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어이, 광웅이 짐을 싸야겠네.”
2003년 10월 15일 아침 8시 30분경.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부속실 선임행정관에게 말을 건네는 유인태 정무수석의 볼은 빨갛게 상기돼 있었다. 잠시 전 일일 상황점검회의에서 문희상 비서실장으로부터 노무현 대통령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온 터였다.
이날 새벽부터 청와대는 발칵 뒤집혔다. <대한매일>이 1면 머리기사로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野 반대 땐 투표처리 강행 안 할 것’이라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문희상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오보가 나간 경위를 철저하게 조사해 관계자를 엄중히 문책하라.”고 지시했다. 언론 보도와 관련해 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관련자 문책까지 언급한 것은 취임 이후 처음이었다. 그만큼 재신임에 거는 노 대통령의 마음가짐은 일각의 비아냥거림처럼 정치적 속임수가 아닌 국민을 향한 진심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최도술 초대 총무비서관의 SK비자금 수수 의혹과 관련해 말도 많고 탈도 많아 청와대에 초 긴장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틀 전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재신임 국민투표를 공식 제안했다. 하루 전에는 참모진 전원에게 함구령이 내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공식 입장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사가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이다. 그런데, 그 취재원이 바로 다름 아닌 유인태 수석이었다.
직분에 충실하려 했던 유 수석은 다행히 소명이 받아들여져 구두주의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그런데 아무리 강심장이라고 해도 일개 참모가 감히 대통령의 ‘영’을 거역할 수 있을까? 유인태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모교인 경기고의 교훈은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다. 대부분의 경기고 출신은 화려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우리나라 상류 1%가 된다. 그러나 유인태는 인생의 대부분을 경기고 교훈대로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기존 정치인들에게 익숙했던 기자들에게 유인태 수석은 충격이었다. 한정식이나 중식당 같은 고급 음식점이 아니라 3,500원짜리 허름한 청국장 집에 출입기자들을 불러 모아 제육볶음 안주를 곁들인 ‘소폭’을 연신 말아댔다.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기자들이 먼저 나가떨어져도 흐트러짐 없는 건배사로 “건전한 긴장관계!”를 외쳐댔다. 말끝마다 맛깔스러운 육두문자를 사용하는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엽기수석’이었다. 격식을 깨는 거침없는 언행은 ‘자유인’의 또 다른 표현이다.
“춘추관 기자들과 상견례 자리에서 절대로 기사를 쓰지 않겠다기에 순진하게(?) 평소처럼 얘기보따리를 다 풀어놓았지요. 대통령을 두고 ‘상고 나온 사람하고 같으냐?’라는 농담을 던졌는데, 나중에 다 기사로 나오더군요. 아니 그런 걸 쓰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 후 청남대 개방행사 가는 버스에 탄 출입기자들을 보고 ‘야! 여기 사람이 타는 차인데 짐승하고 ×새끼들은 왜 태웠냐!’ 그랬죠.”
그때부터 ‘엽기수석’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보통 정치인들은 기자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욕을 퍼붓는 건 감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유 수석에게는 성역이란 게 없었다. 물론 이런 적나라한 표현은 기자들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좃선일보, 똥아일보”라고 말해도 항의를 받거나 소송을 당한 적이 없다. 그만큼 악의가 없기 때문이었다.
유인태 수석은 1948년 충북 제천에서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주, 혜화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후 경기 중·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난 때문에 부산상고로 진학한 청년 노무현과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이다. 부친은 삼풍제지에 목재를 납품했으며, 도봉구(현 강북구) 미아9동에 2층 양옥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이 집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의 산실이었다. 동숭동 문리대에서 멀지 않은 이 집을 서울대 학생들은 수시로 들락거렸고 그 후 재야인사들이 사실상 숙소처럼 이용했다. 서울대 연극반을 거친 동생 유인택(현 동양예술극장 대표)의 친구들까지 몰려들어 그 많은 밥을 해대느라 어머니가 고생깨나 했다고 한다.
유 수석은 재수를 거쳐 1968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대학가는 3선 개헌 반대운동으로 술렁였다.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몸담은 그는 1969년과 1971년 두 차례나 제적되는 등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4년 5개월간 복역하기도 했다.
유인태 수석은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고, 13대 대선 때는 양김 분열을 막기 위해 대통령 후보 단일화 국민협의회 상임위원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이때부터 노무현 대통령과 꼬마민주당,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등의 활동을 같이하며 동지적 친분을 쌓아나갔다.
1992년 초 14대 민주당 국회의원 공천심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밤. 노무현 의원과 원외의 유인태 당무위원 등 민주계 공천심사위원들은 이기택 공동대표가 머물고 있던 소공동 롯데호텔을 급습했다. 그리고 이해찬 의원의 복당과 공천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노무현 등 부산지역 현역 의원은 물론 서울에서 이미 공천된 이부영, 유인태 등 재야 출신까지 공천장을 반납하겠다고 협박(?)했다. 사실 이해찬 의원은 평민계로 김대중 공동대표에 의해 복당과 공천이 거부된 상태였다. 그는 1년 전 치러진 광역의회 선거에서 측근인 유시민 전 보좌관을 서울시의원으로 공천하려 했으나 중앙당이 다른 사람을 공천하자 이에 반발, 탈당을 해버렸던 터였다.
공천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원기 사무총장 등 평민계 인사들은 감히 DJ에게 대들 수 없었기 때문에 노무현, 유인태 등 민주계 공천심사위원들이 대신 총대를 멘 것이다. 이날 밤 시위로 결국 이해찬 의원의 공천은 관철되었고, 관악(을)에서 내리 5선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원칙을 대하는 관점 등에서 노무현-유인태의 관계는 생각보다 끈끈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지역등권론을 들고 지원유세를 펼친 DJ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하지만 유인태 의원은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부산을 기반으로 하는 노무현 전 의원의 불참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유 의원은 고민이 많았다. 심지어 친여 일색인 경기고 동기들조차 당선 가능성이 높은 국민회의행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가 최종 결심을 굳히도록 한 이는 김원기 최고위원이었다. 김 최고위원은 DJ 깃발이면 곧 당선인 호남에서 용감하게 반지역주의 선언을 해버린 상태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김원기, 유인태 등은 15대 총선에서 대부분 낙선했다. 게다가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만들면서 통추라는 왜소한 조직으로 오그라들었지만 그들은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후 김원기 전 국회의장을 정치적 사부로 깍듯하게 모신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 출범 후 통추 출신 전직 의원 5명은 모두 한 자리씩 보상을 받았다. 심지어 당내 경선에서 패한 원혜영 부천시장은 DJ가 그 결과를 뒤집는 초강수를 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인태는 예외였다. 1987년 당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유 전 의원은 DJ의 불신 때문에 끝내 기용되지 못한 것이다. 그 후 유인태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신의 옛 지역구가 아닌 노원(갑) 공천 제안을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해버렸다. 노원(갑)은 그와 오랫동안 동지적 관계를 유지해온 고영하 지구당위원장이 14~15대 연속해서 출마, 낙선한 지역구였다. 비록 고 위원장이 세 번째 공천을 받기 힘들어졌지만, 차마 인간적으로 못할 일이라고 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13대부터 이어온 총선 출마를 한 번 건너뛰었다. 바로 이 대목은 엽기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유인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인태 수석은 비록 1년간의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길이 남을 정치개혁의 새 역사를 썼다. 선거문화를 바꾸는 데 초석을 닦은 것이다.
그는 정무수석실에 소속된 치안비서관을 통해 경찰을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14대 국회에서 내무위원회로 활동한 경험도 경찰을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됐다. 물론 이전 정부에서도 금품 선거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고 권력자들에게 깨끗한 선거를 치르겠다는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늘 혼탁한 선거가 치러졌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 역시 총선 당시 DJ로부터 거액을 지원받은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던가?
유 수석은 경찰 고과에 강력범뿐만 아니라 선거사범 단속 시에도 특진을 시키도록 제도를 고쳤다. 승진에 목을 매는 하위직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도록 착안한 것이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경찰들이 열심히 선거사범을 단속했다. 물론 여당이 제일 많이 걸려들긴 했지만 17대 총선은 정말로 깨끗하게 치러졌다. 불법선거자금 신고자 50배 포상금제도 역시 그가 주장해서 도입됐다. 유 수석의 예상은 적중했고, 청렴 선거의 수훈갑은 단연 경찰이었다.
유인태 수석은 2004년 2월 13일 “백수가 엽기 되어서 나간다. 굳이 뻘밭(정치판)으로 나가라고 하니 내키지 않은 발걸음으로 간다.”며 문희상 비서실장과 함께 열린우리당의 징발에 응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이 불기 전이었고, 열린우리당으로는 큰 위기를 느끼던 때였다. 처음에는 정동영 당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여론조사 결과까지 보여주며 고향인 충북 제천 출마를 권했다. 물론 관료 출신 등 힘 있는 인물을 반기는 지역 특성상 당선 자체는 큰 무리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홉 살 때 떠난 고향을 찾아가 보니 여당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컸다. 철도청 이전과 같은 지역개발 공약을 비롯해 대략 1,000여 명은 취직시켜줘야 할 형편이었다. 결국 그는 원래의 선거구인 도봉(을)로 주저앉았고, 8년 만에 원내로 복귀했다.
유인태 의원은 체질적 재사(才士)형으로, 나서기를 싫어한다. 2005년 열린우리당 정치개혁특위 위원장, 2006년 완전국민경선제TFT 위원장 등 주로 정치개혁 관련 일을 맡아왔다. 19대 국회 마지막 회기에는 중진임에도 이례적으로 지역구도 타파와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확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개혁특위 위원을 자청했다. 분권형 대통령제 등 87년 체제를 뛰어넘는 정치구조 개혁을 위한 일에도 앞장서왔다. 그는 스스로 대통령이나 당대표에 도전할 꿈을 꾼 적이 없다. 이른바 킹메이커였던 셈이다.
그런 그가 두 번의 당내 경선에 출마한 경험이 있다. 첫 번째 경험은 2005년 3월 말 열린우리당 서울시당 중앙위원 경선에서 1위를 차지, 서울시당 위원장에 선출된 것이다. 후배들에 떠밀려 경선에 참여했는데, 선거를 목전에 두고 ‘태평하게’ 동료 의원들과 일주일간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왔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특히 60세가 되기 전에 히말라야에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는 것이 등반 이유였다. 그와 같은 ‘엽기적인 인물’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시 그의 경쟁자는 막강한 주류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한길 의원이었다. 서울시내 전역에서 모인 당 내외 후배들은 기호 22번, 꼴찌 번호를 뽑은 그를 위해 자원봉사자로 전력투구했다. 당시 모인 멤버들은 지금도 1년이면 몇 차례씩 모여 복달임을 하는 등 우의를 이어가고 있다. 모임의 이름은 당시 22번 기호를 따서 메조회(화투에서 2는 메조라고 부름)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19대 총선에서 당선된 직후 원내대표 선거에 출전한 것이다. 이른바 이-박(이해찬-박지원) 담합을 상대로 평생 특정한 계보활동을 하지 않았던 그가 결선에까지 올라 60대 67표까지 간 것은 그 자체로도 빅 뉴스였다.
유인태는 제36대 정무수석으로, 참여정부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무수석이다. 유 수석이 퇴직한 후 노무현 대통령은 책임장관제를 도입해 여의도 정치권과의 접촉을 각 장관에게 맡기겠다는 차원에서 정무수석제를 폐지했다. 특별교부세처럼 정치권에 제공할 ‘당근’도 없는 상황이어서 정무수석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다. 여의도 정치권에는 정무수석을 통한 막후 타협을 하지 않겠다는 노 대통령의 선언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흔히 성공적인 정무수석의 첫째 조건으로 대통령의 절대적인 신임을 꼽는다. 시시콜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일을 추진할 경우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정무수석이 돼야 여당의원이든 야당의원이든 그와 만나고 싶어 하게 된다. 둘째, 여의도 정치 경험은 정무수석 성공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일이 터지면 자리에 앉을 시간도 없이 바쁜데 일일이 찾아가서 협조를 요청하는 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전화 한 통화로도 해결할 수 있으려면 여의도 경험이 절대적이다. 특히 국회의 권한이 갈수록 비대해지는 만큼 여야 정치권의 협조는 필수 불가결이다. 이처럼 정무수석의 최대 역할은 청와대와 정치권의 가교 역할이다. 유인태 수석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정무수석을 폐지해버린 까닭도 적임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유인태 수석은 2004년 초에 한나라당과 선거구제 개편을 둘러싼 물밑 협상을 벌였다. 당시 홍사덕 한나라당 원내총무와 도·농 복합(1~3인)선거구제를 도입하고 원내 과반 정당에 내각 구성권을 이양하는 ‘연정 방안’에 잠정 합의, 성사 단계까지 갔다. 그러나 영남 도시지역 의원들의 반발로 막판에 좌절됐다. 홍사덕 총무는 한때 민주당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였다.
2002년 대선 때도 유인태 정무특보는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특명을 받고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측근인 윤여준 의원을 수시로 접촉했다. 2001년 헌법재판소가 1인 1표를 기반으로 하는 전국구 배분 방식에 대해 위헌 판정을 내린 상태에서 노무현 후보가 필생의 과업인 지역주의 극복 선거구제 도입 과제를 그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그때도 그는 당시 마포팀 실무자들과 함께 16대 총선 결과를 토대로 권역별 비례대표제 시뮬레이션을 해봤고 한나라당에 결코 불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이 또한 도·농 복합선거구제와 함께 제안해 상당히 진척되었음은 물론이다.
막후 협상 전문가인 유인태 의원의 진가는 2008년에도 발휘됐다. 인수위 시절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정부조직개편을 17대 거대야당인 통합민주당과 상의했는데, 당시 손학규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협상 대표를 지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당선인 측에서는 이재오 의원, 민주당 쪽에서는 손 대표와 가까운 유 의원이 대표가 됐다. 원내대표 간 협상 테이블과 별도로 두 사람은 거의 한 달 동안 매일 밤 9시 스위스그랜드호텔 지하 바에서 만나 줄다리기를 했다.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장관 수를 줄이는 데 집착했지만, 유 의원은 끈질긴 설득 끝에 통일부와 여성부를 살려냈다. 정치가 실종돼버린 요즈음의 여의도에서는 드문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유인태 정무수석은 청와대에 있는 동안 끊임없는 화제를 낳았다. 대통령이 말할 때 졸거나 대통령과 같이 맞담배를 피우는 것은 예사고, 비보도를 전제로 얘기한 것이 보도될 경우 해당 기자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일상적으로 비속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은 그의 자유인다운 면모를 더욱 부각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홍보수석이 아니면서도 조·중·동에 대한 접촉면을 늘림으로써 보수언론과 강경하게 대치하던 노무현 대통령을 보완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할 말은 한다. 할 일은 한다.’ ‘그의 엽기는 진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등 17대 선거 당시 그가 내걸었던 이색 캐치프레이즈만큼 그는 대통령 앞에서도 할 말을 할 줄 아는 바른 참모였다.
유인태는 19대 국회의원 임기 도중 또 하나의 ‘엽기 행각’을 벌였다. 6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여의도 정치권에 만연된 계파정치 청산을 위한 개혁정치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는 2013년 민주통합당 5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대선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돼온 계파 청산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위해 관행적으로 묵인해온 지역위원장의 오더(대의원 투표 종용 행태)를 금지하는 모임을 결성했다. ‘오금모임’에는 김부겸, 김성곤, 박병석, 오제세, 이상민, 이미경 등 13명의 전·현직 의원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총인원은 59명으로 불어났다. 박지원-문재인 두 후보가 당대표를 두고 치열하게 맞붙은 2015년 2월 전당대회 때도 유인태는 ‘오금모임’ 시즌2를 결성해 활동 열흘 만에 64명의 동참을 이끌어냈다.
19대 국회 임기를 마감한 유인태 전 의원은 20대 총선을 앞둔 2016년 2월 24일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현역 공천 배제를 통보받았다. 그는 “평소 삶에서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해왔다. 저의 물러남이 당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라며 컷 오프 대상의원 중 가장 먼저 수용 의사를 밝혔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비치는 우리 사회에서 오히려 엽기적인 그를 존중해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추가된 셈이다. 엽기 의원 유인태는 이 일로 인해 전국적 스타가 되었고, 한 라디오 방송 고정출연 등 새롭게 인생 2모작을 가꾸고 있다.
그렇지만 참여정부 최고의 엽기적 인물은 바로 노무현 대통령 그 자신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총련 사태와 각종 파업 사태로 얼룩졌던 2003년 5월 21일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는 발언을 쏟아냈다. 가히 엽기 수석에 엽기 대통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