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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Nov 30. 2016

09. 영혼이 없는 고위공무원들_정홍원 국무총리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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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 3일,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는 당시 국정홍보처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한 인수위원이 “노무현 정부의 취재 선진화 방안이 언론과 불필요한 마찰을 불러일으켰다.”며 “청와대 지시에 따른 것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담당자가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이라고 답변해서 보고를 받던 인수위원들이 아연실색했다. 당시 김형오 인수위 부위원장은 “공무원은 신분이 보장된다. 기능은 조정이 되겠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대안을 만들어서 같이 해보자는 건데, 대한민국 공무원이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되겠느냐?” 하며 안타까워했다. 물론 ‘영혼이 없는 공무원’은 특정 정부에만 있었던 일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정권 교체기에 고위공무원 사이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제 하에서 관료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일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자신들의 입장을 변명하는 말로 흔히 인용되는, ‘관료는 영혼이 없다.’는 말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일찍이 언급한 바가 있다. 베버는 ‘관료제는 개인감정을 갖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 ‘상하관계라는 합리적인 권위구조와 비인격적인 규칙과 절차에 따라 움직인다.’고 했다. 즉, 관료란 정밀기계의 부품처럼 언제 어디서나 다른 관료로 대체·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으므로 바뀐 정부의 철학에 따라 일을 해야 하는 게 그들의 숙명이라고 설파했다.

그렇지만 공무원도 ‘영혼’이 있어야 한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지시한 일이 늘 합법적이라거나 성공 확률 100%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무조건 복종한다면 영혼 없는 로봇이나 기계 부품에 다름이 없다. 그것은 양심을 팽개치는 행위이고 상식을 저버리는 일탈이다.


민주정부에서 보수정부로

김대중 정부 검사장, 노무현 정부 고등검사장과 장관급 중앙선관위 상임위원, 이명박 정부 공공기관장, 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총리 2년 등 4대째 정부를 거치며 승승장구한 정홍원은 출세만을 좇아온, 영혼이 없는 고위공무원의 표상이다.

정홍원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사시 14회에 합격했다. 2004년 퇴직 때까지 이철희·장영자 부부 사기사건, 대도 조세형 탈주사건, 국회 노동위 돈봉투 사건, 한보 비리사건 같은 대형사건을 처리하면서 명성을 얻은 ‘특별수사통’ 검사였다. 1999년 서울지검 남부지청장 시절, 국회 내 안기부 사무실로 지목돼온 본청 529호실에 대한 한나라당의 난입사건을 지휘했는데, 수사 도중 검사장으로 승진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그 후 부산지검장으로 근무하면서 훗날 참여정부 실세로 등장하는 부산지역 새천년민주당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러한 PK인맥 덕분인지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대대적인 검찰 인사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그만은 살아남았다. 검찰 항명 파동을 불러온 강금실 법무장관의 인사쇄신안에 사시 14회 중 유일한 고등검사장 발탁 대상자로 정홍원이 있었다. 총장 바로 아래 기수인 13~14회에 검사장이 13명이나 있었는데 13회는 전원을 용퇴시키고 14회는 정홍원만을 구제한 것이다.

1년여가 흐른 2004년 5월, 정홍원은 관례에 따라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 용퇴를 했다. 그러나 만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청와대는 중앙선관위 위원으로 그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임명직 위원이 상임위원을 맡는 관행에 따라 곧바로 상임위원에 선출됐다. 중앙선관위원장은 대법관이 겸직을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장관급 상임위원이 사실상 위원장 역할을 대리한다. 그만큼 막강한 자리이다.

2006년 9월 정홍원 위원은 중앙선관위원장 상임화를 골자로 한 선관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가 지연되고 있는 것과 관련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손지열 위원장과 함께 사표를 냈다. 이때는 이미 정상명 검찰총장의 임기가 한창이었고 새로운 법무장관이 임명된 직후였기 때문에 더 이상 자리 욕심도 없었다.

한동안 법무법인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권토중래를 꿈꾸던 정홍원 변호사는 이명박 정부 출범과 동시에 초대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에 임명됐다. 법률구조공단은 무료 법률상담, 무료변호 등을 담당하는 공공기관이다. 당시 이사장의 월봉은 수당 및 성과상여금 등을 다 합쳐도 975만원에 불과했다. 후일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공개한 그의 재산내역을 보면, 법무법인 소속 변호사로 2년을 근무하면서 월평균 약 2,800만원의 공식 소득을 올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 그가 3분의 2가량이나 되는 수입의 감소를 감수하고 작은 감투를 왜 맡았을까? 그것은 바로 검찰총장 또는 법무장관 자리를 노리고 봉사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년 임기를 꼬박 채웠지만 끝내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다 뜻밖의 찬스가 찾아왔다. 2012년 1월 말,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에 의해 새누리당 공천위원장에 발탁된 것이다. 이틀 후 <한국일보>는 박근혜 위원장의 법조계 원로 조언그룹에서 그를 추천했다고 보도했다. 그 원로는 다름 아닌 김기춘 전 법무장관이었다. 그는 정홍원의 경남중학교 5년 선배로 1987년 법무연수원장과 기획과장으로 호흡을 맞춘 사이였다. 또 1992년 대선 당시 부산 초원복집 사건의 주인공 중 하나인 김기춘에 대한 수사를 총괄한 사람이 바로 서울지검 특수1부 정홍원 부장이었다.

2013년 민주당은 정홍원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인사청문회 발언대에 세우면서 매섭게 추궁했다. 인사청문특위는 경과보고서에 “전관예우 의혹, 위장전입 및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불성실한 자료 제출로 충분히 해명되지 못한 점 등은 국무총리로서 미흡하다.”며 부적격 의견을 함께 포함시켰다. 모두 10년 전 참여정부 때 충분히 검증했던 내용들이다.

정홍원은 1989년 부산지검 동부지청 특수부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들이 모두 부산으로 주거를 옮겼는데 본인만 서울 누나 집으로 주소를 옮겨 국민주택 청약 1순위 자격을 유지했다. 실정법을 위반한 그는 결국 국민 앞에 공개 사과했다. 그는 또한 외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에도 시달렸다. 대학교 2학년 때인 1997년 현역 입영 대상인 1급 판정을 받았으나 디스크를 이유로 2001년에 병역 면제를 받았고 2006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디스크가 발병한 다음 책상에 앉아 장시간 공부가 필요한 시험을 준비한 셈이다.

참여정부에서 인사 검증을 담당했던 문태곤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은 2007년 3월 ‘국정브리핑’ 기고를 통해서 “인사검증 후 공직 탈락 사유 중 으뜸은 부동산 투기(22%)가 차지했고, 병역 문제도 10% 이상을 점유한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밝혔다. 그의 말을 빌리면 위장전입의 경우 두말할 것도 없이 ‘아웃’이었고, 병역은 우스갯소리로 헌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국민정서법’으로부터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여당이었던 때나 야당인 오늘날이나 공직자에 대한 인사검증 기준을 나름대로 일관되게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정홍원에 대한 부실검증 의혹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당시 법무부가 발표한 인사자료를 보면, 정홍원 신임 법무연수원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특수통으로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청렴한 생활로 주변의 신망이 두터운 편이다.”라고 돼 있다. 인사검증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참여정부 민정수석실이 크게 실수를 했거나 동향(PK)이라는 이유로 고의로 봐주기를 했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당시 추천자가 누구였는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만큼 인선이 특정지역 위주로 잘못 이루어졌다는 얘기다.


친김대중·친노무현에서 친이명박·친박근혜로

참여정부 당시 고위직으로 근무했던 많은 관료 출신들이 10년 민주정부가 끝나기도 전에 잽싸게 말을 갈아타기 시작했다. 관료의 특성 그대로 정권이 바뀐 뒤에 새로 취임한 대통령에 충성하기 위해서라면 모르겠지만, 정무직 장차관으로 임명해준 대통령 임기가 버젓이 남아 있는데도 차기 유력 대통령후보에게 줄을 대는 경우가 있었으니, 그것은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 아니라 변절한 공무원이다.

국민의 정부 마지막 재정경제부차관 윤진식은 행정고시 12회 출신의 유능한 재무 관료였다. 오랫동안 그를 눈여겨본 고건 총리가 제청해 참여정부 초대 산업자원부장관에 기용됐다. 하마평에는 전혀 오르지 않던 인물이었으니 의외의 발탁이었다. 그러나 부안 핵폐기물 처리장 추진과정에서 혼선이 발생하여 그 책임을 지고 취임 10개월 만에 물러났다.

그래도 참여정부는 그를 그대로 내팽개치지 않았다. 2004년 4월 국립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으로 임명해 4년 임기를 보장했으나 2007년 8월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이명박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 임기 도중 말을 갈아탄 것이다. 참여정부 장관 출신이 전향해 한나라당 대선주자 캠프에 합류한 것은 윤진식이 처음이었는데, 두고두고 화제를 낳았다. 이후 그는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 국가경쟁력강화특위 부위원장을 거쳐 한국투자금융지주 회장, 청와대 경제수석과 정책실장 등 요직을 섭렵했다. 한나라당과 새누리당 공천으로 18~19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50년 지기인 이시종 충북지사와 2014년 지방선거에서 겨뤘으나 낙선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초대 치안비서관을 지낸 허준영은 참여정부 이후 승승장구했다. 출신지(대구) 때문에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치안감을 달고도 중앙경찰학교 교장과 강원경찰청장 등 한직으로만 돌았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들어서자 청와대 치안비서관과 서울지방경찰청장을 거쳐 채 2년도 되지 않아 2005년 1월 꿈에 그리던 치안총수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2005년 말 농민시위 사망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찰청장직을 물러난 그는 언론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듬해 치러진 7월 재·보선 당시 한나라당에 공천 신청을 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임기제 경찰청장을 정치적으로 희생시킨 데 대해 강하게 반발하며 “근본책임은 여당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한나라당에서 일해야겠다.”라고 밝혔다. 청와대와 정부의 요직을 지낸 인물이 집권 기간 동안에 등을 돌린 돌발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이명박 대선 캠프에 참여해 2009년 코레일 사장에 취임했고 2012년 총선과 2013년 보궐선거 당시 새누리당 후보로 서울 노원(병)에 출마했다. 2015년 2월 보궐선거로 당선되어 옛 한국반공연맹 후신인 한국자유총연맹 회장을 맡았다. 1년 뒤 연임 도전에 실패하고 코레일 사장 재직 중 비리사건으로 구속되는 오점을 남겼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의 DNA는 새누리당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르겠다.

‘꼿꼿 장수’로 알려진 김장수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장관급 장군(대장)이었다. 육사 27기 출신인 그에게 대장 계급장을 달아준 것도, 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으로 발탁한 것도 참여정부였다. 참모총장에서 국방부장관으로 직행한 것은 창군 이래 1호였다. 육군참모총장 진급 때는 해군·공군 참모총장이 영남이었기 때문에, 국방부장관 발탁 때는 육군·공군 참모총장이 영남이고 해군참모총장이 충청 출신이기 때문에 지역배려를 받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장관 임기 종료 직후 여당으로 바뀐 한나라당에 입당, 비례대표 의원과 최고위원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2012년 대선에서도 박근혜 후보의 국방안보추진단 단장을 맡아 예비역 장성들을 이끌었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초대 국가안보실장(장관급)으로 중용됐으며 2015년부터는 다시 한 번 요직인 주중대사를 맡고 있다. 광주출생에 광주일고를 졸업한 그는 평생을 양지만 좇는 전형적인 영혼 없는 고위공무원의 본보기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외교부장관인 윤병세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안보정책수석 출신이다. 그의 청와대 재직 기간은 2006년 12월 1일부터 2008년 2월 24일까지이다. 경기고 서울법대 출신인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서강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와 김&장 법률사무소 고문 등으로 물러나 있었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후보 캠프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외교통일추진단장을 거쳐 대통령직인수위 외교국방통일분과 위원을 맡았다. 대통령 한 임기는 쉬었으니 그래도 염치가 있는 공무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관료보다 오히려 문제를 삼아야 할 것은 지식인의 변신, 아니 변절이다. 친노동자적 성향이 강한 인물로 분류돼온 김대환 인하대 교수는 서울대와 옥스퍼드대에서 노동경제학을 전공했다.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을 맡는 등 활발한 사회참여형 학자였다. 경북 김천 출신이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경제노동분과 위원장을 맡았으며, 참여정부 때는 대통령직인수위 경제2분과 간사를 거쳐 두 번째 노동부장관에 기용됐다. 그랬던 그가 2013년부터 박근혜 정부의 노사정위원장을 맡아 정부 주도 노동시장 구조개혁의 사실상 총대를 메면서 시민사회와 노동계로부터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에 합의한 한국노총이 4개월 만에 파기를 선언함으로써 그의 입지도 매우 옹색해졌다.

영남대 박사 출신 이인선 계명대 교수는 지방대 핸디캡을 안고 있었지만 식품미생물 분야의 전문적 식견과 다양한 지역연구 활동에 참여한 경험을 인정받은 맹렬 여성이었다. 중앙정부와 정치권에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구축하며 계명대 전통미생물자원연구센터를 우수한 연구개발조직으로 키워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마침내 지방대 여성교수 최초로 장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통령직속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민간위원에 위촉됐다. 2003년, 지방과 여성을 우대하는 참여정부 때의 일이었다. 이후 그는 기획재정부 지역특구위원회 위원을 거쳐 2007년 9월 제2대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원장 자리까지 꿰찼다. 2006년 5월에는 김선화 순천향대 공대 교수와 경합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될 뻔도 했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 출범에 따라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이 대부분 교체됐지만, 이 원장은 ‘영남’을 우대하는 인사에 편승해 임기를 잘 마쳤고 동시에 대통령소속 국가교육과학기술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2011년 계명대 대외협력부총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한 그는 7개월 만에 한나라당 김관용 경북지사에 의해 도 단위 1호 여성정무부지사로 발탁됐다. 2014년 11월, 직제 개편에 따라 경제부지사로 재임명되었고 2015년 11월 만 4년간의 경북도청 근무를 마치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2015년 12월 15일 새누리당 20대 총선 예비후보로 등록한 그는 우여곡절 끝에 여성우선 추천(단수 공천)으로 수성(을) 선거구에 출마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무특보를 역임한 무소속 3선 주호영 의원을 힘겹게 상대해야 했다. 선거공보에 박 대통령과의 인연을 내세웠으나 전략 미스였다. 대구·경북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친박 핵심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가 현장대책회의 등을 이끌면서 오히려 그는 10%가 넘는 차이로 무릎을 꿇었다. 이인선 교수는 총선 패배 이후 충격을 딛고 곧바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지역 언론에는 대구경북연구원의 신임 원장 물망에 오르내린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진 이인선 박사의 집요한 권력욕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아직 1959년생에 불과한 그의 열정은 여전히 왕성하다.

2015년 8월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직에서 명예 퇴직한 김태유는 서울대 자원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로라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부터 모교로 복귀해 공대와 기술정책대학원에서 강의와 연구를 병행했다. 박사학위는 경제학이지만 에너지·자원, 기술경제, 정보통신정책, 산업정책 등의 분야에 많은 논문과 저서가 있는 융합형 학자이다. ‘과학기술 중심사회 구축’을 주요 정책과제로 표방한 참여정부는 청와대에 정보과학기술보좌관(차관급) 직제를 처음 설치하고 적임자를 찾았는 데 마침 자원경제학회를 이끌며 기술혁신 등을 연구해온 김태유 박사는 좋은 재목이었다.

정순균 대통령직인수위 대변인은 김태유 보좌관이 “과학기술에 대한 소신이 확실하고 특히 여러 부문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정보기술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적임이라고 판단했다.”라고 설명했다. 1년간의 청와대 근무를 마친 이후에도 외교부 에너지자원대사, 방송통신융합추진위원회 정책·산업분과위원장, 대통령직속 국가에너지위원회 위원 등 참여정부는 그에 대한 갖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9대 총선 때 그는 뻔뻔하게도(?) 새누리당에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한다. 물론 보기 좋게 탈락은 했지만 결국 노무현 정부 최대의 인사실패 본보기가 된 셈이다.

이상 몇몇 인물만 살펴봤지만 민주진보에서 보수로, 친이(親李)에서 친박(親朴)으로, 아무리 정권과 정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명예욕에 권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지식인은 ‘사계절 지식인’이다. 사계절은 《사계절 사나이》라는 토머스 모어의 삶을 다룬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상아탑을 지키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지도 않는다. 더 이상 후학들에게 본보기가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붙여진 ‘지식인’이란 멍에는 이제는 덜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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