잔을 주문했다. 음식은 너무 너무 맛있었다. 어제 바티칸 앞에서 만난 첫 샌드위치와 젤라또처럼 비교대상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최고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잘 하는 집이었다. 튀김류는 부드럽고 무겁지 않았고, 까르보나라는 정말 듣기만 했던 현지식이었고(크림이 아닌 달걀 노른자 베이스의 정통식), 피자도 괜찮았다. 기분이 점점 좋아져서 후식으로 티라미수 하나와 에스프레소 두잔까지 주문했다. 역시 맛있어서 만족감이 하늘을 찔렀다.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생각해봐도 이 집의 티라미수와 에스프레소는 손에 꼽을 정도로 입맛에 맞았다. 역시 여행은 먹는 게 반이라고 했던가? 피곤이 삭제된 느낌이었다. 천천히 즐기다 보니 같이 투어를 했던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리를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2시 좀 못 되어 계산하고 나가려는데 마침 안에서 오늘 우리를 담당했던 가이드가 나왔다. 방향이 같아서 잠시 갈림길까지 동행했다. 이미 12시에 투어는 종료했고 피곤할텐데도 헤어지는 마지막까지 정보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하는 모습에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콜로세움 앞 지하철 역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번엔 지하철 역을 바라보고 왼쪽 편으로 난 길을 걷기로 했다. 포로 로마노를 옆으로 내려다보며 콜로세움부터 조국의 제단까지 이어지는 넓고 낭만적인,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로마 최고의 산책길(Via dei Fori Imperiali)을 천천히 거닐었다. 

길 끝에선 십자가를 지고 걷는 예수님의 행렬을 재현한 퍼포먼스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뒤로는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념관과 그 앞으로 펼쳐진 베네치아 광장의 웅장한 모습이 이어졌다. 새하얀 색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이 기념관은 건립 당시 주변의 역사적인 건물들과 조화롭지 않아 쓸데 없이 하얗게 튄다는 의미로 ‘웨딩 케이크’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들었던 적이 있는데, 막상 실물을 보니 순수하게 너무 멋진 건축물이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순수한 중년생(?)이 좋아하는 순수한 웨딩케이크의 옆 자태


우리는 좀 더 힘을 내서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트레비 분수가 나오고, 거기서 또 좀 더 걸어가면 스페인 광장과 계단이 나올테니까. 

중간중간 지도를 확인하면서 20분 쯤 걸었을까? 좁은 골목길 끝으로 갈수록 안그래도 많던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비집고 나가니 역시나 트레비 분수(Fontana di Trevi)였다. 실물로 처음 보는데도 매체에서 너무 많이 접해서인지 친숙했다. 분수를 이탈리아어로 ‘폰타나’라고 하고, 분수의 이름이 ‘트레비’ 라는 것을 직접 와보고 알게 되니, 한국에선 각각 떨어져서 브랜드 이름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라서 재미있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는데 순간 놀랐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연인들의 성지이자 동전 던지기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규모가 이정도로 클지는 몰랐으니까. 찾아보니 로마에 있는 바로크 양식의 분수 중 가장 크다고 한다. 

들은 바로는 오른손에 동전을 들고 뒤돌아서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진다고 하는데, 1개를 던지면 다시 로마에 돌아오게 되고 2개를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로마에 오게 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한다. 여담으로 하루에 트레비 분수에 던져지는 동전의 금액이 3,000유로 정도라고 하니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와 중년생은 동전을 던지지 않았다. 둘 다 2유로면 이 더위에 물을 사서 마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T인가? 누군가 감정이 메말랐다고 해도 하는 수 없다. 우리는 분수 앞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로마의 오후 태양은 너무 뜨거웠고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만큼 사람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리고 한가지 더. 트레비 분수 앞은 언제나 소매치기가 극성이라는 이야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 가면 사람들이 없어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고 한 가이드의 얘기가 떠올라서 오늘은 잠시 들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사회와 중년생은 분수를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난 길로 올라가서 스페인 계단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다시 몰려오기 시작한 피로와 더위로 인해 남은 체력이 그리 많지 않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계단에 도착할 때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역시나 명소 답게 사람들로 붐볐다. 힘들어서 잠시라도 계단에 앉고 싶었지만 그늘이 없기도 했고, 맨 아랫부분 말고는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앉지 못하게 해서 포기했다. 우리는 계단 밑에서 얼린 생수를 한 병 샀다. 앉지 못한다면 목이라도 축여야 했다. 한 병에 1유로. 트레비에서 동전을 던지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사진을 몇장 찍고 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텔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진을 찍을 힘도 대화를 나눌 힘도 없어서 검색한 최단 코스대로 걷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르막이 많았다. 햇살이 너무 뜨거워 웃음이 났다. 


그 타이밍에 길 건너 마트가 보였다. 이름도 생소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곳이었지만 일단 에어컨이라도 쐬며 잠깐 쉬기 위해 안으로 직진했다. 들어가 한바퀴 휘 둘러보며 더위를 식히는 사이 자연히 가격표에 눈이 갔다. ‘어? 전부 왜 이렇게 싸지?’ 처음엔 우리는 가격표를 잘 못 본 줄 알았다. 레스토랑은 그렇다 치더라도 물을 자판기나 소매점에서 사면 500밀리리터에 1유로 정도인데 여기서는 1.5리터에 0.45유로 였다. 음료수도 과일도 너무 낮은 가격이 찍혀 있었다.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다 검색을 해보기로 했다. 적혀 있는 가격이 맞았다. 외식 물가는 상당히 비싸지만 마트 물가는 엄청 저렴한 것이 이탈리아 물가의 팩트였다. 대부분의 서양 국가들에서 외식비는 비싸도 서민들의 식생활을 위한 마트 물가는 저렴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사실이었다. 어디를 가나 비싼 우리나라에 비해 숨 쉴 곳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부러웠다. 가격이 이렇다면 아무리 피곤해도 안사는 것은 실례였다. 둘은 그 자리에서 회의를 했다. 점심은 제대로 먹었고 어차피 피곤해서 저녁 먹을 식당을 찾기는 무리라는 판단에 간단히 장을 봐서 해결하기로 했다. 귤, 방울토마토 같은 과일과 간단한 샌드위치를 담고 맥주도 한 병 담았다. 내가 좋아하는 산 펠레그리노 탄산음료도 눈에 들어왔다. 역시 말도 안되는 가격. 본능적으로 함께 담았다. 이것 저것 많이 담고 계산대에 섰다. 한국에선 4만원은 족히 나올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합해서 10유로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심지어 우리가 산 1.5리터 생수는 1+1이었다. 행복은 가까이 있었다. 힘들고 짐은 무거웠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빠르게 몸을 씻고 과일도 씻고,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고 맥주 병을 땄다. 큰 병이라 나누어 마시려고 한 병만 사온 파울라너. 꿀꺽꿀꺽. 꿀맛이었다. 창 밖에서 뭔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주인공은 꽤 세찬 비바람이었다. 날씨 요정이 분명히 우리에게 깃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내일 일정까지 간단히 점검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근한 이불 안으로 빨려들 듯 들어갔다. 동시에 눈이 감겼다. 의식의 볼륨이 점점 작아져갔다. 덩그러니 방치해두고 떠나 온 한국의 일상도 없었던 일인 듯 점점 아득해져갔다. 다음에는 익숙한 맥주 말고 이탈리아 맥주를 마셔봐야겠다는 것이 의식을 부여잡고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이었던 것 같다. 툭툭- 창 밖을 때리는 빗소리는 백색 소음이 되어 우리에게 훌륭한 자장가가 되어주었다. 시원하고 편안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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