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Nov 22. 2016

05. 나대는 엄마, 고립되는 아이

<대한민국 엄마 구하기>

주변에서 흔히 ‘나대는’ 엄마들을 봅니다. 자신을 아이 인생의 구세주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캠프에 보냈더니 아이가 달라졌어요. 꿈이 생긴 것 같아요. 전에는 안 그랬는데 뭘 해도 열심히 하더라고요.” 
“우리 아이 영어 하는 거 보면 다들 놀라요. 외국에서 살다 온 줄 아는데 사실은 제가 고생 좀 했지요.” 
“역시 아이 재능은 엄마 하기 나름인 것 같아요.”
   
평범한 아이였는데 엄마의 노력으로 비범한 아이를 만들었다는 줄거리는 비슷비슷합니다. 나대는 엄마의 무용담을 듣는 주변 엄마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합니다. ‘표준적인 규범’이 사라진 혼란스러운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줄 구세주의 탄생, 주변 엄마들의 표정에서 구세주 엄마들을 향한 동경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 공부 잘 시키는 엄마들을 보면 괜히 주눅 들어요. 솔직히 그 엄마들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보다는 훨씬 잘하는 것 같아요.”
   
반대로 나대는 엄마들을 볼 때 저의 눈빛은 걱정으로 가득해집니다. 이미 엄마 마음이 강을 건넜음을 잘 알기 때문이죠. 지금이야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우월해 보일지 몰라도 조만간 엄마 마음과 아이 마음이 멀어질 텐데 그다음에는 어쩌나 싶은 걱정에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조금 일찍 학원이 끝나 집에 와서 컴퓨터 게임을 하던 아이, 그날따라 일찍 퇴근한 엄마가 나타나자 허겁지겁 컴퓨터를 끄고 공부하는 척했다가 추궁당하자 엄마가 보는 앞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린 초등학생이 떠오릅니다. 학교 수업 시간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부가 어렵다. 왜 공부하는지 모르겠다’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등학생이 떠오릅니다.
     
제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걸까요? 하지만 우리나라 10세에서 19세 사이 청소년 사망 원인 중 1위가 바로 자살입니다. (2위는 교통사고, 3위는 암)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엄마들에게 호소합니다. 
     
“아이들 자살은 교통사고와 비슷합니다. 누구나 조금만 방심하면 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데 당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다만, 교통사고는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잘 알지만, 부모 역할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잘 모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오히려 조심하기는커녕 무모할 정도로 아이들을 몰아붙이는 부모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한 고등학생이 보낸 메일을 받았습니다. 읽으며 아차 싶었습니다. 메일에서 아이의 자살 충동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기에, 서둘러 학생이 다니고 있는 학교로 연락해 담임 선생님과 통화했습니다. 제가 받은 메일 내용을 전달했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사실 메일을 받기 전에 그 학생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쓴 책과 신문기사 스크랩을 들고 한 신문사에서 주관한 부모 교육에 찾아왔었습니다. 부모와 대화를 하고 싶어 궁리하다가 저를 알게 되었고, 엄마 아빠에게 제가 쓴 칼럼과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무지 자신의 얘기는 듣지 않으려고 하는 부모에게 절망하다가 혹시 저를 직접 만나면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왔다고 했습니다. 같은 부모로서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가끔 메일로나마 아이 얘기를 들어주고 위로하는 중에 발생한 일입니다. 

   
그 아이 마음은 부모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고립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번번이 좌절되자 절망감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 마음에 자라는 고립감과 절망감을 너무 자주 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엄마 주도성이라는 학부모 문화가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어떻게 그렇게도 내 마음을 몰라주니!” 엄마 마음에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아이의 고립감과 절망감은 커진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엄마들이 공교육에서 ‘을’이라면 사교육에서는 ‘갑’입니다. 엄마 주도권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교육 측면에서 보면 엄마 주도성은 너무나 고마운 문화입니다.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고객이 되고 소비자가 되어주니까요. 사교육 산업이 가장 발달한 대치동을 중심으로 매니저 맘이라는 신생어가 탄생했습니다. 아이 미래는 엄마의 관리 능력, 바로 엄마의 관리력이 좌우한다는 의미입니다. 엄마라면 누구도 시비 걸 수 없는 절대명령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엄마는 엄마 주도성이라고 쓰고 엄마의 관리라고 읽습니다. 저는 엄마 주도성이라고 쓰고 엄마의 독재라고 읽습니다. 표현은 엄마의 관리지만 본질은 바로 엄마의 독재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부모 교육을 하면서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주제는 바로 가정과 감옥의 공통점 찾기였습니다. 토론 결과를 정리해봤습니다.
     
굶기지 않는다, 감독관이 있기에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자기 마음대로 먹거나 입을 수 없다, 보거나 생각할 수 없고, 나갈 수도 공부할 수도 없다. 반항하면 죽는다, 규칙을 어기면 응분의 대가가 있다, 복역 기간이 있다, 장기 복역의 후유증으로 사회 부적응자를 양산한다, 내 생각은 없다….
     
제가 강의에서 엄마들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집에 가면 함께 사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자가 한 명 있지요? 만약 그 인간이 여러분을 관리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소통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에 맞게 여러분을 관리한다고 여겨지면 함께 사시겠습니까?”

물론 대부분 엄마가 함께 살 수 없다고 답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을 관리하는 엄마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아직은 독립하기 어려워서 관리당하는 수모를 감내하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09. 은행에서도 만날 수 있는 유대인의 상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