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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24. 2016

03. 진주보다 조개껍데기가 귀할 수 있다.

<천재의 생각법>

우리 사업은 유가를 예측하는 것과는 무관하고, 관심도 없다. 다만 이것이 우리 사업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줄지 연구할 뿐.
_ 로열더치셸 CEO 피터 보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석유 회사가 남들이 버린 조개껍데기 장사에서 시작되었다면 믿겠는가? 로열더치셸 석유의 상징이 200년이 넘게 조개껍데기 마크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 맨몸으로 온 영국 소년은 쇼난(湘南)의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는 어부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조개를 갈라 살만 파내어 담고 껍데기는 다시 내팽개쳤다. 모래밭에 나뒹구는 하얗고 반질거리는 조개껍데기를 보자마자 그의 머릿속에서 번쩍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조개껍데기를 진주로 발견한 사람, 로열더치셸 석유의 창업자 마커스 새뮤얼이다.
     
마커스 새뮤얼은 1853년 11월 5일 런던에서 11형제 중 열째로 태어났다. 마커스가 유대인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자 아버지는 무역업을 잇게 했다. 차에 잡화를 싣고 팔러 다니던 노점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3등 칸 배표를 사주고 여행을 보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당부했는데, 아버지가 나이가 들었으니 집에 있는 많은 식구를 위해 장사 거리를 궁리해 보라는 것이었다.
    

 
19세의 마커스는 배의 마지막 기항지인 일본의 요코하마 항에 내렸다. 마커스는 당시 막 문호를 개방했던 신천지에서 뭔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현실의 마커스는 믿을 만한 사람도, 마땅한 신용도 없는 혈혈단신 이방인일 뿐이었다. 
     
며칠 동안 뾰족한 대책 없이 요코하마를 방황하던 마커스는 거저나 다름없는 조개껍데기를 주워다가 단추와 장난감을 만들었다. 또 당시 일본에 있던 공예품을 모방해서 옻칠한 조개껍데기로 장식한 작은 상자 등을 만들었다. 마커스는 그렇게 만든 물건을 아버지에게 보냈다. 곧 런던에서 마커스가 만든 상품들이 팔리기 시작했다. 장난감보다는 자잘한 물건을 담아놓을 수 있는 이국적인 상자가 인기를 끌었다.
     
마커스는 25세가 되던 해에 요코하마에서 본격적으로 마커스 새뮤얼 상회를 창업하고 일본에서 여러 가지 상품의 제작을 의뢰하거나 사들였다. 그러나 마커스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일본의 잡화를 영국에 수출하는 것 외에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생각했다. 그는 조개껍데기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분야야말로 큰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즈음 미국에서는 록펠러가 석유 사업에 뛰어들었고 러시아는 유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석유 시대의 막이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난방을 위한 연료로는 목탄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마커스는 거기에 착안하여 일본과 중국에 경유와 등유를 팔 것을 계획했다. 그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상회를 통해 주문자 위탁 생산(OEM) 상품을 영국으로 보냄으로써 상당한 목돈을 모아놓고 러시아와 거래하기로 한 상태였다. 관건은 세계 각지의 소비지까지 석유를 어떻게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는가였다.
     
당시 석유는 5갤런짜리 깡통에 담겨 운반되었는데 도중에 쓰러지기 일쑤였다. 혹시나 쏟아지기라도 하면 청소비용이 추가로 들었기 때문에 선주들은 석유 싣기를 꺼렸다. 그래서 석유 깡통들은 넘어지지 않도록 밧줄로 꽁꽁 묶는 까다로운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마커스는 깡통을 쓰러지지 않게 하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배를 통째 석유로 채웠다. 
     
배 전체가 하나의 떠 있는 기름 탱크가 되는 석유운반 전용선을 착안한 것이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유조선이었다. 마커스는 유조선을 ‘뮤렉스(뿔고둥)’라고 이름 지었다. 청년 시절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던 자신의 여명기를 기념하여 조개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뮤렉스는 기름을 가득 싣고 전 세계를 순조롭게 항해했다. 
     
어느 날, 러시아에서 출발하여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려던 뮤렉스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통과를 거부당한다. 이때 마커스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여 뮤렉스가 운하를 빠져나갈 때까지 다른 배들을 통제할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 할증요금을 내기로 합의하고 뮤렉스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한다.
     
당시 마커스는 석유 공급을 러시아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에 불안을 느꼈다.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산 석유를 외국 배가 운반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눈을 돌렸다. 마커스는 이미 소규모 유전이 가동되고 있었던 인도네시아의 유전 개발에 투자했다. 마커스가 발굴한 이 유전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이었다. 
     
한편, 그는 8척의 유조선을 잇달아 발주, 건조하였고 이 배들은 세계 최초이자 최대 유조선단이 되었다. 그 무렵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유조선의 대부분이 새뮤얼의 유조선들이었으니 그의 유조선단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짐작된다.
     
마커스는 1897년 셸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유조선산업 출현이었다. 마커스의 석유 사업이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영국인들 사이에서 유대인이 석유 산업에서 군림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발이 높아졌다. 이에 그는 결국 회사를 네덜란드와 영국의 자본인 로열더치에 매각하고 합병하기로 한다. 사실 로열더치의 자본 대부분은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이때 회사의 이름은 ‘로열더치셸’로 바뀐다. 
     
그는 회사를 매각 합병하면서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그 하나는 소수 주주라 하더라도 반드시 마커스의 혈통을 이은 사람을 임원에 앉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업 발상의 역사적 상징으로 조개껍데기 마크를 영원히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00년간 변하지 않은 조개껍데기 마크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일견 조개껍데기와 석유 산업이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조개껍데기는 그가 발견한 ‘진주’였다. 아무도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마커스는 조개껍데기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다. 지금도 셸 석유 영업소에는 그의 조건대로 조개껍데기 마크가 걸려있으며, 로열더치셸의 유조선에는 조개의 종류를 이름으로 붙이고 있다. 
     
마커스는 유럽과 아시아의 석유 시장을 석권하여 ‘석유의 나폴레옹’ 또는 ‘유럽의 록펠러’로 불린다. 마커스가 석유로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시대가 석유를 필요로 하게 된 시대적인 행운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그의 선견지명이었다. 그는 일본과 중국에서 아무도 연료로 생각하지 않았던 석유를 팔았고, 석유 깡통이 배에서 쏟아지자 아예 배를 석유로 채울 생각을 했다. 러시아에서의 석유 판매 활로가 막히자 아예 유전 개발에 투자하여 다른 길을 찾았다.
     
장사란 가치를 파는 일이다. 원하는 사람이 많고 물건이 적으면 가치가 오른다. 마커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장사꾼이었다. 그는 조개껍데기를 진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막힌 벽을 뚫는 것이 아니라 벽이 없는 길을 찾았다. 그는 사업가로 그치지 않고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바 있으며 1902년 49세 때에는 런던 시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마커스 새뮤얼은 어려웠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런던으로 피난 온 가난한 유대인 집안의 아들이었다. 낯선 땅에 도착해 해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던 시절, 내 주머니에는 아버지에게 받은 5파운드밖에 없었다. 나는 그날 양손에 5파운드와 조개껍데기를 움켜쥐고 이날을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내가 지금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날의 기억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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