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Dec 07. 2016

04. 당도하다.

<생각이 나서 2>

그날은 길을 잃었다. 전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려는데, 수백 번은 오갔던 길이 갑자기 낯선 얼굴을 하고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바람에, 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달려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지만, 미로는 점점 깊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집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결국 큰길로 뛰쳐나가 택시를 잡았는데, 그러고도 한동안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날과 같은 곳에서, 그날과 같은 사람들과, 그날과 같은 코스로 마시고, 그날과 비슷한 취기를 안고, 그날과 비슷한 시간에 헤어져, 그날처럼 전철을 탔다. 그날과 달리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도착하자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이를테면 마음의 밀도라거나 감정의 온도 같은 것. 시간의 질감이라거나 공간의 촉감 같은 것. 가까스로 겨울의 심장에 당도했으니 이제 코코모를 들어야겠다.

봄은 슈베르트, 여름은 헤이든, 가을은 브람스, 그리고 겨울은 비치 보이스의 것이니.

매거진의 이전글 03. 무서운 일들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