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생각법>
내 목표는 단순히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아주 큰 변화를 가져올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2016년 9월 미국의 한 경제방송 CNBC에서 세계 부자들의 자산을 일당으로 환산해 봤다. 그때 세계 1위는 페이스북 창업주인 마크 저커버그였다. 일당 약 400만 달러로 하루 평균 43억 원을 버는 셈이었다.
마크 저커버그는 1984년 5월 14일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치과 의사이고, 어머니는 정신과 의사였다. 부모는 모두 동유럽계 유대인으로, 그는 어린 시절 유대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저커버그는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언어(BASIC)를 배웠다. 그런데 아들의 엄청난 학습능력에 놀란 부모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가정교사로 두어 가르쳤다. 당시 가정교사였던 뉴먼은 그를 두고 “한마디로 신동이었다.”라고 표현한다.
13세 때는 치과 의사 아버지를 위해 집과 병원을 연결해 환자가 방문하면 알림 소식을 전하는 ‘저크넷(ZuckNet)’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저커버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은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프로그래밍에 강해지면 더 많은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친구와 함께 음악 재생 프로그램인 ‘시냅스’를 만들었다. ‘시냅스’는 개인의 음악 감상 습관을 분석하여 음악을 추천하는 뮤직 플레이어였다. ‘시냅스’는 온라인에 공개되자마자 바로 화제가 되었고 호평이 쏟아졌다. 그러자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메리카 온라인(America Online, AOL)이 시냅스를 100만 달러에 사겠다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단번에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2002년 9월 하버드대학에 진학하여 심리학과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다.
그는 대학 기숙사에서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하버드대 학생들만 쓸 수 있는 배타적인 커뮤니티, ‘페이스매시(Facemash)’를 만든다. 페이스매시는 처음에 토너먼트 방식으로 하버드대 캠퍼스 안에서 최고의 미남미녀를 뽑는 시스템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탔다. 하루 만에 450명이 접속했다. 그러자 대학 당국은 페이스매시를 중단시키고 개발자들을 소환했다. 프로그램을 위해 학교 기숙사까지 해킹한 저커버그는 학교로부터 근신 처분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자기 생각 자체가 근신 처분을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연결되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저커버그의 다음 목표는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는 학생 간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2004년 2월, 저커버그는 하버드대 컴퓨터학과 친구들과 함께 회사를 창업한다. 그리고 동시에 ‘더페이스북’이라는 이름으로 도메인을 등록한다. 이 네트워크는 처음에 하버드대학교 학생들만 이용 가능했다. 하버드대학교 학생들만 접속할 수 있다는 제한성은 사용자들에게 묘한 우월감을 주었다. 학교 내 동아리나 각종 모임은 더페이스북을 이용해 홍보할 수도 있었고 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했다.
더페이스북 접속자는 3주 만에 6천여 명이 넘었다. 3개월 후 접속자가 5만 명을 넘어서자 저커버그는 더페이스북의 서비스 영역을 넓혔다. ‘아이비리그’ 전체로 확대한 것이다. 그리곤 ‘아이비리그(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브라운, 컬럼비아, 펜실베이니아, 코넬, 다트머스)를 넘어 MIT, 뉴욕대학교, 스탠퍼드와 UC버클리까지 서비스 대상을 확대했다. 더페이스북이 생긴 지 4개월 후 학보 <더크림슨>은 개발자였던 저커버그를 인터뷰했다. “하버드 출신은 누구나 직업을 갖고 많은 돈을 벌어요. 그런데 누구나 인맥을 갖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그것이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자원이라고 생각합니다.”
2004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저커버그는 친구들과 함께 실리콘 밸리와 가까운 팔로알토로 가서 생활하며 더페이스북 개발에 전념했다. 이때 이전부터 SNS 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던 숀 파커가 먼저 연락을 해온다. 숀 파커는 한때 개발자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나 사업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저커버그는 숀 파커가 가진 ‘경험’이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그를 파트너로 받아들인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더페이스북의 사용자 수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서버 유지 비용만으로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하지만 저커버그는 방학이 끝나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팔로알토에 남았다. 그가 존경하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모두 대학을 중퇴한 점도 참고했다. 2005년 2월 워싱턴포스트는 더페이스북 지분의 10%를 600만 달러에 사겠다고 제안했다. 비아컴에서는 아예 7천5백만 달러에 매입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벤처캐피털인 엑셀파트너스는 페이스북을 9천8백만 달러에 평가하고 1천2백7십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다.
저커버그는 매각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투자는 받아들인다. 그와 동시에 저커버그는 바로 백만장자의 대열의 올라서게 된다. 페이스북 초기에 거금을 주고 회사를 사겠다는 제안이 쏟아졌지만, 저커버그가 모두 거절한 것은 자신이 회사를 직접 경영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 생각과 꿈을 자신이 직접 구현하려고 하는 그의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학보 <더크림슨>과의 인터뷰에서 자기 생각을 이렇게 밝혔다. “저는 제가 한 일에 가격표를 붙이는 일은 정말 싫습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2005년 9월에 더페이스북은 서비스를 고등학생에게까지 개방했고, 2006년에는 저커버그 본인이 성인식을 치른 나이인 만 13세 이상까지 가입 영역을 넓혔다. 사용자 수는 300만 명을 돌파했고, 서버에 과부하가 걸려 서비스가 중단되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저커버그는 서버 구축과 보강에 전력을 다했다. 사용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커의 조언에 따라 ‘더페이스북’을 ‘페이스북’으로 바꾼다. 2006년 야후가 10억 달러라는 거금으로 회사를 사려고 했지만, 저커버그는 고민 끝에 결국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16년 현재 야후는 몰락했지만, 페이스북은 세계 최고의 IT기업으로 고속성장하고 있다.
2016년 현재 페이스북은 전 세계의 월 사용자 수가 16억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소셜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동시 연결 접속 사용자 수로는 구글도 제쳤다. 단기간의 초고속 성장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페이스북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어 하는가를 증명한다.
마크 저커버그는 일찍부터 사람과 사람의 ‘연결’의 중요성을 파악했다. 페이스북은 사람 간의 ‘연결’로 현대인들의 ‘과시욕’와 ‘관음욕’을 동시에 충족시켰다. 이것이 ‘개인의 사생활’을 전 세계적인 정보망으로 연결할 수 있었던 이유다. 페이스북은 개인정보를 모두 공개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다른 소셜 네트워크와 차별화한 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이제 전 세계에서 개인은 물론 기업들도 페이스북을 사용한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세계 어디나, 누구에게나 연결될 수 있다. 저커버그는 아직도 더욱 즉각적인 연결과 직관적인 소통을 꿈꾼다.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내밀한 사연까지 연결하고 있지만, 저커버그는 아직도 연결에 목말라 하고 있다. 사람들과의 새로운 차원의 연결을 꿈꾸며 자신을 혁신해 가는 천재 저커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사회가 마침내 받아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