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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an 18. 2017

06. 어땠는지 자세히 말해줘.

<당신의 완벽한 1년>

한나

2달 전10월 30일 월요일10시 47

“먼저 좋은 소식. 자기 차는 스크래치 하나 없이 온전한 상태로 무사히 자기 집 앞에 서 있어.”

“세상에!” 지몬은 소리치며 한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정말 미안해!” 지몬은 이렇게 속삭이며 한나가 숨쉬기 힘들 만큼 꽉 껴안았다. “정말 얼마나 미안한지 말고 다할 수가 없어!”


한나는 겨우 지몬을 떼어냈다. “왜? 폐차시키게 만들 걸 그랬나?”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 얘기가 아니잖아!” 지몬이 얼른 받아쳤다. “이게 좋은 소식이라면 나쁜 소식은 개업식이 완전히 망했다는 소리잖아. 나 때문이야. 난 정말 멍청이야!” 그는 자기 이마를 때렸다.

“아니, 대성공이었어!” 한나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좀 전에 좋은 소식 먼저라며?”

“맞아. 그다음은 더 좋은 소식이었지!” 한나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아하!” 지몬은 고개를 저었다. “부엌으로 가자. 찻물 올려놨어.” 목욕가운과 슬리퍼를 신고 앞서 걷는 그는 여전히 환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전날보다는 한결 나아 보였다. 어쨌든 혼자 일어나서 걸을 수 있으니까. 다행이다.

“어땠는지 자세히 말해줘.” 지몬이 한나에게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오늘 하루 동안 1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찾아왔어!” 한나는 흥분에 친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마스까지 예약이 거의 다 찼고 오후부터 이벤트를 제공하려던 계획을 바꿔서 오전부터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 수요가 정말 어마어마해! 우리가 들고 있던 등록서류를 사람들이 서로 가져가려고 쟁탈전을 벌일 정도였어!”

“정말 대단해!” 지몬은 한나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그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

“나도 자기가 예상 못 했을 거라고 예상했어.”

“왜?”

“왜겠어?”

“앙큼한 것!” 지몬이 히죽거렸다.

“그리고 아이들은 특히 풍선을 좋아했어.”

지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시간에 맞춰 풍선을 다분 거지?”

“아니.” 한나가 말했다.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늦게 도착했어.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간신히 일회용 접시와 음료수만 세팅할 수 있었어.”

“그럼?”

“정말 기발했어!” 한나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풍선을 불었어. 이게 정말 하이라이트였어. 아이들은 다들 헬륨가스 병을 손에 들고 싶어 했어! 그리고 헬륨가스를 마시면 재밌는 목소리가 나오는 걸 알게 되자 말릴 수 없을 정도로 난리가 났어.” 한나는 목젖을 잡아당겨 목소리를 변조했다. “안냐세여. 저는 어린 한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못 간 것이 큰 문제가 아니었네?”

“맞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어!”

그제야 지몬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너의 주장이 또 한 번 증명됐구나.”

“바로 그거야.” 한나는 빨개진 지몬의 코에 진한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와서 걸리적거리거나 뒤죽박죽 만들어 놓지 않았잖아. 그래서 결국 모두에게 좋은 윈윈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지.”

“쳇, 무슨 소리야?” 지몬은 일부러 토라진 척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한나는 이번에는 그의 쀼루퉁한 입에 입맞춤했다. “모든 것이 원활하게 잘 진행되어 정말 기뻐. 리자하고 나는 당장 도와줄 사람 한두 명을 더 구해야 해. 우리 둘이서는 넘치는 문의를 다 감당할 수 없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 지몬이 걱정했다. “문의가 꼭 예약으로 이어지라는 법은 없어.”

“아아악!”한나는 지몬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또 시작이야! 제발 그런 부정적은 기운은 퍼트리지 말아줘!”

“그저 너희가 처음부터 너무 들떠서 경솔해질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걱정 마. 내 곁에는 언제든 나를 말려줄 당신이 있으니까.”

“하하, 고마워.”

“진심인데,”한나는 지몬의 손을 꼭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자기도 알다시피 걱정하는 것은 마치 흔들의자와 같아. 뭔가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잖아.”

“그런 말은 또 어디서 주워들었어?”

“그래.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기억나지 않으니 이제 내가 하는 말이야.”

“걱정하진 않아.” 지몬은 한나의 손가락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네가 실망하기를 원하지 않아. 항상 좋은 것만 생각하면 실망할 일이 생기니까 말이야.”

“역시 자기다워. 난 개업식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실컷 얘기했는데 자기는 내가 실망할까 봐 걱정이라고 하다니.”

“그러네.” 그는 미안한 듯 손을 들었다. “내가 요즘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서 그런가 봐.”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한나가 맞장구쳤다. “그래서 그 기분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한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가자!”

“응? 어딜?”

“일단 샤워 먼저 해. 그리고 나랑 꾸러기교실로 가자!”

“지금?” 지몬은 한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응!” 한나가 간단명료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이제 휴식은 그만! 그리고 우린 지금 도움이 정말 절실히 필요해.”

“한나, 나 아직 감기 다 안 나았어!”

“상관없어.” 한나는 미소를 지었다. “99%의 아이들이 1년에 10번 넘게 감기에 걸려. 자기가 감기 걸린 것 정도는 눈에 띄지 않아. 그리고 휴지도 잔뜩 있어.”

“설마, 농담이지?”

“아니! 자긴 지금 기분전환이 필요해.” 한나는 지몬을 보고 웃었다. “자기도 재미를 좀 느껴 봐. 그러니까 자꾸 빼지 말고 같이 꾸러기교실로 가자. 분명히 자기한테도 좋을 거야. 두고 봐!”

“음, 내가 거기서 뭘 할 수 있지?”

“우선 리자하고 나하고 같이 정리 좀 하고, 2시부터는 어릿광대가 필요해.”

요나단
1월 2일 화요일 15:10

사실 요나단은 새해를 맞아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목요일에나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마르쿠스 보데와의 대화 이후 오늘 당장 존넨호프 요양원에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최근의 출판사 상황에 대해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다. 볼프강 그리프는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고 또 만약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라 해도 지나치게 흥분할 것이다. 조금 전 혹시나 영감이 떠오르진 않을까 하는 기대에 아버지의 초상화 앞에 30분가량 서서 말없이 대화를 나눈 후 갑자기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그리움을 느꼈다.

진회색 사브를 탄 요나단은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흰색자갈이 깔린 넓은 입구로 들어섰다.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건물은 이름에 걸맞게 제대로 빛을 발했다(존넨호프는 햇살 가득한 마당이라는 뜻-옮긴이). 함부르크 1월 날씨라고는 믿기 힘든 아름다운 햇살을 받으며 엘베 강 언덕에 자리 잡은 유리궁전이 우뚝 솟아 있다. 햇살이 커다란 파노라마 창에 반사되어 여기저기 반짝거렸다. 이런 날씨에는 강 건너편까지 멀리 내다볼 수 있다. 왼쪽에는 에어버스 부지, 오른쪽에는 넓은 과일농장들이 있는 알테스란트가 훤히 보였다.

아버지가 아름다운 주변 환경을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궁금했다. 아버지는 주로 방 안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헤드폰을 끼고 베토벤, 바그너, 바흐의 음악을 감상하며 지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지난날의 유물에 둘러싸여 있다. 출판사 건물의 인테리어를 고스란히 요양원으로 옮겨왔다. 인부들은 고풍스러운 그의 가구들을 방에 배치하고 볼프강 그리프가 이젠 앉지 않는 앤티크 책상을 창가에 놓았다. 높은 책장도 옮겨와 그가 더는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을 정해진 분류법에 따라 진열하고 그가 더는 쳐다보지 않는 사진액자들을 모형 벽난로 가장자리에 세워 놓았다.

볼프강 그리프가 유일하게 사용하는 가구는 침대와 안락의자였다. 요나단이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지만, 아버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음악에 푹 빠진 아버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요나단은 아버지를 방해해도 좋은지 망설였다.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평화롭고 편안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직원들이 뒤에서 입을 가리고 ‘폭군’이라든가 ‘미친 독재자’라고 수군대던 남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안락의자에 웅크려 앉아 있는 저 남자는 (있지도 않은) 손자에게 사탕 껍질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까주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새하얀 머리는 빨간 의자와 대비되었다. 볼프강 그리프는 목까지 올라오는 스웨터와 체크무늬 니트 가디건, 베이지색 코듀로이 바지를 입고 진회색 슬리퍼를 신었다. 예전에는 1미터 90에 달하는 건장한 체격을 자랑했지만, 이제는 키가 많이 줄은 데다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평균 이상의 신장임을 짐작할 수 없었다.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늘씬했지만 이제 73세가 되니 쇠약해 보였다.

요나단은 갑자기 슬퍼졌다. 일흔이 되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나도 정신이 흐려져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을까? 나도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옛 비서 레나테 크루크를 제외하면 아들이 유일할까? 하지만 그의 현실은 더 우울했다. 지금 요나단에게는 나중에 찾아올 아들이나 딸조차 없으니까. 레나테 크루크도 나이가 많아 그때 찾아오리라 기대하기 힘들다. 아흔 넘은 옆집 할머니 헤르타 파렌크로크가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갑자기 이해됐다.

“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우울한 생각들을 떨쳐버리려는 듯 요나단은 아버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아버지는 눈을 떴다. 아버지의 눈동자는 맑고 요나단처럼 파란색이었으며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요나단은 아주 잠시나마 유년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엄한 눈빛이 두려웠다. 그 엄한 눈으로 요나단의 영혼 밑바닥까지 다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누구시오?” 놀란 표정의 아버지는 헤드셋을 벗으며 물었다. 검버섯이 핀 손에 들린 헤드셋에서 나직하게 바흐의 <에어>가 새어 나왔다. 요나단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엄하고 가차 없는 표정 아버지의 모습은 비눗방울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예요. 요나단.” 그는 의자를 가지고 와 가까이 앉았다. “아들이요.”

“알고 있어!” 아버지는 자신이 질문한 것도 잊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됐네요.”

“여기는 무슨 일로 왔어?”

“아버지 보러 왔죠.”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야?” 아버지는 이마를 찌푸렸다. “어제처럼 그런 맛없는 죽은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그런 건 만든 사람이나 먹으라 그래. 나는 절대 다시는 안 먹을 테니까!”

“아니에요, 아버지.” 요나단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식사를 가지고 온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점심시간은 벌써 한참 지났어요. 저는 아버지 아들이고 아버지 얼굴 보러 왔어요.”

“새로 왔다는 그 의사양반인가?” 아버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요나단을 쳐다보았다.

“아니라니까요. 아버지의 아들 요나단이에요.”

“내 아들?”

“네.”

“나는 아들이 없는데.”

“아니에요. 아버지는 아들이 있어요.”

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말없이 생각에 잠겨 아랫입술을 깨물며 앉아 있더니 다시 요나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새로 왔다는 그 의사양반인가?”

“아니요.” 요나단이 또다시 말했다. “저는 아버지 아들이라고요.”

“내 아들이라고?” 볼프강 그리프의 목소리는 혼란스러운 듯 들렸다. 잠시 후 그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그렇지, 내 아들!” 그는 요나단의 손을 잡고 토닥였다.


“맞아요.” 요나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손을 토닥였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왔어요. 오늘은 1월 2일이에요. 새해가 시작됐어요. 아버지한테 새해 인사를 하러 왔어요.”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이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매우 흥분한 그는 소리를 꽥 질러서 요나단을 놀라게 했다. “새해라고?” 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냥 앉아 계세요.” 요나단은 아버지의 어깨를 슬며시 누르며 말했다.

“가봐야 해!” 아버지는 소리치며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어딜 가시려고요?” 요나단은 일어나려는 아버지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당연히 출판사지 어디겠니!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는 계속 일어나려고 했다.

“안 돼요, 아버지.” 요나단은 여전히 아버지의 어깨를 감쌌다. “출판사는 잘 돌아가고 있어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헛소리하지 마!” 볼프강 그리프가쏘아붙였다.“ 내가 자리에 없는데 어떻게 잘 돌아간다는 게냐?”

“제가 조금 전에 출판사에 들렀다 왔어요.” 요나단은 가능한 침착하게 설명했다. “레나테 크루크와 마르쿠스 보데가 아주 잘하고 있어요.”

“그렇지, 레나테가 있지.” 볼프강 그리프는 빠르게 흥분한 만큼이나 빠르게 침착해졌다. 입가에 평온한 미소가 번졌다. “참 좋은 사람이지.”

요나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레나테에게 선물할 꽃을 사라고 내게 꼭 일러다오.” 아버지는 아들에게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몇 년 전부터 새해가 될 때마다 레나테에게 꽃을 선물하거든. 하얀 카네이션을 특히 좋아하지.”

“네. 저도 알아요.” 요나단이 말했지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이 전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마음속으로 이른 시일 내에 꽃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그래.”

“보다시피 다 잘 돌아가고 있어요. 걱정하실 거 전혀 없어요.” 이 말을 하면서 몇 시간 전 보데가 한 얘기를 떠올리자 자신이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버지와 출판사의 위기를 논하기란 불가능했다. 요나단을 의사나 밥을 가져다주는 간호사라고 생각하지 않고 제대로 알아보더라도 아버지는 이제 출판사에 도움을 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나란히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새해에 만난 아버지와 아들의 화목한 그림이지만 요나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쥐가 날 정도로 고민하고 있었다.

온 지 10분도 안 돼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무례하고 인정머리 없는 행동이다. 아들이 옆에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든 모르든 그럴 수는 없다. 아무리 아버지가 다시 혼자 음악 속으로 빠져버리는 것을 더 원할지라도.

아버지는 친구와 친지들이 침대 곁에 온 것도 모르는 식물인간 환자와 같았다. 식물인간하고 비교하는 것은 조금 심하지만. 어쨌든 볼프강 그리프는 아직 의식은 있어도 더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마다 과거형을 사용하는 자신을 알아차리고는 흠칫 놀라기도 했다.

“가능하면 아버지께 말씀을 많이 하세요.” 담당의사 마리온 크네제벡 박사가 조언했다. 이따금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담당의사가 여자라는 사실에 분개했다. “일상에서 겪은 흥미진진한 일이나 재밌는 이야기 말입니다. 평소에 하는 일들에 대해 아버지에서 자세히 얘기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말은 쉽지만, 막상 하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아버지에게 들려줄 만한 얘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의 삶이 너무 무미건조했다. 그렇다고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다. 요나단은 지금 자신의 생활에 만족했다. 다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의 일상에 재밌는 에피소드가 좀처럼 없을 뿐이다.

그는 부담 없이 나눌 수 있는 적절한 이야기를 궁리했다. 보데 이야기는 탈락이다. 티나가 새해카드를 보낸 이야기도 아니다. 볼프강 그리프는 며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티나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버지. 재밌는 얘기가 있어요!” 요나단은 손으로 허벅지를 내려치며 말했다. 할 말이 떠올라 내심 안도했다. “어제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래?” 아버지는 궁금해했고 잠시 정신이 돌아온 듯 보였다. 어두운 방에 조명을 켠 것처럼 관심을 띠는 정상적인 눈빛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인 요나단은 신기한 얘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아버지와 단 몇 분이라도 대화할 거리가 생겨서 좋았다.

“평소처럼 아침 운동 후 자전거를 세워둔 곳으로 왔는데 자전거 손잡이에 낯선 가방이 걸려있었어요.” 아버지가 이런 얘기에 관심을 보일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안에 뭐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궁금해하며 의자에서 몸을 들썩거렸다. 인형극장 맨 앞줄에 앉아 인형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는 어린아이같이.

“다이어리요!”요나단이 깜짝 소식을 터트리듯 말했다.

“다이어리?” 아버지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돈뭉치나 금괴 같은 것 혹은 수상하게 째깍거리는 소포상자?

“네.” 요나단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빼곡하게 스케줄이 적혀 있는 다이어리요! 올해 스케줄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흐음.” 볼프강 그리프는 별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다 쓴 다이어리란 말이지?”

“아뇨, 아니에요. 다 쓴 작년 다이어리가 아니라 올해 새 다이어리요!”

“그런데?”

“아버지, 바로 그게 이상한 점이에요!” 요나단이 소리쳤다. “누군가 새해를 위한 일기장에 스케줄을 다 적어놓고는 제 자전거에다 걸어 놓았어요.”

“누가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그 가방을 발견하고 네 자전거에 걸어둔 모양이구나.”볼프강 그리프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죠.” 요나단도 인정했다. “그렇다면 누가 그 다이어리가 든 가방을 잃어버렸는지가 흥미진진한 문제죠.”

볼프강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과장되게 지루하단 표정을 지었다. “너완 상관없는 일이잖니. 가방을 유실물센터에 가져가렴. 그런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다른 할 일이 많은 사람이잖니.” 그의 눈은 완전히 정상이었다. 맑고 못마땅한 눈빛.

“그리고 500유로가 든 봉투가 들어 있었어요.” 요나단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뒤쪽주머니에.”

“네가 그 돈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진 않은데.”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그는 슬슬 올라오는 실망감에 맞섰다. 마냥 무시당하는 작고 어리석은 아이처럼 느꼈다. 내용과 상관없이 지금은 아버지와 무슨 말이라도 주고받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대화는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이 일이 얼마나 기이한 사건인지 설득하기 위해 계속 노력을 했다. “다이어리가 든 가방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지 않고 바로 제 자전거 손잡이에 걸려있었어요. 마치 누군가 일부러 걸어놓은 것처럼.”

“아까 말했듯 지나가던 사람이 그랬을 게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요나단은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 다이어리가 그의 마음을 그토록 잡아끄는 이유를 아버지에게 설명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얘기였다. “내용을 적은 글씨가 어머니 글씨하고 아주 비슷했어요.”


아버지는 이제 아무 말이 없었다. 눈썹을 치켜 올리고 아들을 바라보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볼프강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다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전처럼 다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버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제 말 들리세요?” 그는 아버지의 어깨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두 사람은 요나단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수십 년 전부터 그랬다. 어머니가 떠난 이후 볼프강 그리프는 무서운 침묵으로 일관하며 어머니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요나단의 엽서사건으로 인해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이후 어머니 얘기는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요나단이 말을 이었다. “물론 저도 우연이라는 것은 알아요. 어머니와 글씨체가 비슷한 사람도 얼마든지 있겠죠. 하지만 하필이면 제 자전거에…….”

“소피아.” 아버지가 금지된 이름을 나직이 부르자 요나단은 움찔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네.” 요나단이 불안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처음에 글씨를 보고선 너무 당황하고 혼란스러웠어요.”

“소피아.”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부른 볼프강은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쉬고는 더 빨리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다이어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궁금하고 주인을 꼭 찾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나단이 두서없이 말을 이었다.

침묵.

“유실물센터에 갖다 주는 거는, 왠지 모르겠지만 아닌 것 같아요. 거기서 그냥 사라져버릴지도 모르잖아요. 주인이 미처 유실물센터를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고.”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우려를 설명했다.

무반응.

“만약 제가 그런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누군가 돌려주려고 그렇게 애쓴다는 사실을 알면 정말 기쁠 것 같아요.”

정적.

“그래서 저는 직접 주인을 찾아보려고요.” 요나단의 말은 점점 빨라졌다. 아무도 듣지 않는 외로운 독백. “어제 함부르크 신문에 기사로 실어줄 수 있는지 편지도 보냈어요. 그런데 그 잘난 척하는 기자들은 단번에 거절하고선 저보고 돈 주고 광고를 내래요. 말이 되냐고요!”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 함부르크시민이 함부르크시민을 위해 만든 신문이라면서 시민의 중요한 용건을 단칼에 거절하다니, 편지를 한 번 더 보낼까 봐요. 이번에는 직접 편집국장한테…….”

“여기 왔었어.” 아버지가 요나단의 말을 끊었다.

“아버지, 제 말 좀 끝까지 들어보세요.” 요나단은 갑작스러운 화제전환을 원치 않았다. 아버지는 병든 후부터 부쩍 그랬다. “정말 신문에 광고를 내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여-기-왔-었-어!” 아버지가 힘차게 또박또박 내뱉는 바람에 그는 깜짝 놀랐다.

“누…누가요?”

“소피아.” 볼프강 그리프는 아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파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소피아가 여기 왔었어.”

“뭐라고요?” 요나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잘못 들었겠지. “어머니가 여기 왔다고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요? 존넨호프 요양원에? 최근에?”

“그래.” 아버지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보러 자주 찾아온단다.”

“으음.” 요나단은 말을 하려 했지만, 목이 메었다.

“네 엄마가 찾아오면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지.” 볼프강이 말을 이었다. “옛날얘기들 말이다.”

“죄송해요, 아버지.” 요나단이 마음을 가다듬고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어요.”

“네 엄마는 모든 것을 용서해줬어.” 그는 아들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무엇을 용서하셨다는 거예요?”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고 우리 둘 다 많이 늙었지.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거든.”

“무슨 말씀이세요?” 요나단은 어지러웠다. 분명 지어낸 이야기인데 무슨 뜻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쪽은 어머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해야 한다면 당연히 어머니는 용서를 구해야 하는 쪽이다. 그런데 무엇을 용서했다는 걸까? 요나단은 답을 들을 수 없었고 아버지는 미소만 짓고 있었다. “아버지.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세요. 어머니는 오래전 떠났어요. 소식을 들은 지도 까마득해요.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네요.”

볼프강 그리프의 미소는 의문을 띠었다. “새로 왔다는 그 의사양반인가?”그는 다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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