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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16. 2017

03. 지위가 아닌 사람을 보라.

<최후의 승자가 되라>

호족 출신 아내를 맞은 미관말직의 유방

유방이 장년이 되어 맡은 일은 정장이다. ‘정장’은 10리마다 세워진 ‘정’의 치안과 소송을 담당한 관원을 말한다. 요즘으로 치면 파출소장과 역장을 합쳐놓은 자리에 가깝다. 그가 떠맡은 ‘정’은 패현이 속해 있는 사수군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수정이었다. ‘건달’ 경력이 규모가 큰 정의 정장으로 임명될 때 유리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는 당시 아전의 우두머리로 있던 소하(蕭何)의 천거 덕분에 정장이 되었다. 소하는 사수정의 상급 기관인 사수군의 호족 출신이다. 그는 같은 호족으로 있던 조씨와 가까웠다. 유방은 조씨 집안 여인을 부인으로 두고 있었다. 소하가 유방을 천거한 것은 조씨 집안이 사위를 위해 평소 친하게 지내는 소하에게 적극적으로 부탁했을 가능성이 크다.
     
유방과 조씨 집안 여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훗날 제왕에 봉해진 유비(劉肥)이다. 유방이 조씨 집안 여인과 정식으로 혼인하지 않은 까닭에 유비는 유방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적장자(嫡長子)가 아닌 서장자(庶長子)가 되었다. 당나라 때 사마천의 『사기』에 주석을 가한 사마정(司馬貞)은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조씨 집안 여인을 ‘조희’로 표현했다. 후한 초기에 나온 반고(班固)의 『한서』 「제도혜왕유비전(齊悼惠王劉肥傳)」에는 외부(外婦)로 나온다. ‘외부’는 정실 이외에 다른 곳에서 맞아들인 첩 등을 말한다.
     
『사기』와 『한서』는 유방이 혼인식도 올리지 않은 채 조씨 여인을 얻은 배경에 침묵한다. 당시의 여러 정황에 비춰보면, 아무런 직업도 없던 유방에게 아무도 귀한 딸을 내주었을 리 없다. 더구나 조씨 집안은 사수군의 호족 출신이었던 까닭에 더욱 그랬음 직하다. 그렇다면 유방이 호족 출신인 조씨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유방이 조씨 여인을 유혹했을 가능성이다. 예나 지금이나 ‘건달’은 무리와 어울리며 자유분방하게 노는 모습을 보인다. 출신이 한미한 집안의 유방이 호족 집안 출신의 여인을 겨냥해 여러 수법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집안 간의 결연을 뜻하는 혼례식을 올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조씨 여인이 유방에게 마음이 끌려 접근했을 가능성이다.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전국시대 말기 훗날 제양왕으로 즉위한, 제민왕의 태자 법장(法章)은 부왕이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신분을 속이고 거나라 태사 교(敫)의 하인으로 있었다. 그때 태사의 딸로부터 유혹을 받고 부부 관계를 맺었다. 당시 태사의 딸은 법장의 용모를 보고는 그가 범상하지 않음을 알고 내심 흠모하면서 몰래 의복과 음식을 제공하며 정을 통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난 자식인 건이 바로 진시황에게 흡수된 제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어느 경우든 유방이 젊은 나이에 조씨 여인과 부부 관계를 맺고 유비라는 자식을 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방은 소하의 천거로 정장의 자리에 오른 뒤 비로소 사방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됐다. 이게 유방의 변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난리 통에 패현으로 이주한 호족 출신 여씨의 딸 여치(呂雉)와 정식으로 혼례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당대 최고의 문벌 출신인 항우를 물리치고 마침내 새 왕조를 열 수 있었던 요인이 여기에도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여씨 일족의 도움이 없었으면 중국 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즉위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유비의 생모 조희는 유방이 여치와 정식으로 혼례식을 올리려고 하자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는 강압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유방이 함양에 입성한 뒤 항우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위기를 맞았다. 이때 유방의 좌사마로 있던, 조희의 오라비 조무상이 항우를 만나 유방이 장차 관중의 왕이 되려고 한다며 고자질했다. 조희가 순순히 물러났다면 오라비인 조무상이 유방을 이처럼 죽음의 위기로 몰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평소 여동생인 조희가 강압으로 뒤로 물러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었음 직하다. 결국, 조무상은 고자질로 인해 빠졌던 사지에서 가까스로 헤어나온 유방에 의해 죽는다.
    

윗사람이라도 행실을 보고 평가하라.

정장으로 있던 유방의 젊은 시절 행보를 기록한 이 대목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관아의 관원들 가운데 유방이 깔보고 멸시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는 구절이다. 여기의 관아는 정장의 상급 기관인 패현 내지 사수군을 가리킨다. 유방이 자신의 상급 기관 관원들을 모두 깔보며 멸시했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일개 정장에 불과한 유방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상급 관청의 관원들을 이토록 멸시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마천은 『사기』 「화식열전」에서 당시 관원들의 행태를 이같이 갈파했다. “관리가 문서와 법문을 갖고 교묘히 농간하고, 문서와 인장을 위조하고, 나중에 적발될 경우 작두와 톱 등에 의해 몸이 잘려나가는 형벌을 당하는데도 이를 피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뇌물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관원은 문서 관리와 법문 해석 및 인장 날인 등의 권한을 지니고 있다. 이들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공공연히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다양한 직종에 관련된 허가권을 쥐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다. 농공상에 종사하는 백성들 모두 이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관원과 뇌물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진시황이 사상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데에는 진나라가 진효공(秦孝公) 때 시행된 상앙(商鞅)의 변법(變法)을 진시황 때까지 변함없이 유지한 게 크게 작용했다. 진나라가 진효공 때 문득 최강국으로 우뚝 선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마천이 「화식열전」에서 지적했듯이 아무리 엄법(嚴法)이 시행될지라도 말단 행정기관의 소리(小吏, 관아에서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사람)에까지 흔히 말하는 ‘공무원의 청렴’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길바닥에서 살았던 유방의 눈에 이들의 비리가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자신도 비록 미관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방의 눈에 차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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