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극복하는 잔잔한 방법
머릿속을 가볍게 산책하고 싶을 때.
잔잔한 느낌의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생활. 불확실한 미래. 거기다 새해에 부자 되고 싶어서 읽은 '부의 추월차선'덕에 머릿속에 생각이 더 많아져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던 찰나 문득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 떠올랐다.
이 책은 고등학교 때 우연히 알게 된 책이다. 서점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이름이 맘에 들어 책장을 넘겼는데 왠지 있어 보이는(?) 오묘한 문체에 끌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이 돼서 그 책을 다시 보면 또 어떤 느낌일까 싶어 읽기로 했다.
일본 소설을 많이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특유의 먹먹함이 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일들이 벌어지기보단 사소한 일상 속 캐릭터의 마음의 소리를 잔잔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항상 사람들이 많이 죽는다.(왜일까) 여튼, 키친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 하나 있다.
왜 사람은 이렇듯 선택할 수 없는 것일까.
버러지처럼 짓뭉개져도, 밥을 지어먹고 잠든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간다.
그런데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유이치의 아빠였던 엄마 에리코. 아빠였던 그가 아내 사망 후 성전환 수술을 해서 엄마가 되어버렸다.(헛)
그가 남자였던 시절, 사랑했던 아내(유이치의 엄마)가 죽은 후 남긴 마음의 소리다. 고등학교 시절 싸이월드에 이 문구를 포스팅했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 퍽 반가웠다. 지금 읽어도 너무나 당연한 삶의 사실이, 그래서 어쩔 수 없음에 더 먹먹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책은 3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1. 키친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은 미카게. 할머니가 자주 가던 꽃집 알바생 유이치를 만나 그의 엄마(이자 아빠였던) 에리코와 셋이서 동거를 시작한다. 부엌을 좋아하는 미카게, 이 집 부엌은 느낌이 참 좋다.
2. 만월
에리코가 한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 후 혼자 떠나버린 유이치. 복잡한 마음속, 늦은 밤 택시를 타고 무작정 유이치를 찾아간 미카게. 둘은 사랑인 듯 아닌 듯 무언가 애틋함이 있다. 그 밤 그 둘을 연결해준 돈까스 덮밥.
3. 달빛 그림자
갑자기 떠난 연인 히토시. 히토시의 친동생인 히라기의 애인 유미코와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100년에 한 번 떠난 이를 만날 수 있다는 강. 우연히 강가에서 만난 신비한 영매 우라라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날 밤 강 건너에서 만난 히토시. 그가 손을 흔든다.
손을 흔들어줘서, 고마워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흔들어준 손, 고마워요.
키친과 만월은 이야기가 이어지고, 달빛 그림자는 별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달빛 그림자'를 읽으며 참 마음이 먹먹하고 슬펐다.
사랑하는 이를 갑자기 떠나보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우연히 다시 만난 죽은 히토시를 바라보며 고맙다고 말하는 사츠키의 마지막 메시지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초기 작품은 주로 '상처 깁기'를 표현하고 있다. 키친 또한 각각의 주인공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겪는 상처를 잔잔하지만 먹먹하게 꿰매나간다. 특별한 일 없이도, 충분히 가슴 찡한 바나나의 소설이 역시 참 좋다.
확실하게 존재하였던 가족이란 것이, 세월을 두고 한 명 두 명 줄어들어, 지금은 나 혼자라 생각하니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마지막 가족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카게의 마음의 소리, 키친
인생이란 정말 한 번은 절망해봐야 알아. 그래서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알지 못하면, 재미라는 걸 모르고 어른이 돼버려.
-에리코의 말, 키친
세계는 딱히 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일이 생길 확률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아내가 죽은 후 에리코의 마음의 소리, 만월
자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이 없으면 나는 그날 하루를 제대로 보낼 자신이 일지 않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죽은 애인 유이치를 감당하기 힘들어 자학하는 마카게의 마음의 소리, 달빛 그림자
극복과 성장은 개인의 혼의 기록이며, 희망과 가능성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말,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