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Jan 18. 2017

05. 적에게도 예의는 갖춰라.

<최후의 승자가 되라>

항우는 초회왕 미심에 의해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 땅의 제후인 노공(魯公)에 봉해졌다. 『사기』는 항우가 생전에 노나라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다만 그가 유방에게 패사한 뒤 초나라 모든 지역이 한나라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항우의 봉지인 노현의 백성만 그러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면 항우는 나름 커다란 신망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우본기」는 항우를 노공으로 표현한 「고조본기」와 달리 노왕(魯王)으로 표현해 놓았다.

     
“당초 유방은 항우를 패사하게 만든 뒤 천하의 군사를 이끌고 가 노현을 도륙하고자 했다. 노현의 백성들은 예의를 지키며 노왕으로 있던 항우를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키는 사절(死節)을 행하고자 했다. 유방이 항우의 머리를 갖고 가 노현의 백성에게 보였다. 비로소 노현의 부형들이 항복했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노나라 백성들은 항우가 살아 있는 한 목숨을 바쳐 노나라 땅을 지키고자 결의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항우는 비록 전장에서 시간 대부분을 보냈지만, 자신을 대신해 노나라를 다스리는 부하를 통해 나름 매우 관후한 정사를 펼친 것으로 보인다.
    
 
라이벌에게도 그만한 대우를 해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노나라 땅의 백성들이 항복하자 유방이 이내 항우를 노공의 예로 정중히 장사를 지내준 점이다. 「고조본기」는 이를 호장(號葬)으로 표현했다. 항우를 노공 또는 노왕의 호(號)로 예장했다는 뜻이다.
     
패사한 항우에 대한 예우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항우본기」는 항우의 숙부인 항백을 사양후에 봉한 데 이어 항우의 일족인 항양(項襄)을 도후, 항타(項佗)를 평고후 등에 봉하면서 이들에게 모두 유씨(劉氏) 성을 내렸다고 기록했다. 항우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나라 땅의 백성은 물론 여타 지역의 민심을 두루 수습하기 위한 상징적인 조치다.
     
천하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자웅을 겨루었을 경우 일단 천하의 귀속이 확정되었다면, 한때 자신과 치열한 각축을 벌인 상대에게 너그러운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상대 진영의 참모는 물론 자신과 다투었던 상대까지 모두 거두는 포용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자도 포용하여 인재를 얻다.

한때 자기를 죽이려고까지 하던 자를 너그럽게 포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춘추시대 중엽 제환공(齊桓公)이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임명해 사상 최초의 패업을 이룬 것을 들 수 있다. 관중은 인구에 회자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이다. 적잖은 사람들이 제환공과 관중의 만남을 삼국시대 당시의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에 비유한다. 객관적으로 봐도 두 사람의 만남은 명군과 현신의 만남인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전형이다. 실제로 제갈량은 평소 관중을 흠모한 나머지 자신을 관중에 비유하곤 했다.
     
사상사적으로 볼 때, 관중은 제자백가의 효시이다. 제자백가는 공자가 사상 최초로 유가(儒家)라는 학단(學團)을 창설한 이후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수많은 학파다. 실제로 그의 저서 『관자』에는 유가와 도가, 법가, 병가 등 제자백가의 모든 사상이 녹아 있다. 전국시대 때 『관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비자』 「오두」의 다음 대목이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 나라 안의 백성 모두 정치를 말하고, 상앙의 저서인 『상군서(商君書)』와 관중의 저서인 『관자』를 집집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라가 더욱 가난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입으로 농사짓는 자만 많을 뿐 정작 손에 쟁기나 호미를 잡고 농사를 짓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 나라 안의 백성 모두 군사를 말하고,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병가 서적을 집집이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군사가 더욱 약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입으로 용병하는 자만 많을 뿐 정작 갑옷을 입고 전쟁터로 나가 싸우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
   
이는 한비자가 활약하는 전국시대 말기에 『상군서』와 더불어 『관자』가 부국강병 책략의 고전으로 널리 통용됐음을 시사한다. 주목할 것은 애초 관중은 제환공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점이다.
     
제환공의 이름은 소백(小白)이다. 관중은 ‘관포지교’의 또 다른 당사자인 포숙아와 정반대로 소백의 이복형인 공자 규(糾)를 섬겼다. 제나라의 내란으로 인해 망명을 떠난 소백과 공자 규는 비어 있는 보위를 놓고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객관적으로 볼 때 모든 면에서 공자 규가 유리했다. 단 한 가지 불리한 점이 있었다. 제나라 도성 임치성을 기준으로 할 때 소백이 머무는 거나라가 공자 규가 머무는 노나라보다 가까웠다. 무사히 잠입할 수만 있다면 소백이 역전승을 거둘 가능성이 컸다.
     
『사기』 「제태공세가」에 따르면 노나라가 이내 이 사실을 알아챘다. 노장공이 급히 관중에게 명해 별도로 경병(輕兵)을 이끌고 가 거나라에서 제나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게 했다. 양측의 속도 경쟁은 이해 여름에 판가름났다. 소백이 한발 빨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매우 아슬아슬한 장면이 연출됐다.
     
「제태공세가」에 따르면 당시 관중이 이끄는 별동대가 급히 달려가 소백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화살을 날렸다. 소백이 풀썩 쓰러지자 관중은 소백이 죽은 것으로 알고 급히 첩보를 띄웠다. 그러나 소백은 죽지 않았다. 「제태공세가」의 기록이다.
     
“화살이 소백의 혁대 갈고리에 맞았다. 소백이 거짓으로 죽은 척했다. 관중이 급히 노나라로 사람을 보내 이를 보고하게 했다. 공자 규의 행렬이 더욱 늦어져 6일 만에 제나라 경계에 이르렀다. 이때는 이미 소백이 고혜의 도움으로 보위에 오른 뒤였다. 그가 바로 제환공이다. 당시 제환공은 혁대 갈고리에 화살을 맞자 곧바로 짐짓 죽은 체하여 관중을 착각하게 만든 뒤 침대용 수레인 온거로 갈아타고 황급히 임치성을 향해 달렸다.”
 

  
   
적이었던 과거를 잊고 대우하라.

소백이 제환공으로 보위에 오른 후 포숙아를 재상으로 삼고자 했다. 포숙아가 이같이 사양했다.
     
“신은 단지 군주의 평범한 일개 신하에 불과할 뿐입니다. 군주가 신에게 은혜를 베풀려 한다면 제가 헐벗고 굶주리지 않게만 해 주십시오. 이는 군주의 막대한 은혜입니다. 만일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면 이는 제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 그리하고자 하면 오직 관중이 있을 뿐입니다. 신은 다섯 가지 점에서 관중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백성이 편히 살며 즐거이 생업에 종사하게 할 수 있는 점에서 신은 그만 못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면서 근본을 잃지 않는 점에서 그만 못합니다. 충성과 신의로써 백성의 신임을 얻는 점에서 그만 못합니다. 예의 규범을 제정해 천하 인민의 행동법칙으로 삼는 점에서 그만 못합니다. 영문 앞에서 북을 치며 전쟁을 지휘하여 백성들을 용기백배하도록 만드는 점에서 그만 못합니다.”
   
제환공이 반박했다.
“그러나 관중은 전에 나의 혁대를 쏘아 맞힌 자요. 당시 나는 거의 죽을 뻔했소.”
포숙아가 말했다.
“그것은 당시 그가 자신의 주군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군주가 그를 능히 사면하여 제나라로 돌아오게 하면 그는 똑같은 충성심으로 군주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관중과 함께 공자 규를 모신 소홀은 의리를 좇아 자진의 길을 택했다. 관중은 이와 정반대로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제환공을 도와 사상 최초의 패업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치국평천하의 대절을 이루기 위해 사적인 의리인 소절을 희생한 것이다. 당대의 명군 제환공과 현신 관중의 만남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제환공은 자신을 죽이고자 화살을 날린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한 덕분에 마침내 사상 최초의 패업을 이룰 수 있었다. 관중을 과감히 발탁해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 결과다. 
     
사적인 원한을 버리고 천하의 인재를 과감히 기용하는 난세 리더십의 정수이다. 유방이 한때 정적으로 있던 항우를 노공 또는 노왕의 예로 장사를 지낸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난세에 천하의 민심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한때 정적으로 있던 자를 감싸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 나은 것도 없다. 유방의 이런 행보는 삼국시대 당시 위무제 조조가 정적으로 있던 원소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정중히 제사를 올린 것과 닮았다. 말할 것도 없이 모두 주변에 있던 장수와 재상을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득국득천하(得國得天下)의 일환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6. 어땠는지 자세히 말해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