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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Apr 18. 2024

Introma : 0일차

3월 31일 금요일

이천 이십 삼년 사월.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30일 남짓 사라져 있었다.

소멸되지 않는 한 어딘가에서 사라지면 반드시 다른 어딘가에는 기록된다.

여행의 기록. 정확히는 여행 속 우리의 흔적.

우리의 이 한 달은 오롯이 이탈리아에 새겨져 있다.

.

정신 없다는 말로는 부족한, 소설로 써도 한 권은 족히 나올, 지난 넉달이었지만 서론이 긴 글은 재미 없으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무언가 완벽한 단절이 필요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만 산채로 정신은 건어물 보다 바짝 마르다가 결국에는 정말로 소멸할 것만 같았다. 손톱 만큼 남아버린 정신의 불씨에 비행기 바람정도는 불어넣어야 살릴 수 있을 거라는 두 사람의 의견 일치를 시작으로 먼저 적금과 투자금, 모아둔 회사 인센티브는 물론, 들어올 월급의 생활비 부분까지 예측해서 빚 안지고 가능한 모든 자금을 끌어모았다. 그 다음은 시간을 끌어모을 차례였다. 쉽지 않았다. 얼핏 생각했을 땐 돈보다는 시간을 제 마음대로 하기 쉬울 것 같았지만 그게 그렇지만은 않았다. 요즘 직장은 성과주의라지만 실상은 기본적으로 제 시간을 담보로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구조이기에 내 시간이 내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기적적으로 한 달 남짓이라는 자유시간을 동일하게 맞출 수 있었다. 그러고는 티켓팅.


-2023년 3월 31일 금요일-

이제 막 이륙 안내방송 중인 로마/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행 비행기 복도쪽 좌석에 두 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탈리아는 커녕 유럽 대륙 자체에 제대로 가본 적 없는 우리가 정한 여행 기간은 한 달. 그것도 오직 이탈리아에만 있을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이왕 유럽 가는 거 이나라 저나라 둘러보자 했었지만 매형의 한 마디가 컷다. ‘유럽 역사의 중심은 이탈리아지!’ 그래서 찾아보니 이탈리아는 세계문화유산 최다 보유국이었고, 우리 두 사람이 아는 대부분의 유럽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름은 너무 너무 너무 익숙한 나라지만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이탈리아가 궁금해졌다. 더구나 원래 목적대로 급하지 않게 쉬면서 다니려면 한 나라만 봐도 한 달이란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좌석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약간의 떨림과 함께 창 밖으로 펼쳐진 활주로 풍경이 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을 천천히 구르던 비행기 바퀴가 이륙을 위해 속도를 올리자 엉덩이를 통해 전해지던 땅울림도 점점 커져갔다. 자연스레 등은 등받이에, 양 팔은 팔걸이에 고정되고 온몸에는 힘이 들어갔다. 몇 초였는지 몇십 초 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격렬했던 진동이 어느 순간 완벽하게 사라짐과 동시에 기체가 뒤로 눕듯이 기울어졌다. 우리가 갇혀 있던 지난 넉달을 뒤로하고 비행기가 힘차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붕 뜬 기분이었다. 기분만이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진짜 부웅-하고 날아올라 일상 밖으로 첫 발을 뗀 순간이었다.

어느 정도 고도가 상승하자 슬그머니 수평으로 몸이 돌아왔고 천정의 안전벨트 표시등이 꺼졌다. 그리곤 분주한 승무원들. 얼마 지나지 않아 앞 줄에서부터 기내식 배급이 시작되었다. 설렜다. 최근 3년은 팬데믹 때문에 꿈도 꾸지 못했고, 그 전에도 해외여행을 자주 간 편은 아닌데 몸이 반사적으로 들떴다. 바로 어제까지 너무 정신없는 상태로 지내다 떠난 여행이라 전혀 실감나지 않았는데 기내식 하나로 잠자던 여행세포가 깨어난 느낌이었다. 거기다 생전 처음으로 한달이란 기간에 생전 처음 가는 이탈리아라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세가지 메뉴 중에서 우리는 소고기가 들어간 양식 메뉴를 골랐고 음료가 필요하냐는 승무원의 물음에 스스럼 없이 외쳤다. “레드 와인, 가득이요!”

음식은 너무 맛있었고 와인은 빨리 비워졌다. 때마침 “와인 더 필요하신 분?” 하며 돌아다니던 친절한 승무원을 핑계삼아 자연스레 한 잔을 더 마셨다. 우리처럼 여기저기 와인 리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곤 급격히 찾아오는 졸음. 앉은 자세로 곧 잠이 들었다. 시끄럽던 기내는 점차 조용해져갔다.

저 때는 마냥 신났었지만 이제와 보면 와인이 하나의 예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많은 사람들이 열 몇시간 동안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사실상 좁은 사육장 같은 환경에서 생기기 마련인 불평이나 돌발행동을 몇 시간이나마 줄일 수 있는 강제적이지 않은 가장 매력적이고 배려 넘치는 예방법.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나온 두번째 기내식에선 전혀 와인을 권하지 않았다는 점도 예방법 론에 힘을 살짝 실어준다. 어디까지나 순전히 우리만의 추측이지만.

비행기는 로마시간 3월 31일 저녁 7시 30분경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같은날 낮 1시 20분경에 출발해서 열 몇 시간을 날아왔지만 7시간이라는 시차덕분에 이득을 본 기분이었다. 물론 돌아갈때 고스란히 반납해야 하는 이득이지만.

수하물을 찾아 입국 심사 후 밖으로 나온 뒤에는 Train이라고 쓴 표지판만 따라 갔다. 버스도 있지만 Leonardo Express*라는 고속 열차를 타면 공항에서 로마 교통의 중심인 테르미니(Termini)역으로 30여 분이면 확실하게 도착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에 28유로(1인 14EUR)라는 적지 않은 금액이 들긴 하지만 처음 만나는 로마의 밤에 자칫하다 헤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최단 시간에 호텔 체크인까지는 하고 나야 비로소 한 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기 전 여행책자에서 소매치기 조심하라는 글을 너무 정독해서였을까 아니면 너무 날이 어두워져서였을까. 테르미니역에서 호텔까지 걸어가는 7분 동안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소매치기 같아서 극도로 경계하며 크로스백과 캐리어를 있는 힘껏 잡았다. 작은 돌을 하나하나 박아서 만든 멋진 로마의 길도 캐리어가 자꾸 걸리는 바람에 이 때는 참 싫고 불편했다. 늦긴 했지만 그 때 의심했던 모든 분들께 이제라도 심심한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드디어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체크인을 하기 위해 여권을 제시하자 잠시 확인 후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뭔가 말하려는 직원분. 뭔가 쌔하다. 우리는 동시에 얼굴을 마주봤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수도 문제로 지금 방을 쓸 수가 없단다. 그래서 골목 끝의 코너를 돌면 ooo이라는 호텔이 나오는데 거기에 얘기해둘테니 가면 방을 줄거라 했다. 똑같은 수준의 체인 호텔이라는 말과 함께.

불안하고 화도 났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첫날 화를 내봐야 낯선 땅에서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고 없다는 방이 갑자기 생길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인배 같아서 웃으며 "땡큐!"를 외치고 나왔다.(이제와 말이지만 사실은 짧은 외국어 실력에 딱히 항의할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길엔 아무도 없었다. 골목 끝에서 돌라는 코너 벽엔 그래피티가 가득했다. 무서웠지만 안 무서운척 당당하게 걸었다. 다행히호텔 직원의 말대로 체인 호텔이 나타났고, 더 다행히 체인 호텔의 로비 직원은 우리가 올 거라는 연락을 받은 듯 환대해줬으며, 덕분에 우리는 드디어 대망의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을 보니 밤 9시 30분 경. 낡은 호텔이었지만 우리의 이탈리아 첫 집이었다.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절로 감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바로 다음 미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듯이 말라가는 목을 시급히 축여야 했다. 냉장고엔 서비스 물 같은 건 없었다. 올라올 때 로비층에서 자판기를 본 것 같은 생각이 나서 간절한 마음으로 내려가봤다. 기적적으로 빨간색 자판기가 버튼에 빛을 내며 서 있었고 우리를 위해 생수를 팔고 있었다. 2유로짜리 동전을 넣고 2병을 샀다. 생수 한 병에 0.8유로. 땡그랑 땡그랑하고 떨어지는 거스름 돈 소리가 경쾌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동전을 집으려는데 이번엔 꼬륵 꼬르륵-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배에서 처량한 소리가 났다. 공항에서 바로 오느라 저녁을 먹지 못해 상당히 배고픈 상태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하지만 호텔 도착 후 긴장이 풀린 탓에 몹시 피곤하기도 했고, 인적 하나 없이 그래피티만 있는 낯선 로마의 더 낯선 골목길로 다시 나가기 두렵기도 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목마름만 해결하기로 했다. 방으로 돌아와서 벌컥벌컥. 밀물처럼 밀려오는 안도감. 그리고 더 큰 파도처럼 밀려오는 피로감. 빠르게 씻고 침대에 몸을 대자마자 미친듯 곯아떨어졌다. 깊고 깊은 잠의 바다가 두 사람을 완벽하게 삼켜버린 3월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공항 이름 약자를 FCO라고 해놓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이라니 이상했는데 알고보니 피우미치노(Fiumicino)의 약자였다. 이탈리아 라치오 주 피우미치노에 위치한 공항으로 로마 시내에서 약 35Km정도 떨어져있다.


*2023년 3월 31일 기준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FCO) -> 로마 테르미니(Termini) 기차역 1인 편도 14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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