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권오갑 박사.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21회를 거쳐 줄곧 과학기술부에서 근무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과학기술정책학 박사로 참여정부 초대 과학기술부 차관을 역임했다. 경기 고양시 출신이며 열린우리당이 영입한 정부 고위인사로는 최초로 고양 덕양(을) 경선에 나서서 최성 후보에게 패배했다. 2004년 4월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되어 3년 임기를 잘 마쳤다. 2010년 10월에는 교육과학기술부와 경기도가 지원해 설립한 한국나노기술원의 3대 이사장으로 추대됐다. 2015년 2월, 과학기술계에 근무한 700여 명의 고경력 과학기술자들이 모인 과우회 회장에 선출돼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금동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책임연구원.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스탠퍼드대학에서 재료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정부의 해외 과학자 유치사업에 자원해 1985년 KIST에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KIST에서만 잔뼈가 굵은 대표적인 연구계 인사로,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연구기획관리단장, KIST 부원장 등을 역임했고 2006년 4월 내부 발탁 케이스로 KIST 원장에 취임했다. 2005년 전자현미경학회 회장, 2007년 대한금속·재료학회 회장, 2011년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2010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에 위촉됐다. 현재 KIST 연구위원으로 근무 중이다.
김병식 동국대 교수. 연세대 화학공학박사 출신으로 1979년부터 동국대에서 근무했다. 한국공학교육인증원 인증사업단장을 맡아 대학 공학교육혁신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과학기술훈장 진보장을 수상했다. 8~9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과학기술기반확충분과위원장 및 2004~2006년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재임 중 동국대 부총장 승진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 2006년 과학기술부 산업기술연구회 이사, 2007년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 2008년 광주과학기술원 이사 등 정부 일에 계속 참여했다. 탁월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2009년 초당대학교 총장에 초빙되었으며 2013년 연임됐다. 현재 명예 총장으로 재임 중이다.
박창규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력수소사업추진단장. 서울대 원자력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건대에서 원자력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9년 원자력연구소에 입소해 원자력안전연구부장, 응용연구그룹장, 미래원자력기술 개발단장, 선임단장 겸 신형원자로개발단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2005년 4월 내부 승진 케이스로 16대 원자력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소장 재직 중 3대 한국원자력국제협력재단 이사장에 당선되었고, 대덕연구개발특구기관장협의회 회장과 한국위험통제학회 회장에도 선출됐다. 정권이 바뀐 2008년 5월에는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에 임명돼 3년 임기를 잘 마쳤고 현재는 포스텍 초빙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송하중 경희대 행정대학원장.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으나 ‘전공’을 바꿔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하버드대에서 정책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한국행정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거친 행정개혁 전문가이며 1996년부터 경희대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민의정부 시절 정책기획위원회 위원과 행정개혁위원회 위원 등으로 정부 자문활동에 참여했다. 참여정부 때도 8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과 행정자치부 인력운영자문단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05년 8월 참여정부 3대 정책기획위원장(장관급)에 임명됐다. 행정학 교수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2010년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 됐다.
오세정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 경기고 수석 졸업, 예비고사 수석, 서울대 수석 입학(물리학과 71학번) 등 ‘3관왕’ 출신으로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자격시험 1등까지 휩쓴 수재다. 1984년 모교 교수로 부임해 연구에 전념하며 1998년 한국과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다 돌연 과학행정가로 변신했다. PBS(연구과제중심제) 제도가 연구활동을 방해하고, BK21사업은 SCI논문 게재건수로 연구실적을 평가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국민의정부 시절 학술진흥재단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등에 참여, 정부의 과학정책을 바로 잡는 일을 해왔다. 참여정부에서도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8~9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교육부 BK21사업단 기획위원장 등을 맡았다. 2011년 11월 이명박 정부에서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을 거쳐 5년 임기의 기초과학연구원장에 임명됐으나 2년 만에 모교 총장직 도전을 위해 사퇴했다. 2015년 말에는 과학기술 분야 시민운동단체인 ‘바른 과학기술 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 상임대표로 선출됐다. 2016년 총선 때는 과학기술혁명을 표방한 국민의당(비례대표)에 영입돼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윤정로 KAIST 교수. 박창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과 부부 사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KAIST에서 과학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다. 2001년 6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을 시작으로 한국과학재단 이사,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이사 등 과학기술 분야에서 활발한 정부 자문활동에 참여해왔다. 2014년 말에는 한국기초과학연구원 이사로 선임됐다. 2006년에는 여성 최초로 KT이사회 의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과학기술과 한국 사회》 《남성의 과학을 넘어서》 《과학기술 정책수단의 사회제도화 과정》 등 과학과 사회학을 접목한 여러 권의 저서를 펴낸 융합형 학자이다.
최영락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원장. 과학기술계의 대표적인 비주류이다. 서울대 임학과와 행정대학원을 나왔다. 덴마크 로스킬드대학에 유학, 과학기술정책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귀국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정책기획실장 등으로 일했고 2002년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원장에 임명됐다. 참여정부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8~9기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과학기술혁신본부 본부장(차관급) 물망에도 올랐다. 2005년 4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등 8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담당하는 공공기술연구회 이사장에 임명됐다. 2013년 2월부터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과학기술부 자문관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8명은 일명 ‘이사모’ 즉 ‘이인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구성하는 핵심 멤버들이다. 전직 차관부터 대개 차관 출신이 낙하산(?)으로 가는 정부 산하 기관장, 그리고 장관급 직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성들을 보면 이인식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그의 팬덤까지 구성됐을까 궁금해진다. 과연 이인식은 누구인가?
2004년 2월 23일 나는 인사수석실 발령을 받았다. 전입인사를 하러 인사수석실에 들어서니 정찬용 수석이 전화번호가 담긴 메모지를 내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이인식 소장이 작성한 것이었다. 정 수석도 과학기술계 인사가 매우 불편부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다각도로 고민하던 중 새로운 행정관인 나를 투입, 업무를 맡기려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문대학 출신으로 정치권에 들어와서도 정무 내지 조직업무에만 익숙했던 터라 사실 과학기술분야 인사에 대해서는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이튿날 광화문 <조선일보> 인근 2층 커피숍에서 ‘과학문화연구소 소장 이인식’이라는 명함을 처음 건네받았다.
우리나라 나이로 예순, 초로의 신사는 매우 빠른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첫째, 정치과학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에만 매진해야 하는데 자그마한 기관장 감투 하나라도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인다. 과학기술부 산하에만 무려 30여 개 기관장 자리가 있는데, 대부분 정치과학자들 차지다. 이는 정권이 바뀌어도 전혀 시정되지 않는다. 둘째, 패거리문화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분야별로 계보가 너무 많고 연구비, 보직 등을 둘러싼 암투가 횡행한다. 투서를 가장 많이 하는 집단이 바로 과학기술자들이다. 셋째, 정부 출연 연구소 과학자들은 코스트 개념이 없다. 수조 원의 국민 혈세를 물 쓰듯 한다.”
생각보다 과학기술계는 심각했다.
오래전부터 정치과학자들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이인식 소장과 과학기술분야 인사개혁 미션을 부여받은 나는 이날부로 의기 투합했고, 나는 이 소장을 개인적인 과학기술 인사 자문역으로 모셨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저너리(Visionary·비전을 제시하는 선지자)로 통하는 이 소장은 과학기술계뿐만 아니라 여타 분야에 있어서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누구든 이름만 대면 어느 신문, 어느 잡지에 국정철학과 찬성 또는 반대되는 칼럼을 기고한 사실을 짚었고 이는 청와대 ‘인사추천회의’의 ‘인물 평가서’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그런데 이인식 소장은 혼자가 아니었다. 성공적인 인생 2모작의 귀감으로 종종 소개되면서 적지 않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과학기술계의 꽤나 유명인사였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대표적인 이사모 인사들이고, 수십 명의 인사들이 그의 주변에 모였다. 나는 바쁜 청와대 업무 때문에 정기적 만남을 할 수 없었지만 이사모 모임에 자주 얼굴을 내밀었고 이 소장과 그 멤버들로부터 많은 인사정보들을 얻어들을 수 있었다.
이사모는 그 자체로도 과학기술 개혁인사의 데이터베이스(DB)였다. 장관(급) 1명,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관장하는 공공기술이사장 1명, 내부 승진 연구소장 2명, 과학기술부 산하기관장 1명과 각종 정부 자문위원회 위원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이밖에도 여성이자 지방대 교수 출신으로 참여정부 3대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으로 임명된 김선화, 지방대 박사학위 출신으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원장에 연임된 조영화 등 수많은 인사자문을 받았다. 또한 일개 3급 행정관이 감히 과학기술부총리에게 인사문제를 놓고 대들 수 있었던 것도 개혁인사를 바라는 이사모의 힘 덕분이었다.
1945년 해방둥이로 광주에서 태어난 이 소장은 광주서중과 광주제일고를 졸업했다. 6세 때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문학을 좋아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취직이 잘 되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진학을 선택했다. 1960년대 당시 전자공학과는 서울대에서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인기학과였다. 가정교사 등을 하면서 간신히 졸업장을 움켜쥔 그는 해군 통신장교로 3년을 복무한 뒤 럭키금성(현 LG)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눈여겨본 허진규 회장이 처남 김흥식(김황식 전 총리의 친형) 전무를 보내 1년 가까이 설득, 1982년 일진그룹으로 옮겨가 만 36세에 별(이사)을 달았고 컴퓨터 사업을 맡았다.
소설가를 꿈꾸던 문학청년은 대학 졸업반이던 1967년 <대학신문>에 단편소설이 입선되기도 했지만 취직과 동시에 꿈을 접었다. 그러나 1975년 7월 럭키금성 김용선 전무의 도움으로 <다섯 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 <누나를 위하여> 등 9편의 단편을 묶은 272쪽짜리 《환상귀향》(幻想歸鄕)이라는 창작집을 출간, 발매 1주일 만에 1쇄가 매진되기도 했다. 그는 타고난 천재 글쟁이였다.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온 건 1991년 가을,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우연히 미국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처녀작 《괴델, 에셔, 바흐》라는 책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논리학자 괴델, 화가 에셔, 작곡가 바흐가 서로 어떻게 지성적으로 융합돼 있는지 분석한 책이었다. 이 책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은 저자는 그와 동갑이었다. 1979년에 출간됐으니 34세의 나이에 대작을 내놓은 셈이었다.
동갑내기가 이런 명작을 쓸 때 뭘 하며 살았는가 하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덜컥 사표부터 냈다. 퇴직금을 몽땅 털어 1992년 7월 월간 <정보기술>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해외 기술 동향을 실시간으로 소개했는데,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영업부서에서 광고 수주를 하지 못해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이인식 소장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과학칼럼니스트 1호다. <정보기술>의 운영이 잘 안 되면서 부업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글쓰기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던 터였다. 1992년 4월 <월간조선>에 첫 기명 칼럼을 썼다. 나노기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글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 과학자들은 나노기술을 웃기는 발상이라고 폄훼했다. 유비쿼터스 컴퓨팅, 인공생명, 신경컴퓨터 등도 모두 그가 국내에 처음 소개한 주제들이다.
그 후 <조선일보> 등 각종 신문에 530편, <월간조선> 등 잡지에 170편등 700편 이상의 고정칼럼을 연재했다. 2011년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의 월간지 <PEN>에 나노기술 칼럼을 연재해 국제적인 칼럼니스트로 인정받기도 했다. 저서는 47종(기획 공저 14종 포함)이 있으며 중·고교 교과서에 20여 편의 글도 수록됐다. 제1회 한국공학한림원 해동상,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2006년 <과학동아> 창간 20주년 최다 기고자 감사패, 2008년 서울대 자랑스러운 전자동문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소장은 1995년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해왔다. 월 고정급여 한 푼 없이 오로지 인세, 원고료, 강연료 수입만을 가지고 두 아들의 대학 학비를 댔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에만 만연한 학위 없는 설움도 톡톡히 당했으나 이를 실력으로 당당히 극복해냈다. 그는 새벽 3시 반이면 어김 없이 잠에서 깨어나 뉴욕과 런던, 그리고 베를린 등지에서 일어나는 세계 최첨단 과학기술 동향을 실시간으로 점검한다. 더불어 과학기술과 나란히 가는 세계경제의 흐름까지 일목요연하게 살피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비록 그에게는 서울대 학사학위가 전부지만, 대학원생들 논문에 숟가락을 얹는 일부 몰지각한 교수들보다는 열 배 백 배 실력을 더 인정받는다. KAIST가 그에게 겸직교수 대우로 모셔서 꽤 오랫동안 ‘융합’에 대해 강의하도록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은 “공부도 잘 안 하는 학부 학생들에게 기대할 것이 별로 없고 대전까지 왕복하기 힘들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융합에 대해 KBS 1TV 50분 강연 등 정부기관, 학교, 연구소, 기업 등에서 250회 강연활동을 펼쳐 국내 유일의 ‘융합전도사’로 불리기도 한다. 참으로 기인은 기인이다.
나는 이인식 소장의 천재적인 능력을 아깝게 여겨 8대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추천했다. 2004년 6월 30일 이 소장은 과학기술부장관과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각각 부의장과 간사위원으로 참여하는 자문회의에 노무현 대통령(의장)으로부터 민간위원 위촉장을 받았다. 그는 유일한 비박사·비전문가 케이스로 발탁되었지만, 5개 분과 중 선임분과인 과학기술발전전략분과의 첫 자리에 이름을 올려놓았다. 노 대통령은 이날 위촉장 수여식에서 “과학기술혁신정책을 통해 미래경쟁력에 대한 승부를 걸어보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생각”이라며 “자문회의는 과학기술혁신을 위한 전략과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생산해 변화의 견인차 역할을 해달라.”라고 당부했다. 2005년에도 이인식 소장은 9기 자문위원에 연임됐다.
2008년 《지식의 대융합》을 발간한 이 소장은 ‘지식융합연구소’로 명함을 바꾸었다. 이때까지도 박사학위는커녕 대학원 문턱도 가보지 않은 그가 과학기술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고, 교수들보다 먼저 새로운 과학 흐름을 소개한다고 해서 많은 배척을 당했다.
미국의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펴낸 《컨실리언스》(Consilience)가 2005년 우리나라에 《통섭》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출간되면서 통섭은 융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인식 소장은 이에 대해 2014년 김지하 시인, 이남인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통섭과 지적 사기》라는 책을 출간, 공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를 출간하고, 청색기술연구회를 결성했다. 직접 작명한 ‘청색기술’에 대한 저작권 등록까지 완료했다.
2015년 10월 공학기술 전문가 1,000여 명으로 구성된 한국공학한림원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이에 맞춰 공학한림원은 ‘2035년에 도전한다’는 제목으로 20년 뒤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20대 신기술을 선정했다. 콧대 높은 박사들이 즐비했지만 이인식 소장이 바로 그 신기술 시나리오를 맡았다. 그는 결코 쉽지 않은 이 작업을 혼자서 진행했다. 20년 집필활동을 하면서 축적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20년 후의 미래사회 시나리오 원고를 단 3주 만에 완성한 것이다.
이인식. 융합기술과 현상파괴적 기술, 게임 체인저 기술, 미래기술(인공지능 등) 등 포스트휴먼 사회를 예측해온 그의 지식과 열정, 그리고 뛰어난 상상력은 어떤 과학자도 넘을 수 없는 최고 경지에 도달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