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하고 6년 뒤.
이별통보를 받았다.
"이제 그만 만나자."
나는 어느정도 납득을 했다.
그 녀석이 왜 이별통보를 하는지 설명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납득했다. 그렇기에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녀석 역시 무슨 말을 더 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의 사랑은 이미 식어가고 있었고 더 이상 온기가 바뀌고 있지 않았다.
그 뿐이었다.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했지만, 서로의 마음이 이젠 서로에게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린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제자리에만 머물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18살 시절.
그 애를 만난지는 거의 7년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엄마 아빠는 워낙에 어린 시절부터 같이 지내서 훨씬 어릴때부터 지내왔다고 하지만, 나로선 10살이 조금 넘었을 시절에 만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너무 어리다보니 '친구'라고 의식한 것이 그때부터가 아닐까 싶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좀 더 명확한 계기가 있기도 했었다.
10살 밖에 안되던 시절.
그 애는 나에게 빼빼로를 들이대며 그렇게 말했다.
"나랑 사귈래?"
그것도 다른 애들이 있는 장소, 더군다나 아무렇지 않게 내밀던 손짓. 그리고 하필이면 학원 교실 안이었다.
나는 분명 거절을 했다.
그 이후로도 친구로 지내고 있었고, 그 떄의 일 가지고 투닥거리는 것도 없었다.
다시 생각하면 정말 최악같았다. 어떻게 그런 순간에 그런 장소에서 그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버스정류장에서 있을 때였다.
무언가가 뒤통수를 후려갈겨왔고, 귀에 걸려 있던 에어팟은 앞으로 튀어나갔다.
"아이씨!"
나는 에어팟을 주워들며 뒤를 돌아봤고, 그때의 그 놈이 나를 깔깔 웃으며 내려보고 있었다.
"오우! 한대 때리고 에어팟까지 1타 3피 오졌다~"
나는 바로 일어나가자마 발로 차며 말했다.
"아씨! 이거 얼마전에 삼촌이 사준거라고!"
"삼촌한테 에어팟 말고 에어팟 프로로 바꿔달라고 그래~"
그 놈은 내가 걷어찬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원숭이 마냥 낄낄댔다.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어쩌다가 그런 옛날 생각을 하고, 어쩌다가 이런 사이가 되고, 어쩌다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남녀사이가 되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나에게 그렇게 묻기도 했다.
"그렇게 친해보이던데, 사귀는 거 아니었어?"
"그래그래."
나는 그런 질문에 그렇게 말한다.
"너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막 패고 다니고 그러냐?"
나의 질문에 친구들은 고개를 젓는다.
다른 여자애들 사이에서 그 놈은 꽤나 호감적일지 몰라도, 나로선 그놈이 남자던 여자던 상관이 없을 정도로 투닥거리는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건 부모님끼리 워낙 친하다보니 이어진 영향이 크다고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놈의 집에 놀러가듯, 그 놈도 내 집에 놀러오기도 하고, 우리는 부모님들끼리 노는 것에 끌려 같이 방에서 게임을 하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곧 잘 놀곤 했다.
하지만 늘 빠지지 않는 논쟁은 존재한다.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디있냐.'
놀랍게도 나는 그런 놈을 친구로 두고 있음에도 그런 말을 하는 편이다.
"남자랑 여자가 어떻게 친구로 지내?" 내가 그렇게 말하면, 그 놈은 그렇게 말한다.
"당연하지. 유일하게 서로 맞는 부분이지."라며 공감해준다.
그리고 그런 주제는 늘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때문에 여전히 논쟁이 이뤄지고 끊이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준다는 발렌타인 데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유난히 배가 고파서 학교 책상에 늘어져 있던 어느날. 친구 한명이 다급하게 내쪽으로 달려와서 말했다.
"야. 너 아까 그거 못봤지?"
"응 뭐가?" 나는 그 친구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멍하니 대답했다.
"아까 4반에서..."
4반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 또 그놈의 이야기를 하나보다 싶었다. 많은 친구들이 내가 그놈이랑 친하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이렇게 그 놈의 이야기를 전해주러 오는 애들이 있곤 했었다.
나는 상체를 끌어올려 친구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뭐라뭐라 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네.'
그 생각 틈 사이로 친구는 말했다.
"온주. 우리반 유진이한테서 초콜릿 받고 고백 받았더라! 그것도 교실 한가운데서."
그 말을 듣자 바로 생각이 났다.
그랬다. 어제 그 놈. 온주가 나에게 전화를 해서 그런 말을 했다.
"내일 나한테 초콜릿 안줄거냐?"
그 말에 내가 말했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걸 주냐? 500원도 아까워~"라고.
나는 잠시 멈춰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동을 걸고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4반을 살펴봤다.
온주는 유난히 남자애들한테 둘러쌓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둘이 사귀는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차자마자 나의 시야에는 온주밖에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직 18살이었다.
사랑이 뭐냐는 질문을 한다면 솔직히 말해서 확실히 대답을 할 자신이 없다.
그냥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말 밖에.
하지만 조금 지나고 나서야 한 마디로 어느정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은 했다.
"사랑이란, 제자리에만 머무는 건 아닌 것 같다."라고.
어째서 나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만 머물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라는 생각으로 나는 온종일 집에서 우울하게 있었다.
이별 통보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어째서 그런 옛날 생각들이 났는지 모르겠다.
"참 웃겨. 그때랑 지금이랑 변한 건 없네."
그건 이제는 전 남자친구가 되어버린 온주를 향해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때의 온주는 유진이라는 여자애의 고백을 거절했다.
나는 그것도 모른채 사귀지 말라고 부탁을 했었다.
사랑은 언제까지고 제자리에만 있지 않는다는 것을, 나 나름대로 정의했던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되고 있었다.
이제는 스물 네살이 되었다.
온주와 함께 6년동안 정말 많은 순간을 함께했다.
처음으로 데이트라는 것들을 해보았고, 처음으로 여행이라는 것들을 해보았고, 처음으로 남자와 온기를 나누며 안았고, 수 많은 처음들을 온주와 함께했다.
온주는 말 그대로 나의 '처음'과 다름 없는 존재였다.
멀리 달아날 줄 알았던 그를 붙잡아서 행복한 6년을 보냈었고,
그런 6년을 보내면서 항상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그가 결국 떠나갔다.
참 많은 추억이 지나갔다고 생각이 들었다.
친구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은 좋은 기억들이 있었기에, 친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게 애착이 남아서 잡고 싶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추억들이 있었다는 게, 꽤나 오랫동안 머리 안에 자리잡을 것 같았다.
다시 누군가가 사랑이 나에게 뭐냐고 묻는다고 한다면,
나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사랑은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만 머물고 있지 않는다."라고.
좋아했던 마음도, 좋아하는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