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비가 한창 내리던 날씨에 나와 내 친구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6시 반.
우리가 기다리고 있던 버스정류장은 롯데 백화점 앞에 있어서 그런지 유독 길고 정류하는 버스도 많았다. 우리는 거기에서 우리가 탈 버스를 기다리면서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소개팅을 했다면서 클럽을 갔다고 하더라고?" 내가 말했다.
"그렇다니까? 야. 아무리 아직 이렇다 할 관계가 아니더라도, 소개팅을 하고서 클럽을 갔다는 건 여자들 꼬시러 갔다는 거 아냐?"
나는 친구의 말에 호응을 해주었다.
주변에는 그 소개팅남 같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기에 그 남자의 사고방식을 얼핏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대변할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만 만나. 연락은 와?"
"오긴 왔었는데, 이제 대답은 안 하고 있어."
"잘했네. 그냥 이상한 사람 소개받았다고 생각해 버려. 안 보면 그만이지."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 계속 오고 있었냐면, 정류장 아래에 고인 빗물에 계속 비가 때리듯 내려서 신발에는 물론 치마까지 묻을 것 같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나는 몇 분 후에 버스가 오는지 확인했다.
7분 후에 온다는 전광판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대로 오는 버스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버스들 옆 사이로 비집고 달려오고 있는 검은 승용차가 하나 있었다.
그 승용차를 보자마다 바로 직감 할 수 있었다.
'물 튀겠다!'
버스정류장에는 버스들만이 지나칠 수 있게 만들었지만 가끔 그렇게 승용차가 비집고 들어오는데, 비 오는 날에는 특히 불안한 예감이 들기 쉬웠다.
그리고 그 승용차는 우리 앞에 지나치기 전부터 긴 버스정류장 앞쪽에서부터 바닥에 고인 빗물을 튀기고 있었다. 그 튀기는 빗물은 우리에게 까지 이어올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지만 미쳐 대처할 순 없었다.
하지만.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해 보이는 검은 우산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 덕분에 우리들에겐 빗물이 튀진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검은 승용차를 보면서 욕을 해댔고, 그 승용차는 마치 일부러 그랬던 것처럼 약 올리는 것 같은 뒷모습으로 사라졌다.
나는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그는 몇 분 지나지 않아 167번의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친구는 말했다.
"대박. 우리까지 막아줬어."
친구는 그 남자가 사라지자마자 그 남자에 대해서 말했다. 사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에 이어지는 덤덤한 태도는 오히려 더 인상에 남게 되었다.
그게 그 남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내 기억상엔 말이다.
내가 그때 그 주변의 정류장에 있었던 이유는 그 번화가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기존에 했던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 친구와 만나서 놀러 가기로 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매번 6시 반쯤 정도가 되면 그 버스정류장이 퇴근길이 되었지만, 이제는 9시 반 정도가 되어서야 그 정류장을 찾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 남자를 마주하진 못했다.
애초에 우연이었을 뿐이었지만, 생각보다 그 버스정류장을 갈 때마다 그 남자가 떠올라지곤 했다. 그만큼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었다.
내가 아르바이트 시간을 바꾼 이유는 기존의 아르바이트 시간에 학원을 다니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아르바이트를 안 할 순 없었는데 타이밍이 꽤나 잘 맞아떨어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 버스정류장을 이용해도 그 남자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네이버 웹툰 작가 <커피도둑>의 '유지별이'님의 제공
일주일 하고도 며칠이 더 지나 주말이 돌아오기 전,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카페에 들렸고, 아무런 생각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 주문을 했고, "드시고 가시나요?"라는 말에, 아무렇지 않게 "아뇨, 가져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커피는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나왔고 나는 그 커피를 받아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이상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하필이면 테이크아웃을 한 것을 후회했다. 내 뒤에는 다른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고 내 앞에는 그때 그 버스정류장의 그 남자가 직원으로 있었다.
"아!"
나는 인사를 할까 했다. 그러던 와중 그도 나와 눈을 마주치며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는 직감을 느꼈지만, 나는 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른 손님들이 주문을 할 수 있도록.
나는 카페 밖으로 나와 그 카페 안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조금만 늦으면 강의 시간이 늦어버리게 되는데, 대신해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은 3시 50분.
그가 지금 이 시간에 있는 이상 최소한 3시 반이나 3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내일 그 시간이나 지금 이 시간에 다시 와보자는 생각을 하며 학원으로 향했다.
다음날.
"없잖아..."
3시가 되어서 왔지만 그는 없었고,
그다음 날.
"또 없네..."
3시 반에 왔지만 그는 또 없었다.
그 그다음 날.
이번에는 학원에 조금 늦을 각오로 4시까지 그 카페를 지켜봤다.
"없네..."
그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혹시 그 요일에 오는 건가 싶어서 같은 요일인 금요일에 다시 와보기로 했다.
그때는 아예 2시부터 4시까지 카페 안에서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그는 출근하지 않았다.
어째,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순간에 말을 걸어볼걸 후회했다. 그 순간만 따지자면 타이밍은 좋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더 지났다.
나는 반 포기하는 마음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을 더해 그 카페를 지나쳤지만 그는 역시 없었다. 그리고 이전에서 일하던 아르바이트에서 한 번만 대타로 일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날은 마침 학원도 휴강이라서 가볍게 응했다.
"언니 오랜만이에요." 나는 약 2주일 만에 찾은 수제 햄버거집에 왔다.
밖으로 빼내려고 하는 기름 냄새는 여전히 주방에서 홀로 세어 나오고 있었다.
"안녕~ 잘 지냈어?"
"요새 학원 다닌다고 머리 터질 것 같아요."
"쉬엄쉬엄해. 그렇게 열심히 살면 힘들어."
"에이. 해야 할 것들 뿐인데요 뭘."
나는 곧장 앞치마를 둘러 매고 이전처럼 일할 준비를 했다. 나의 담당은 손님이 주문한 햄버거를 서빙해주고 계산하는 것. 메뉴도 바뀐 것도 없이 다시 교육받을 필요 없이 심플했다.
"언니, 오늘 대타하는 거 오늘 바로 주는 거예요?"
"그렇지, 엊그제에 봉투 채워 넣고 갔어."
정당하게 일을 하는 거지만 괜히 꽁돈이 생긴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의 시간은 오후 3시부터 6시까지였다. 다른 곳 같았으면 한가하고 아르바이트가 필요 없는 시간대이지만, 수제 햄버거집이 위치한 곳은 주변에 유명한 카페거리가 있어서 이 시간대에도 손님이 많았다.
나는 아무런 실수 없이 3시간을 버틴다는 생각으로 일을 했고, 4시가 조금 넘어서 언니가 말했다.
"저 손님 최근에 자주 오시네. 거의 매일 아니면 이틀에 한 번은 오는 거 같은데."
"네? 누구요?"
그 언니는 한쪽 테이블을 조용히 가리켰다. 그 테이블에는 혼자서 온 손님이었고 생각보다 익숙한 사람이었다.
"너 있을 때엔 아주 가끔씩 오기도 했는데, 최근엔 엄청 자주 오더라."
버스정류장의 그 남자였다.
언니는 그가 혼자 와서 먹고 가는 편이라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최소한 두 명이나 셋, 이렇게 혼자 와서 혼자 먹고 가는 손님은 드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째 나를 쳐다보는 건지 시선을 피하는 건지 애매했다. 그건 아마 나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지만, 눈이 마주쳤을 땐 가볍게 입고리를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건네볼까 싶었다.
하지만 이건 또 무슨 타이밍인지, 5시쯤이 다 되어가니 손님들은 갑자기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손님을 응대하면서 그가 있는 자리를 계속 주시했고, 어느새인가 그는 사라져 있었다.
"아... 진짜..."
나는 그렇게 또 찾아온 타이밍을 놓쳤다.
나는 그 이후로 바로 새로 구했던 아르바이트를 하러 출근했다. 약 2만 원 정도 들어 있는 돈봉투를 가방에 넣고, 나는 그가 일하던 카페로 다시 향해보았지만 역시 그는 없었다.
"하, 정말 안 맞네. 안 맞아."
나는 자꾸 어긋나는 게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점점 그 카페에 들리는 날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혹시나 해서 자주 찾아온다던 그 햄버거집에도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그도 나를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랬더라면 그때 그가 어떠한 흔적이라도 남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 후로 4일이 지나 나는 학원을 마치고 가야 하는 아르바이트가 취소되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시간은 6시 반이 되기 전이었다.
정확하게는 6시 10분 정도.
거기에는 그때 그 남자가 서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주변을 돌아보면서 말이다.
그렇게 고개를 돌리며 돌아온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안녕... 하세요." 나는 먼저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
그 또한,
"안녕하세요." 라며 살짝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옆에 조금 거리를 두어서 섰다. 그리고 시선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지 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처럼 비가 오는 날씨는 아니었지만, 곧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이기도 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번에는 정말 고마웠어요. 비 오는 날."
"아니에요.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럼요. 엄청 놀랐었거든요."
"네..."
그리고 다시 숙연해졌다.
하나의 버스가 우리 둘 앞에서 멈추었다.
버스 번호는 81번이었다.
그리고 그 버스가 지나가자 그가 말했다.
"그때, 햄버거집에서 봤었던 날, 이 시간쯤이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바로 답했다.
"버스 정류장에서요?"
"네."
"왜요?"
"저는 어떻게 인연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쪽 주변에서 꽤나 맴돌고 있었거든요. 아르바이트하는 곳에도 자주 가고, 퇴근시간에 맞춰서 여기에 와보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좀 기분 나쁠 수도 있겠네요."
나는 나에게 맞은 타이밍은 결국 다 우연스럽거나 운명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행운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땐 오랜만에 대타였고, 그 후에도 아르바이트가 있었어요."
그 말에 그는 "아"하고 씁쓸해하면서 다시 말했다.
"그래서 엇갈린 게 아닐까 해서 시간을 늦춰봐서 기다려봤었거든요. 그 햄버거집에도 가보기도 하고."
"저도 그때 카페에서 본 이후로 다시 가곤 했었는데." 내가 말했다.
"저도 대타였어요."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어긋나 있었다.
서로 같은 이유로 어긋나는 것도 신기하고 실없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타이밍이 잘 맞아 왔으면서도 그 순간을 잡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여.
"괜찮으면 연락할 수단... 아니 번호 좀 줄 수 있어요?" 그는 확실하게 말했다.
나는 그의 휴대폰을 받아서 내 번호를 찍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내 휴대폰에도 그의 번호가 떴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던 버스 167번 보다 한 타임 더 빠르게 81번 버스가 도착했다.
그는 그 버스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연락받아줘요. 연락할게요."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나는 손을 흔들면서 그를 보냈다.
아마 그는 이전에 왔던 버스를 타지 않고 보내면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 모양이었다.
그건 내가 기다리던 167번이 오더라도 똑같이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에는 타이밍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건 역시 그걸 잡느냐 마느냐 순간의 선택을 하려는 결심에 갈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