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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회중년생 Aug 15. 2024

Firenze : 우리 방 넘버는 310

4월 17일 (17일차)

어젯밤 무척 피곤했던 사회와 중년생이었지만 결국 밤새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번쩍 거리는 CH05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소린고 하니, 방에 달린 벽걸이 에어컨의 에러코드가 밤새 깜빡거렸는데 그 코드 표시가 CH05였다는 소리다. 그거 좀 반짝거렸다고 무슨 잠까지 설치냐? 할 수도 있는데 사실, 방에 불이 켜져 있을 때는 밝아서 에러코드가 깜빡이는 줄도 몰랐지만,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끄고 커튼까지 치고 난 다음에는 그 작은 빛이 어마어마한 존재감으로 다가왔다. 스위치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암흑인 방 전체의 불을 껐다가 켰다가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느낌이랄까? 눈을 아무리 꽉 감아봐도 어둠의 저편에서 빛이 점멸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피렌체와도 이 호텔과도 첫날밤이어서 잠자리가 익숙지 않았던 터라 사회와 중년생은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채 거의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2023년 4월 17일 월요일)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조식 먹으러 내려가는 김에 호텔 프런트에 에어컨 이상 현상을 알려주기로 했다. 띵- 엘리베이터 로비 층의 문이 열렸다. 미소가 상쾌한 남성 직원이 우리를 향해 밝게 인사를 건넸다. “부온 조르노~” 사회와 중년생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간 밤의 사태에 대해 어떻게 말을 건넬까? 하고 중년생이 속으로 잠시 고민하던 그때였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상쾌한 미소의 직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친근하게 말을 건네는 사회.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곧바로 대화를 시작했다. 알고 보니 에어컨의 에러코드가 깜빡거리는 상황을 찍어 놓은 영상이었다. 게다가 유창하게 말을 하는 걸 보니 이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준비를 끝낸 모양이었다. 금세 대화를 마치고 중년생에게 다가오는 사회. “전체 에어컨 시스템이 문제가 있어서 계속 정비하느라 그런 거래. 오늘 밤 까지는 완료된다니까 걱정 말래. 이제 조식 먹으러 가자!” 이탈리아에 온 후로 식당에서나 호텔에서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항상 중년생이 해왔었는데 이렇게 거침없는 대처라니. 중년생의 눈에 이 순간 사회의 모습은 쿨하고 멋짐. 그 자체였다.

구성은 간단하지만 기본기가 단단했던 맛난 조식(좌), 식 후 입가심 에스프레소의 스타일리시한 자태(우)

조식은 1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우측으로 나 있는 작은 복도로 쭉 들어가면 만날 수 있었다. 복도 안쪽에 간단한 뷔페식이 차려져 있고 그 끝에서 다시 우측으로 계단 몇 개만 올라가면 테이블들이 놓인 식당이 나왔다. 우리가 두리번거리며 들어서자 나이가 좀 있으신, 그리고 뭔가 기품 있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수첩을 하나 들고 다가오셨다. 몇 호냐고 물어보시는 아주머니. 조식 담당 매니저인 것 같았다. “쓰리. 원. 제로.” 또박또박 영어로 우리 방의 번호를 말했지만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약간 헷갈리시는 듯 고개를 갸우뚱해서 중년생이 큼지막하게 310이라고 쓰여 있는 방 열쇠를 꺼내어 보여드렸다. 그제야 만족한 듯 수첩에 체크를 하고는 활짝 웃으며 우리를 환영해 주셨다. 있다가 이탈리아어로 310호를 어떻게 말하는지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두 사람은 조식을 각자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조식은 몇 종류의 햄과 치즈, 꼬르네또, 삶은 달걀, 요거트, 과일 주스와 커피 등으로 단출했지만 필요한 건 다 있는 알찬 구성이었다. 이제는 이탈리아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꼬르네또와 카푸치노만 있어도 아침은 충분하게 느껴졌다. 두 사람 모두 햄, 치즈, 삶은 달걀 1개, 꼬르네또 1개, 요거트 약간, 카푸치노, 레드오렌지 주스를 가져왔는데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꼬르네또가 플레인이냐 초코냐와, 요거트에 꿀을 넣느냐 콘 후레이크를 넣느냐 정도였을 뿐, 그 외에는 마지막 입가심으로 에스프레소 1잔 씩을 마시는 것까지 똑같았다. 조식은 간밤의 피로를 싹 잊게 할 만큼 만족스러웠다. 가짓수가 많은 것보다 질을 중요시하는 두 사람이기에 꼬르네또와 커피가 훌륭한 조식은 더할 나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새파란 테이블 보 위에 놓인 새파란 접시와 에스프레소 잔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매니저 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는 외출 준비를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따로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어제 피렌체에 도착하자마자 투어를 하나 했기 때문에 설렁설렁 보낼 생각이었다. 내일 오전에 있을 우피치 미술관 투어를 위해 어느 정도 체력을 보충해 놓아야 하기도 했다. 우선 어제 가보지 않았던 피렌체 중앙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 양편으로 쭉 늘어서 있는 가죽시장엔 각종 가방과 지갑이 가득했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피렌체의 가죽이 유명하다는 말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궁금했지만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구경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조금 더 걷자 수많은 가죽 상점 사이로 드디어 중앙 시장 건물이 나타났다. 시장은 1층과 2~3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은 정육, 과일, 야채, 식료품 등을 팔고 있는 정말 시장의 모습이었고, 2층과 3층은 벽 쪽으로 빙 둘러가며 다양한 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고 중앙에는 테이블이 가득한 우리가 아는 그 푸드코트였다. 오전 10시가 채 안된 시간인데도 관광객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음식에 눈이 가긴 했지만 두 사람의 배에는 아직 조식의 흔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있다가 오후에 출출할 때 다시 들러 먹어보기로 하고는 건물을 나섰다.

좌측부터 피렌체 중앙시장의 채소가게와 정육점, 오전부터 붐비는 2-3층의 푸드코트의 모습

날씨는 종잡을 수 없었다. 나올 때는 구름이 많고 추워서 비가 올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쨍쨍 나고 땀이 났다. 수제 시계를 파는 작은 상점을 지나 피렌체의 작은 골목골목을 따로 의식하지 않고 흐름대로 걸었는데도 어제 갔었던 레푸블리카 광장과 시뇨리아 광장이 차례로 나타났다. 그 옛날 르네상스 시대에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광장의 바닥을 두 발로 힘주어 딛고 서 있으니,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피렌체 중심부의 건물들이 대부분 그 시대부터 유지 보수를 통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져 온 것들이기에 더욱 실감 날 수밖에 없었다.

감상에 젖은 두 사람을 깨운 건 어두운 구름의 그림자와 차갑게 스치는 바람이었다. “어휴, 아직 좀 춥네.” “어디 들어갈까? 다리도 아픈데.” 사회와 중년생은 어디를 들어갈까 고민하다 카페 질리로 결정했다. 어제 가긴 했지만 워낙 커피 맛도 좋았고, 어제는 실외 테라스에 앉았어서, 얼핏 봐도 고풍스러운 실내 자리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11시가 조금 넘은 카페는 한산한 편이었다. 우리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메뉴를 골랐다. 카페 도피오와 샤케라토, 그리고 간단한 디저트를 주문했고(총 20유로) 금방 나왔다. “이게 뭐야?” 사회는 처음 보는 디저트를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고 중년생은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실, 디저트 메뉴는 낯선 이름들 뿐이어서 대충 적당한 가격으로 생각되는 것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주문했던 중년생이었다. 찾아보니 칸놀로(cannolo)라는 시칠리아 지방의 디저트였는데 튜브 모양으로 둥글게 빚은 빵을 튀겨 그 사이에 크림이나 치즈를 넣어 먹는 것을 말했다. 우리의 칸놀로는 조금 두꺼운 손가락 하나 크기였고 빨간색 체리도 하나 박혀 있었다. 달달하고 바삭해서 커피와 간단히 먹기에 참 잘 어울렸다.

마음에 들었던 테이블과 메뉴판, 그리고 커피와 잘 어울렸던 우리의 칸놀로 (feat. 중년생 손가락)

커피 종류마다 다른 커피잔과 접시와 물컵, 포크, 냅킨 하나까지 고풍스러운 카페 내부와 어우러져 가뜩이나 맛있는 커피를 더 빛나게 만들고 있었다. 돌로 만든 연한 커피색 둥근 테이블과 짙을 갈색 나무 의자는 잘 어울렸고 높은 천장에서 내려오는 샹들리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한국에 있을 때 봤던 샹들리에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촌스럽고 너무 과하며 ‘옛날’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이곳에서 만난 샹들리에는 정확히 ‘제자리에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이런 건물과 이런 벽과 이런 바닥과 이런 테이블에는 무조건 샹들리에가 있어야 한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진짜’를 보고 감명받은 사람들이 단지 ‘샹들리에’만 가져다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달아놓은 것만 봤으니 어색하고 과하며 촌스럽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와 중년생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현재의 공존을 느꼈던 이유는 벽 곳곳에 달린 CCTV 때문) 카페 질리의 분위기에 동화된 채 한동한 여유롭고 기분 좋은 휴식을 취했다.

과거와 현재(CCTV)가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카페 질리의 한적한 내부 (feat. 초상권으로 얼굴 가린 잘생긴 직원)

문득 중년생이 생각난 듯 말을 던졌다. “우리 세탁소 한 번 가야 하지 않아?” “맞다!!! 오늘 안 하면 큰일 나!!!” 이미 체력 충전 완료된 둘은 바로 계산을 마치고 빨랫감을 챙기기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로비에 도착하자 맡겨둔 키를 받기 위해 중년생이 프런트 직원에게 말을 건넸다. “뜨레 첸또 디에치!(Tre Cento Dieci)” 뜻밖에도 영어가 아닌 이탈리아어였다. 상냥한 직원은 알아들었는지 중년생의 어설픈 이탈리아어에 웃으며 우리의 방인 310호 열쇠를 정확히 건네주었다. “와! 알아듣네! 언제 연습한 거야?” 흥분해서 묻는 사회의 반응을 즐기는 중년생. 먼저 엘리베이터에 타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질리에서 연습했지! 하하~ 한 번에 알아듣는구만!” 문장도 아니고 고작 ‘삼백 십’이라고만 말했을 뿐인데 그걸 가지고 이렇게 흥분할 일인가 싶겠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볼로냐까지는 호텔 열쇠를 프런트에 맡기지 않고 직접 가지고 다녔었기에 “부온 조르노”를 빼면 사실상 직원들하고 말을 나눌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휴대하기 편한 카드키에 익숙한 우리는 피렌체에 와서도 무거운 열쇠고리가 달린 키를 꾸역꾸역 가지고 다닐 참이었는데, 나가는 길에 마침 다른 투숙객이 프런트에 맡기는 모습을 보고는 그때부터 우리도 맡기기 시작했었다. 무거운 열쇠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까 가벼워서 좋기도 했지만, 키를 맡기고 찾을 때 자연스레 대화를 하게 되니 직원들과 조금은 더 친밀해지는 기분이 들어 더 좋았다. 다만, 매번 영어로 호실을 말하면 꼭 한 두 번은 다시 말해야 알아듣는 것이 불편해서 이탈리아어로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던 것을 실행에 옮겼고, 매끄럽게 성공했기에 우리로서는 상당히 짜릿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고 어린아이 같다고 놀려도 전혀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어에 관한 한 우리는 어린아이 수준이 맞으니까.

세탁물을 챙겨 구글맵으로 검색해 둔 세탁소로 향했다. 위치는 오전에 들렀던 중앙시장 부근이었다. 내부는 손님 한 사람만 있을 뿐 한산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이탈리아 코인 세탁소의 기계 앞으로 사회가 성큼성큼 다가가서 능숙하게 조작을 시작했다. 그때, 우리가 능숙하게 하는 것을 유심히 보던 먼저 온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지금 건조 중인데 이미 다 마른 것 같고, 시간도 없어서 멈추고 싶은데 정지하는 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는 흔쾌히 알려주겠노라 하며 정지 버튼을 찾았다. 어? 그런데 이게 웬걸! 어디에도 정지 버튼은 없었다. 분명히 베네치아 메스트레에서 갔던 세탁소 기계에는 있었는데, 아무리 살펴보고 붙어 있는 설명서를 읽어 봐도 버튼은커녕 멈추는 법 자체가 없었다. 답답했던 그 손님이 손 짓으로 문을 그냥 열면 어떠냐고 했지만 어떻게 될지 몰라서 사회와 중년생이 일단 말렸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이 몇 분 더 흘렀고 그 손님은 정말 가야 할 시간이라고 시계를 가리키며 우리를 애원하듯 쳐다봤다. “진짜 그냥 열면 되는 거 아냐?” 사회가 말했고 중년생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결국 우리는 그 손님과 상의한 끝에 하나 둘 셋 하면 건조기 문을 열기로 했다. 자칫 빨래가 튀어나올 수 있으니 두 사람이 입구 쪽에 바구니를 가져다 대고 한 사람이 문을 연다는 작전 아닌 작전까지 세웠다. “자, 우노~ 두에~ 뜨레!” 벌컥- 야심 차게 문을 열어젖히자 건조기의 회전이 줄어들더니 기계가 멈춰 섰고, 돌아가던 빨래들은 힘 없이 원통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뿐한 정지. 다행히 세탁물이 튀어나오거나 하는 참사는 없었다.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뿜어낸 세 사람은 무사한 결말에 서로 얼굴을 보며 활짝 웃었다. “그라치에, 밀레!” 사회와 중년생을 향해 감사의 말을 남기고 떠난 이름 모를 손님.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해결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감사하다니 고맙게 받을 따름이었다. 잠깐 동안의 해프닝이 지나가자 마침 유리 벽 넘어 밖으로 밝은 햇살이 골목을 비추기 시작했다.

‘다음번엔 읽을 책을 가져와도 좋겠다.’ 문득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치자, 중년생은 로마 테르미니 역에 내려서 주변 모든 것을 날카롭게 경계하던 처음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정말 너무나도 여유로워졌으니까. 오늘만 해도 현지인에게 도움(?)을 줄 정도까지 성장한 두 사람이었다. 세탁을 마치고 시계를 보니 오후 4시가 코앞이었다. 이미 두 사람 모두 허기를 느끼고 있었기에 논의가 필요했다. 논제는 세탁을 마친 옷더미를 들고 바로 옆 중앙시장에서 뭔가 먹고 호텔로 가느냐, 아니면 세탁물이 무거우니 우선 호텔에 가서 두고 나와 편하게 식사를 하느냐였다. 평소라면 짐 들고 다니기를 질색하는 중년생의 성향상 일단 호텔로 돌아갔겠지만 그러기에는 배가 상당히 고팠으므로 잠깐의 고민 후, 중앙시장 행을 택했다. 오전에 들렀을 때 2층 푸드코트에 테이블이 넉넉했던 기억이 난 것도 선택의 이유 중 하나였다. 테이블이 넉넉하면 당연히 그만큼 짐을 놓을 자리도 많을 테니까.

음식 주문의 떨리는 순간(가운데), 평범했지만 충분히 맛있게 우리의 배를 채워준 그날 그때의 메뉴들(좌/우)

우리가 도착한 4시 20분 경의 푸드코트는 사람들로 제법 붐볐지만 역시 워낙 넓어서 자리 잡기는 수월했다. 둘 다 배가 상당히 고팠기에 빠르게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메뉴를 바로 정했다. 우리의 선택은 중식라면(삶은 달걀 한 개와 고기가 가득 올려진)과 찐만두 한 판(6개), 그리고 깔라마리&쉬림프 튀김 한 접시였다. 모두 합쳐 33유로. 주문 방법은 예전 우리나라의 푸드코드와 별 반 다르지 않아 편리했다. 원하는 음식을 파는 가게에 가서 주문하고 계산하고, 음식이 나오면 받아서 아무 데나 원하는 자리에서 식사를 하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음식점 연합의 자리 공유 시스템인 것이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군지 영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푸드코트가 그렇듯, 음식 맛은 최고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다양한 음식을 한 자리에서 즐기니 풍요로운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매우 배고픈 상태에서의 식사여서인지 그때 우리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았다. 충분히 여유롭게 먹고 쉬고, 이탈리아에는 드문 무료 화장실(푸드코트로 사람을 모으는 꽤 큰 역할을 하는 듯)까지 이용하고 나니 배는 든든하고 몸과 맘은 너그러워진 완충 상태가 되었다. 그래선지 분명, 식사 전과 같은 무게의 세탁물 가방일 텐데도 호텔로 돌아가는 길엔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뜨레 첸또 디에치!” 아까보다 자신감 있게 외치는 중년생이었다. 직원의 미소가 더해진 310호 키를 건네받고 방으로 올라가 세탁물 정리와 잠깐의 자가정비 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다시 피렌체 골목으로 나섰다. 어젯밤 가이드 투어했던 길을 기본으로 복습하듯 천천히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단테의 생가를 지나 골목을 누비는데 지난밤과는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어제는 안내자가 있어서 졸졸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느라 보지 못했던 아기자기한 상점과 건물들이 눈에 들어와서인지 색달랐다. 모르는 언어로 적혀있는 간판들의 뜻을 유추해 가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다. 시선과 발길이 닿는 대로 구경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아르노 강변에 다다랐다.

아르노 강의 우아한 모습(을 보며 우아~ 소리를 질렀던 사회와 중년생)

7시가 넘었는데도 다소 차분해지긴 했지만 해가 있어서 걷기 좋아 계속 걸었다. 강에는 드문드문 카약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푸른 하늘을 바탕색으로 두고 그 아래로 옅은 흰 구름과 두텁고 검은 구름, 약간의 노을, 건물들, 베키오 다리, 잔잔한 강물 사이사이로 작은 돌을 던진 듯 일렁이는 카약이 만든 물결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말은 과장으로 나온 말이 아님을 깨달았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 걷다가 미켈란젤로 언덕까지 올라가 볼까로 잠시 고민을 했지만 거기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너무 늦을 것 같아서 그냥 강변길을 따라 좀 더 걷기로 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어제 가이드가 추천해 준 와인상점이었다. “이 근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두리번거리던 사회가 소리쳤다. “여기다!” 시뇨르 비노(Signor Vino)라는 와인 체인점인데 다른 체인점처럼 점포가 많이 퍼져있는 곳이 아니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로마에 두 곳, 피렌체에 한 곳... 이런 식으로 점포 수가 적어서 오히려 신뢰가 갔다. 체인이지만 모든 곳이 본점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르노 강변에 바로 붙어있기 때문에 식사도 가능하고 와인포장 판매도 하는 것 같았다. 와인 고르기는 관광객인데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북부, 중부, 남부 지역별로 카테고리를 나눠 놓았고 그 안에서도 어느 지방의 어떤 품종인지를 보기 쉽게 정리해 놓은 덕분이었다. 우리는 고심 끝에 그중에서도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48.15유로)를 선택했다. 제대로 된 와인샵에서 구매한 우리의 첫 레드 와인이었고, 우리가 이탈리아에 와서 신용카드로 계산한 첫 번째 계산이었다. 그 시점부터 우리는 다시 다리를 건너 코나드(Conad) 마켓에 들러 저녁 겸 안주 장을 보고(19.45유로)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설레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 와인 맛이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잘 정리된 와인 상점의 모습(좌/이 때는 몰랐다 이렇게 와인에 빠질 줄), 숙소에서 세팅한 우리의 저녁(샐러드는 이미 좀 먹음)

“뜨레 첸또 디에치!!!!” 이제는 자동이었다. 우리는 나는 듯이 310호 방으로 들어와 빠르게 씻고 빠르게 세팅을 했다. 작은 테이블 위에 테이블 보 대신 시뇨르 비노에서 와인을 포장해 준 종이를 깔았다. 흰색 종이 위에 붉은색으로 와인통과 와인잔, SINORVINO 철자가 번갈아 빼곡히 인쇄된 포장지가 생각보다 멋스러워 테이블 보로 훌륭했다. 테이블의 크기가 작아 음식과 와인까지 올리기엔 부족해서 책상 의자 하나도 옆에 붙여 활용하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저녁 식탁이 완성되었다. 훌륭한 와인 한 병과 치즈, 프로슈토, 약간의 샐러드와 오렌지 주스를 곁들이니 완벽한 상차림이었다. 와인 잔까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코나드에서 사 온 플라스틱 컵으로 약간의 아쉬움을 달랬다. 역시나 코나드에서 사 온 튼튼해 보이는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를 빼냈다. 꼴꼴꼴~ 와인을 조금씩 서로의 컵에 주고받았다. 가볍게 서로의 컵을 부딪혔다. 입으로 가져가 조금 입술과 혀를 적신 두 사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쳐다보며 거의 동시에 외쳤다. “미쳤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정말 누가 마셔도 만족할 만큼 맛있는 와인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맛에 균형이 잡혀있었다. 술이라기보다 향기를 마시는 느낌을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아~ 이래서 와인을 마시는구나!” 사회가 중년생의 속마음과 똑같은 말을 밖으로 꺼냈다. 그다음부터는 물 흐르듯 쉴 새 없이 먹고 웃고 떠드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느새 와인이 바닥을 드러내고 깊은 밤은 더 깊은 밤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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