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나이 16살, 아직 학교에도 다녀본 적이 없는 소년이 있다. 그 소년은 집에서 소설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고,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한 아이입니다.
학교를 다녀야 하고 친구와 게임을 하거나 놀러나가거나, 그러지 않고 애늙은이 처럼 할아버지와 어울리고 책을 좋아하는데, 그건 전부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고 부모님의 보호로 인한 결과였다. 하지만 마냥 주변 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은 게 아니었다.
아이는 남들보다 빨리 늙게 되는 선천적 조로증을 앓고 있다.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부모님의 걱정을 일부로 사지 않기 위해 얌전히 지낸다. 그러다 보니 얌전한 생활이 좋아졌다.
부모님이 소년을 가졌을 때의 나이 고작 17살. 아이돌을 좋아하고 아들의 선물 게임기를 가지고 싶어 하는 아빠, 화가 나면 욕부터 나오는 엄마. 그리고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16살 소년, 아름답고 씩씩하게 살아가라는 뜻에서 지어진 소년 '아름'이의 두근두근 일상. [두근두근 내 인생]의 이야기.
16살이지만, 얼굴은 할아버지 같은 소년 '아름'. 친구는 동네 할아버지뿐이고, 아직 학교도 가보지도 않은 어린 소년이 신체나이는 80세가 넘는다는 검진 결과를 받는다. 그런 원치 않는 삶이 '아름'을 얼마나 강제적으로 철을 들게 만들었는지, 3천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희귀병이 괜히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학교에 대해서 알고 싶고, 더 나아가서 그 나이에는 자신을 가진 부모님처럼, 연애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름은 그저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잘 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방에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 아이에게 꿈이 뭐냐고 하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할까?
"저는 부모님에게 만큼은 웃기는 자식이 되고 싶어요. 그저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는 것만으로 기쁨으로 되는 게 자식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어요."
어떤 16살의 소년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보기 힘들 아이다. 그만큼 세상이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잔혹함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빨리 철이 든다는 것은, 그만큼 고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아름'을 낳고 계속 병원 치료비로 인해 돈은 매일 부족했고, '아름'의 가족은 기존에 하던 일에 더불어 기부금을 받기 위해 방송 출연을 하기도 한다. 결과는 대성공, 조금은 셋이서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하지만, 세상의 관심은 그저 순수한 관심으로 끊이지 않고, 반가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리면서도 늙은 모습에 불쾌하는 사람은 물론, 더 나아가 불량 청소년에게 붙잡혀 놀림감이 되기도 한다.
"아 몰라 빨리 늙어 뒤지는 병 있대."
"야 어떻게 사람한테서 골룸이 태어나냐?"
그런 말을 들은 부모는 참을 수 있을까.
부모가 아닌 사람도, 정상인이라면 화가 나 욕이 나오고 말았을 것 같다.
이런 일을 계기로 아름이는 자신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보게 되고 자신 스스로를 수치스럽다고 생각해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늘 곁에서 지켜주는 건 부모님.
자신을 놀리는 불량 학생도, 기가 죽어 얼굴을 제대로 들어지지 않을 때에도, 늘 '아름'이 옆에는 부모님이 지탱해주고 있었다. 겉은 부모님보다 더 늙은 할아버지 같아도, 부모님의 그늘이 너무나도 필요한 '아름'.
'아름'은 병세가 악화되고 있고,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안 그래도 집 안에서 혹은 집 주변에서 맴돌아 다닐 수밖에 없는데, 이번에는 병원이라니, 덩치에 맞춰 들어간 병실은 어린이들 투성이고, 그렇다고 노인분들과 함께 병실을 쓰니 교회 사람들이 축복을 주겠다고 하는데, 병원 입원까지 이렇게 탈이 많아서야.
그런 일상에 도착한 이메일 하나. 그 이메일은 방송을 통해 연락처를 알았다는 한 소녀였다. 자신 또한 비슷한 병을 앓고 있다면서. 자신 생에서 처음 시작된 또래 여성과의 교류. 과거의 비슷한 나이에는 부모님이 사랑을 하였는데, '아름'또한 연애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 상대는 자신을 '서하'라고 밝히며 다가온다.
누구든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
관심이 가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언제 돌아올지. 어떤 내용을 보내올지 기대하고 기다리게 만든다. '아름'은 그 감정을 처음 느껴보고,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서하의 존재로 방송 출연을 잘했다고 느낍니다. 드디어 '아름'에게도 첫 연애 감정을 느끼는 게, 마냥 보는 이가 흐뭇해진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악화가 진행되고 있는 '아름'의 모습에 책도 TV도 보지 못하게 하고, 명상을 하라는 둥, 많은 제재를 받게 되지만, '아름'은 그 외의 자신에 대한 불합리를 '서하'에 대한 감정으로 대응한다.
'서하'와의 편지 대화로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자신이 건강했다면, 서하가 건강했다면 어떤 만남을 가졌을지, 상상하면서.
하지만 그런 순수한 마음을 또한, 그대로 유지되지 않았다.
"그래서 저는 언제 죽는데요?"
'서하'의 정체는 화재의 인물로 되고 있던 '아름'에 대해서 알아내고 그 대상으로 영화 각본을 만들려고 하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까지 알게 되는 데에는, '아름'만의 순수한 이야기가 어른들의 욕심으로 방송으로 만들려고 알게 된 진실이었다는 것.
"낫지도 않는 거 뭐하러 자꾸 먹으래? 내가 엄마 아빠 말 안 들은 적 있어요?"
자신에게 새로운 활기를 주었던 사람이, 자신을 그저 이용해 먹으려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아름'. 그리고 더 이상 삶에 대해 미련을 버리는 듯한 말을 하는 '아름'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자식이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가족이 화해를 하는 방법은 함께 시간을 가지는 것.
'아름'은 아버지랑 밤하늘을 보고 싶어 했고, 잘 뛰지 못한 걸음을 힘차게 내디뎌 달려본다. 엄마가 같은 침대에서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동네 할아버지와 함께 마실을 나가기도 한다.
저는 저희 아름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합니다.
저는 그래요.
모든 아버지의 마음이 그럴까. 아니 아버지와 어머니, 부모의 마음이 그럴 것이다. 자식이 하고 싶은 건 다 해주고 싶은 마음.
그 대사에 눈물을 글썽일 수 있는 이유를 순간 느꼈다.
모든 자식들은 그런 부모의 마음을 받아 왔기 때문에, 경험하지 않고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런 장면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넘칠 것 같아서 눈가를 닦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대사는, 모든 부모의 마음을 대변한 대사가 아닐까?
마지막은 세 가족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담당 의사에게 퇴원을 부탁하는 아버지.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 하고 싶었던 것들, 조금이라도 더 셋이서 두근두근, 가슴이 뛰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이 존재하는 건, 부모님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가족애는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 자체에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 어떤 행복을 나누었는지. 그렇기에 부모님들에게는 자식이 예쁠 수밖에 없다. '아름'이를 보면서 차라리, 내가 왜 이렇냐, 다 엄마 아빠 때문이다. 그러면서 비난을 했으면 어떤 입장이 되었을까 생각했다. '아름'이가 어떤 태도를 하던, 부모님은 슬퍼했을 것이다. 그중 제일 아이가 대견하면서도 슬픈 건, 일찍 철이 든 다는 것. 너무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줘 버린 게, 부모의 입장에선 죄책감이 들 것이고 그걸 이겨내려고 한다는 것은 더 애처롭다.
혼나지 않기 위해, 또는 용돈을 받기 위해서 거짓말을 해보기도 하고 그래서 혼을 나 보기도 하고, 철없는 아이처럼 철없게. 그런 모습이 전혀 없는 '아름'에겐 없다. 80대 모습을 한 소년이지만, 80대만큼 많이 알지도 않다. '아름'은 그렇기에 부모에게 특별했다. 그 이전에 그저 단 하나뿐인 아들이고 두 사람을 잇게 해 준 존재니까.
자신 또한 누군가의 연결고리라는 것을, 잊지 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