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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13. 2017

02. 환경에 억눌리지 마라.

<최후의 승자가 되라>

사서에 유방 부친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태공’으로 기록된 것은 그가 원래 극히 한미한 평민 출신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는 유방의 모친 이름에 대한 기록을 보면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사기』 「고조본기」는 유방 모친의 이름을 유오(劉媼)로 기록했다. ‘유씨 집안의 아주머니’라는 뜻이다.

     
「고조본기」에 유방의 단골 술집 여주인의 이름 왕오(王媼)가 나온다. 현대 중국어의 발음은 ‘아오(ao)’다. ‘아오’와 짝이 되는 것은 ‘옹(翁)’으로 현대 중국어의 발음은 ‘웡(wēg)’이다. 유방의 부친도 ‘유씨 집안의 아저씨’라는 취지에서 ‘유옹(劉翁)’으로 기록하는 게 타당하다. 그런데도 거창한 명칭인 ‘태공’의 이름을 붙인 것은 유방이 진시황의 진나라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천하 통일을 이룬 한나라의 건국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나라 때 건국 시조의 부친을 ‘유옹’이라고 부르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기』를 쓴 사마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태공’의 존칭을 사용해 기록했다.
     
그렇다면 유방의 모친인 ‘유오’는 왜 ‘태공’과 같은 존칭을 덧붙이지 못하고 ‘아주머니’의 뜻에 불과한 ‘오’를 붙인 것일까? 유방의 부친에게 ‘태공’의 존칭을 덧붙인 것에 균형을 맞추려면 그의 모친 역시 주문왕의 모친인 태임(太妊)이나 부인인 태사(太姒)의 존칭을 사용해 ‘유임’이나 ‘유사’로 기록하는 게 그럴듯하다. 더구나 ‘유임’이나 ‘유사’ 등의 존칭을 덧붙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본학자 사다케 야스히코는 나름 그럴듯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자신의 저서 『유방』에서 유방의 모친을 ‘유오’로 기록한 것은 ‘유오’가 그의 생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생모가 일찍 죽은 까닭에 계모로 들어온 여인에게 ‘유임’이나 ‘유사’ 등의 존칭을 덧붙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사다케 야스히코는 자신의 추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패공이 기병하여 야전을 치를 때 그의 모친을 위나라 수도 대량 부근의 소황에서 잃었다.’는 내용의 『진류풍속전(陳留風俗傳)』 기록을 근거로 제시했다. 기병할 당시 유방은 소규모 반란 집단의 우두머리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모친은 ‘유오’로 불렸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즉위한 이후까지 살아 있었기에 ‘태공’이라는 존칭을 얻었다고 분석했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가 역사의 중심이다.

모든 왕조는 창업 이후 곧바로 수성(守成,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일을 이어서 지킴)의 단계에 들어서게 마련이다. 이때 어김없이 부자지간 또는 형제와 숙질 사이에 하나밖에 없는 보위를 놓고 피가 난무하는 사투가 전개된다. 사서의 기록에 비춰볼 때 가장 먼저 등장한 부자지간의 혈투로는 주유왕과 주평왕 사이의 갈등을 들 수 있다.
     
『사기』 「주본기」에 따르면 주유왕 3년인 기원전 779년에 후궁인 포사가 아들 백복을 낳자 주유왕은 태자 의구를 폐위시키려 했다. 이로 인해 주유왕 11년인 기원전 771년에 혈전이 벌어졌다. 주유왕과 백복은 북방 민족인 견융에게 피살되고, 포사는 전리품으로 잡혀갔다. 태자 의구가 주평왕으로 즉위하면서 지금의 서안 부근인 호경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주나라의 동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주나라는 동천 이전의 서주, 동천 이후의 동주로 나뉘게 된다.
     
사서에 주유왕이 전례 없는 폭군으로 기록된 것도 폐위 위기에 몰렸던 태자가 보위에 오르며 낙양으로 천도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태자 폐위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부왕은 혁대 고리를 훔친 ‘절구자’와 유사한 폭군, 태자는 나라를 훔친 ‘절국자’와 닮은 성군으로 규정된 셈이다. ‘절구자’와 ‘절국자’의 갈림길이 창업 과정의 승자와 패자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수성 과정의 부자지간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사서에 수록된 이전 왕조와 정권에 대한 기록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사서 기록의 행간을 읽어야 역사적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 왕조 내지 새 정권이 들어서면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통상 두 가지 책략을 예외 없이 구사한다. 첫째, 앞선 왕조나 정권을 가차 없이 매도하는 것이다. 둘째,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면서 작은 사안도 크게 부풀려 미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온갖 종류의 항설이 무차별적으로 인용돼 훗날 신화와 전설로 굳어진다.     

‘무엇을’ 먹고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라.

주목할 것은 대다수의 사가가 거의 예외 없이 새 왕조에 아부하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역사의 아버지’를 뜻하는 사성(史聖)의 칭송을 들은 사마천은 한고조 유방을 일방적으로 미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승자인 유방의 사적을 그린 「고조본기」 앞에 패자인 항우의 전기를 담은 「항우본기」를 수록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로 첫머리에 나오는 “유방은 사람이 어질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했고, 성격이 활달했다. 늘 큰 포부를 품고 있었던 까닭에 일반 백성처럼 돈을 버는 생산 작업에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는 대목은 유방을 크게 미화한 것도 아니다. ‘사람이 어질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는 대목 정도만 약간 미화한 느낌이 있고 나머지 대목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요약해 묘사한 느낌이 강하다.
     
특히 ‘일반 백성처럼 돈을 버는 생산 작업에 얽매이려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이는 요즘 버전으로 해석하면 정시에 출근해 정시에 퇴근하는 회사원의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대목의 중요한 메시지는 유방이 먹고사는 문제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기』의 전체 내용에 비춰볼 때 한고조 유방의 삶은 ‘건달’에 가장 가까웠다. 빈한한 집안 출신 유방이 이처럼 ‘건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나중에 얻은 정실 부인 여씨의 집안이 크게 부유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는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내조나 외조를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입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지속해서 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고조 유방이 보여 준 ‘건달’의 삶은 통상적인 의미의 ‘건달’ 행보와 달리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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