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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06. 2017

03. 나 그리고 왓칭

<왓칭 수업>

세 번째는 제 이야기입니다.


방송국 초보 기자 시절, 그때는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지 않아 모든 기사를 원고지에 썼습니다. 그런데 한 선배가 빨간 볼펜을 집어 들더니 대뜸 제가 쓴 원고지에 대각선으로 큰 X자를 긋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건 영어식 기사야. 우리말 기사는 이렇게 안 써!”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완전 ‘헐!’이지요. 그런데 ‘이건 영어식’이라는 말을 한 걸 보니 아마도 제가 영어를 잘한다는 소문이 거슬렸나 봅니다. 지금이야 원어민 수준의 기자들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영어 잘하는 기자가 그리 많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촌티 줄줄 흐르고 어수룩해 보였던 제가 회사 영어시험에서 1등을 했다는 사실이, 엘리트 의식 강했던 그 선배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선배는 유난히도 저를 싫어했습니다. 다른 후배 기자들과는 반갑게 말을 주고받으면서 제가 인사를 하면 못 본 척하곤 했지요. 아마도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싶었나 봐요. 하지만 그럴수록 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덕분에 몇 년 지나자 회사에서 인정받는 기자가 될 수 있었어요. 그러자 그 선배는 더욱 저를 싫어했습니다.

한 번은 제가 쓴 기사를 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이거 어디서 보고 베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베낀 것도 아니고 완전 엉터리로 베꼈어.”

저로선 기가 막힐 일이었지요. 열심히 취재해 작성한 기사를 베낀 거라니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저는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열심히 일할수록 그 선배는 저를 더 미워했고요.

악연은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할 때 공교롭게도 그 선배가 제 후임자로 워싱턴에 오게 되었어요. 보통 임무 교대 기간은 2주인데 그 선배는 무려 한 달 전에 왔지요. 저더러 앞당겨 한국에 돌아가라는 노골적인 압박이었던 겁니다. 그런 압박을 주면서 오자마자 딱 한다는 소리가 기가 찰 말이었어요.

“네가 열심히 취재해서 기사를 써놔. 방송은 내가 할 테니까.”

세상에! 힘든 일은 제가 뒤에서 다하고, 자신은 TV에 얼굴을 내밀고 생색을 내겠다니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위계질서가 엄격한 기자 사회였고 저 또한 소심한 성격이었기에 선배와 맞짱을 뜨진 못했지요.

저도 처음에는 저를 괴롭히는 그 선배를 똑같이 싫어하기만 했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지내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관점을 바꿔보기로 했지요. 그 선배가 나와는 잘 맞지 않았지만, 회사의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에 선배의 장점이 무엇인지 찾아보았어요. 그 선배에게서 제가 배울 점을 건져낼 수 있는지 찾아보기로 한 겁니다.

우선 그동안 그 선배가 쓴 기사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받아들이기는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대체로 선배의 기사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잘 쓴 기사였어요. 또한 방송으로 나갈 때 멘트 전달도 확실했지요. 방송 기자로선 정말 배울 점이 있었던 겁니다. 저에게 비판과 비난을 보내던 모습이 그 선배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됐고요.


이를 계기로 저는 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다른 선배들이 쓴 기사들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초보 시절 선배가 내 기사에 X자 표시를 했던 것은 과한 행동이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어쩌면 한글 표현보다 영어 표현에 더 익숙해 있던 시기였습니다. 모든 걸 제쳐두고 영어 공부에 몰입해 있던 때였거든요. 이후 저는 글쓰기에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되었고, 그 노력이 쌓여 단지 기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여러 권 집필한 작가가 되었습니다.

남의 비난을 단지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바라보면 나는 피해자가 됩니다. 반면 생각을 바꾸어 남의 비난 속에서 나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진실의 알갱이들을 찾아내겠다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성장이 이루어지지요.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현실이 바뀝니다. 이 불변의 진실이 바로 ‘왓칭’입니다.

직장은 생존의 싸움터라 온갖 인간관계의 갈등이 내재된 지뢰밭이기도 합니다. 특히 상사와 갈등이 생기면 하루하루가 지옥이지요. 그래서 직장인들은 늘 두렵고 불안해요. 나도 모르게 마음을 닫아버리게 되고 나만의 시각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왓칭은 닫힌 마음을 열고 나만의 시각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갈등의 원인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지요. 갈등의 원인이 바깥에 있다고 여기면 남들의 눈치를 보게 되고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게 될 수밖에 없어요. 거꾸로 갈등의 원인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남에게 휘둘릴 일이 사라져요.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거지요. 참다운 자유인이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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