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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양 Jan 21. 2018

꼭 그렇게 짓밟아야 후련했어요?

영화 글로리 데이.

'청춘' 

 누군가에게는 추억이기도 하고 그 자체라고 여기는 열정이라고 할까. 어떤 시점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청춘을 즐기고 있다고 느낄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때? 좋아하는 사람들과 여행을 하고 시간을 즐길 때? '청춘'이라는 글자가 그저 10대 후반과 20대의 시절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닌 좀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단어 같다고 느꼈다. 

 청춘을 즐기자.

 아프니까 청춘이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 청춘.

 이런 말들이 하나도 공감이 되지 않는 게, 청춘은 무적이 아니다. 겁이 없다고 용기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청춘이라서 아파도 괜찮은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이든 이겨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 대체 청춘은 무엇일까?



 영화 [글로리 데이]에서는 군입대를 앞둔 친구 '상우'를 위해서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부모님 몰래 빠져나와 여행을 가게 된다. 자신들의 스무 살, 갑갑하고 지쳐 갈 것 같은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오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청춘은 무엇일까?

 한 친구는 수능을 다시 보기 위해 엄마에게 감시당하고 살고,

 한 친구는 원치 않는 야구를 계속 이어나가며 아버지에 끌려다닌다.

 한 친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정사로 인해 쉽게 편견을 받는다.

 마지막 한 친구는 할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군입대 후 남게 될 할머니를 걱정한다.

 이 친구들은 전부 20살이 되면서, 법적 성인이 되면서 하나씩 억압을 받고 있다.


 그들에게 청춘이란 그런 억압을 받는 세상에서 벗어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작한 짤막한 여행이었고, 그 여행은 4명의 청춘을 잔뜩 일그러지게 된다.

 분명 어떤 남성에게 폭력을 당하고 있는 여성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가해자가 되어 도망을 치고 있었고, 구해준 여성은 자신들을 남편을 죽였다고 거짓 진술을 한다. 경찰은 뭔가 의심스러움이 있음에도 그저 청춘들이 범인으로 확정 짓고 넘어가려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부모님은 뒷돈을 주던 사회적 권력을 써서 청춘들을 빼내려고 한다.

 사실 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는 청춘들은 3명뿐이었다. 1명은 그 과정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해서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1명은 이 여행의 주인공 '상우'였다.


우리 왜 도망가야 하냐? 우리 잘못한 거 없잖아?

 그런 때가 있었다. 딱히 뭔가 잘못한 걸 한 기억은 없는데 경찰서에서나 세무서에서 편지 한 통이 오면 괜히 겁이 나곤 했다. 설령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일상이 매번, 항상 올바르기만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분명 청춘들도 여성을 구하기 위함이었지만, 남성에게 휘두른 폭력이 마냥 정당하고는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무서웠던 건, 그럴 압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쫓아온다는 것 그 자체였다. 귀신이 이유 불문하고 등장하면 무서운 것처럼.



 또한 이 청춘들에게 청춘이란, 우정이었다.

 군입대를 하는 '상우'를 보내기 싫어했던 것처럼, 같이 불꽃놀이도 하고, 남자들끼리의 음란한 장난, 등 모두 친구로서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뒤로 가면 갈수록 아이들이 어떻게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자신을 도와줄 증거는 없고 그 증거를 덮는 어른 듯을 욕심은 청춘들의 입장에선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도와준 여성은 불륜을 하다가 남편에게 들킨 것이었고, 거짓진술을 한 것도 남편의 재산을 이어받아야 하기도 하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위함이기도 했다. 막내 경찰이 확신이 들지 않아 다시 조사를 해보자고 해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상사라 던가, 답답하다면 답답하고 씁쓸하다면 씁쓸한 현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면 청춘들이 위기에서 빠져나 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한 친구는 은근슬쩍 말을 꺼내 본다.


"우리, 상우한테 밀자."


 의식불명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친구에게, 그 친구가 이해해 줄 거라고 혐의를 떠넘기자는 것이었다.

 그 대사는 청춘들의 청춘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게 하는 대사였다. 더군다나 그 방법은 '상우'의 보호자가 할머니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변론을 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청춘들의 부모님들이 준비한 대책이었다.


 청춘들은 그런 어른들의 방식에 뒤따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스로 위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영화 속에서 구해준 여자도, 분명 자신이 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내몰았다.

 부모님들도 자신의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방법을 갈구했다.

 청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 청춘들은 두 번 다시 회복할 수 없도록 산산조각 난 관계가 되었다.

 잔뜩 일그러졌다.

 

 이 영화는 '글로리 데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One Way Trip라는 영어식 제목도 있다. 영어 제목의 뜻 그대로다. 이 아이들이 위기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씁쓸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이야기다.

 하지만 씁쓸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알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그 청춘들이 이렇게나 잔뜩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는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상상 이상으로 치졸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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