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듣는 아침, 김혜연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라는 책에서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만납니다. 화려하든 조촐하든 삶은 평등하고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깨우쳐주는 책입니다. 정희창 교수의 ‘나의 오렌지 나무’로 들어갑니다.
“진정한 시는 꽃이 아니라 강물에 떨어져 바다로 떠내려가는 이파리들을 노래한다.” 브라질의 국민작가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나오는 구절이다. 화려하든 조촐하든 모든 삶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만 수백만 부가 나갔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고, 권투 선수, 바나나농장 인부, 야간업소 웨이터 등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며 가난을 속속들이 체험했던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주인공 제제는 여섯 살 소년이다. 아빠는 일자리를 잃었고, 엄마도 누나들도 공장에서 종일 일을 한다. 성탄절 날 문밖에 신발을 벗어놓고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선물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예수님은 부잣집 아이만을 편애하신다. 아빠의 슬픈 눈동자가 어른거려 제제는 아빠의 성탄절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구두통을 메고 거리로 나선다.
제제는 장난기가 심해 가족들로부터 걸핏하면 매를 맞는다. 하지만 제제는 동생을 위해 동물원 놀이도 하고, 동생에게 싸구려 장난감이나마 마련해주려고 애쓰는 의젓한 형이다. “나는 모든 것을 집 밖에서 배웠다.”는 첫 페이지의 독백은 어린 제제의 고독을 그림처럼 보여 준다. 제제는 가족이 아니라 정원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만 마음을 털어놓는다. 키 작은 오렌지 나무를 망아지로 삼아 드넓은 초원을 마구 달린다. 제제의 순진무구하고 발랄한 동심은 거기에서나마 자유를 누린다.
조숙한 제제는 학교에 조기 입학한다. 자기 반 못생긴 선생님의 꽃병만 늘 비어 있는 게 안타까워 남의 집 정원에서 꽃을 꺾어 꽂아드린다. 선생님은 고마워하면서도 그건 도둑질이라고 하자, 제제는 이 세상은 하느님 것이므로 꽃들도 하느님 것이라고 당돌하게 반박한다. 제제는 선생님이 준 용돈으로 자기보다 더 가난한 흑인 애에게 생크림 빵을 사주기도 한다. 엄마가 작은 것이라도 더 가난한 사람과 나누라고 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여섯 살 때부터 공장에서 일해왔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던 사람만이 가난을 안다.
제제는 엄마가 부르던 노래를 좋아했다. 인디언 후손인 엄마는 삶의 아픔을 노래로 달랬다. “파도가 밀려와 / 백사장을 뒹굴다 밀려가면 / 내 사랑 뱃사공도 / 저 멀리 떠나간다네.” 제제는 실의에 빠진 아빠를 즐겁게 해주려고 거리의 가수한테 배운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라는 탱고 노래를 멋모르고 불렀다가 죽도록 얻어맞았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 체제의 잘난 도덕률을 맹종하는, 꿈 잃은 어른들의 반응일 뿐이다.
장난질하다 발에 심한 상처를 입은 제제를 포르투갈 사람인 뽀르뚜가 아저씨가 의사에게 데려다 치료해주었다. 둘은 급속도로 친해진다. 아저씨는 자기 승용차를 가리키면서 우리 차라고 불렀다. “내 것은 모두 다 네 거야. 우린 가장 친한 친구잖아.” 천민자본 세상의 소유질서를 뒤흔드는 무소유의 사자후다.
이제 제제에게 새 세상이 열렸다. 둘은 낚시 여행도 같이 떠났다. 부자인 아저씨와 가난한 아이는 친구가 되었다. 낳아준 아버지보다는 자신을 알아주는 아저씨가 진짜 아버지로 여겨졌다. 조건 없는 사랑. 예수님 대신에 인간 뽀르뚜가가 제제를 찾아왔다.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있다는 사실이 제제를 달라지게 만들었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배우는 법이다. 기쁨은 마음속에서 빛을 발하는 태양이다. 행복도 잠시. 뽀르뚜가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망가라치바 기차에 치여 죽는다. 망가라치바는 천민자본의 폭주 혹은 거스를 수 없는 인간 운명의 상징일 것이다. 커다란 슬픔은 제제를 철들게 하고 성장시킨다. 아빠는 다시 취직해 가족에게 웃음을 찾아주었지만, 제제의 마음속 아빠는 이 세상엔 없다. 진실한 사랑 없이는 만남도 헤어짐도 무덤덤할 뿐이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뒤편에서 작업하던 청년이 비참한 사고를 당했다. 공구 가방 속엔 수저 하나와 컵라면 하나 달랑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금수저들이 뽀르뚜가 아저씨처럼 손을 내밀 리는 없다. 우리의 청춘들은 취업이라는 지옥 전선에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내던져져 있다. 이 시대의 조건 없는 사랑은 기본소득이든 무어든 최소한의 복지다.
제제와 뽀르뚜가 아저씨를 만나봤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따뜻한 사랑을 전해준 사람이 있으세요? 여러분은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랑이 되어준 적이 있으세요? 뽀르뚜가 아저씨가 더 많아져 진실한 사랑을 기다리는 수많은 제제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북 큐레이터 | 김혜연
티브로드, KBS DMB에서 아나운서와 리포터로 일했으며 MBC 아카이브 스피치 강사이다. 더굿북에서 <책 듣는 아침> 북 큐레이터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