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생각법>
헨리 키신저는 1923년 독일의 정통파 유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서전 속에서 어릴 때 매주 아버지와 함께 공부했다고 밝혔다. 이때의 습관으로 키신저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무리 바쁘더라도 시간을 쪼개 하루에 15분씩 탈무드를 공부했다. 그의 아버지 루이는 교사였으며 가족들이 사는 아파트 다섯 개의 방은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치의 광풍이 심해지면서 아버지는 교직에서 쫓겨나고 키신저도 퇴학을 당한다. 그 후 키신저가 14살이 되던 해까지 14명의 친척이 나치의 손에 의해 학살되었고 키신저 일가는 1938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1943년 미국 국적을 취득한 키신저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전쟁이 끝나자 1954년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 정치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57년 『핵무기와 외교 정책(Nuclear Weapons and Foreign Policy)』, 1960년 『선택의 필요성(The Necessity for Choice)』을 출판하면서 미국 전략 정책의 권위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1968년 12월 닉슨에 의해 국가안보 보좌관에 임명되고 후에는 국무장관으로 있으면서 닉슨과 포드, 두 대통령의 외교 정책 수립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포드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키신저가 대통령의 외교권을 거의 대신 수행할 정도로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전권을 행사했다. 그는 또한 유대인 최초의 미국 국무장관이었다.
소련과의 관계 완화(Détente)의 실마리를 찾아 1969년에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위한 회담을 제안하고 성사시켜, 미・소 양국의 미사일 기지 축소와 수량 제한을 합의하기도 했다. 1972년에는 극비리에 중국에 방문하여 굳게 닫힌 중국의 문을 열고 닉슨의 방중(訪中)을 성사시켰고, 1973년에 지금껏 강경하게 대응했던 베트남 문제를 유연하게 처리하여 미군 철수와 남・북베트남 정부의 평화 유지를 위한 기구 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휴전 협정의 기초를 다졌다. 같은 해 아랍-이스라엘 전쟁도 휴전으로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분쟁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러나 1975년 9월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시나이협정을 체결했고 이스라엘군은 극적으로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했다. 중동 문제 타결의 뒤 무대에도 키신저가 있었다. 이 협정에는 이스라엘의 부분적인 양보가 불가피했는데, 이때 미국은 보통 때보다 두 배에 가까운 원조를 약속했다. 키신저가 대통령을 설득한 결과였다.
그 무렵의 아랍 산유국들은 유류 가격 인상에 돌입했다. 불과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원유 고시 가격은 4배까지 폭등했다. 이 1차 유류파동으로 산유국들이 막대한 재정 수입을 쓸어모은 것에 비해, 선진국들은 경제 불황 속에서 물가 상승이라는 폭탄을 떠안아야 했다. 이때 키신저는 아랍권 국가들에 긁어모은 기름값으로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마련하고 건설하라고 설득했다. 아랍 국가들은 키신저의 의도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미뤄 놓고 국내 문제 해결에 힘썼다. 덕분에 중동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아랍 국가들이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들인 돈은 그 개발에 당연하다는 듯이 참여한 선진국들의 배를 불렸다.
결국, 키신저는 이 묘안으로 대외적으로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가져온 영웅이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측면에서 보자면 아랍 산유국의 오일달러도 회수할 수 있었다. 키신저는 이러한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또한, 2009년에는 한·미 관계 발전에 이바지한 인물에게 매년 수여되는 밴 플리트 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듯 키신저는 어느 한쪽에 분명히 유리한 결론을 내면서도 그 과정에 있어 상대가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방법을 찾아내는 절묘한 외교 정책을 썼다. 그는 1977년 퇴임한 이후에도 국제정치의 연구에 대해 평론을 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그는 국제문제 전문가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피로 얼룩진 키신저 외교의 그림자
키신저는 국무부가 통상적으로 행하는 절차와 그 경로를 무시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키신저 외교’를 진행하였다. 그는 국제 정세에서 이익과 손실을 면밀하게 계산했고, 국제 관계의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는 데서도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때로는 비난을 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베트남, 방글라데시, 칠레 등의 전쟁과 분쟁에 개입한 일로 비판을 받는다. 1963년 3월, 베트남 전쟁 말기에 있었던 미군의 캄보디아 비밀 폭격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기도 한다. 시민단체의 회원 칼 깁슨은 “키신저는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주권국가를 불법 폭격해 그 정부를 무너뜨렸으며, 폭력적인 독재정권이 권력을 잡도록 허용했다. 이것이 중죄가 아니라면 무엇을 그렇게 불러야 하는가?”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키신저는 1973년 칠레에서 쿠데타를 지원하여 좌익 성향이었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를 했다. 그 결과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와 밀접하게 교류했다. 하지만 당시 노동조합원과 학생, 예술가 등 군사 정권에 반하는 인물로 지목된 사람들은 피노체트에 의해 감금, 고문 되고 끝내는 살해되었다.
또한, 1975년 12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함께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독립을 주장하던 동티모르를 침공하도록 승인한 것도 키신저였다. 1970~1980년대 남미 각국에는 군사 정권이 집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반체제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이웃 나라로 피신하는 일이 잦았다. 이들을 색출하고 검거하는 공동전선을 ‘콘도르 계획’이라 했는데, 키신저는 여기에도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선과 최악 사이에서 균형을 지킨 키신저
동전이 양면을 가지듯 상황과 문제, 그 조건에 따라 양면적인 전략을 짜고 관리했던 키신저는 그만큼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양극단에 있는 평가는, 그가 그야말로 차가운 0도부터 뜨겁게 끓는 100도까지 변화무쌍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는 증거다. 그가 지켰던 신념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국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미국 국익’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했다고 밝혀 왔다.
미·소 관계 완화를 위해 힘쓴 것과 중국의 문을 열기 위해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한 것은 당연히 국익을 위해서였으며, 칠레를 독재자의 손에 넘긴 것과 선전포고 없이 캄보디아를 공격한 것도 모두 국익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실 적도 아군도 없었다. 그는 어제의 적을 오늘의 아군으로 끌어들이기도 하고 오늘의 아군을 내일 내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키신저에게 100% 확실한 것은 없었다. 승리를 위해 체스판의 말을 움직이듯 그가 바라는 이익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었다. 단 하나의 기준을 지키며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키신저의 외교술은 최선을 거머쥐지는 못할지라도 최악을 피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