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든의 위험한 폭로>
세계 인터넷 사용자들을 저인망식으로 감시하게 된 발단은 명확하다. 그것은 9월 11일에 시작됐다. 이후 10년 동안 미국과 영국 양국에서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를 마다치 않는 새로운 정치적 성향이 나타났다. 동시에 급격한 기술발달로 대규모 감청의 실현 가능성이 훨씬 커졌다. 위키리크스 줄리언 어산지의 말처럼 복잡한 인터넷망은 ‘역사상 최대 염탐 기계’가 되었다. 이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스노든이 등장하기 전까지 진실은 극히 일부만 드러나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비밀스러운 조직인 NSA는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가 뉴욕 쌍둥이 빌딩을 기습한다는 정보를 경고하지 못했다. 당시 NSA는 공군 장군 마이클 헤이든이 운영하고 있었다. CIA 국장이자 16개 정보기관 전체의 명목상 우두머리인 조지 테닛(George Tenet)은 NSA의 수장 헤이든에게 질문했다. 사실 이 질문은 부통령 딕 체니의 질문이었고 테닛은 전달자 역할에 불과했다.
질문은 간단했다. 테닛과 체니는, 헤이든이 NSA가 지닌 특수한 능력을 더 공격적으로 활용하여 막대한 전자통신 및 전화정보를 빨아들일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1952년 설립 이래 50년 동안 NSA는 가공할 만한 기술 및 수학 전문 지식을 축적해왔다. 1970년대에는 개혁론자 상원의원 프랭크 처치가 ‘미국에서 완전한 전제정치를 펼칠’ 능력을 NSA가 지니고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다.
NSA가 위치한 메릴랜드에는 미국 생물무기 프로그램의 본거지인 포트 디트릭(Fort Detrick)과 미국이 화학무기를 개발했던 에지우드 아스널을 비롯해 수많은 비밀 또는 민감한 미국 군사기지가 있다. 그러나 NSA는 그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기관이다. NSA 예산 및 직원 정보 역시 국가기밀이다. NSA의 임무는 세계 곳곳에서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무선, 극초단파, 위성 요격 등 모든 전자정보가 포함된다. 물론 인터넷 통신도 포함된다. 이런 은밀한 감시는 목표 대상이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다. NSA는 미국 군사기지, 대사관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 도청기지를 갖고 있다.
NSA의 능력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로 알려진 독특한 정보공유동맹으로 한층 힘을 받았다. 파이브 아이즈 동맹체제 아래에서 NSA는 영어를 사용하는 4개국, 즉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정보를 공유한다. 원칙적으로 이 동맹은 서로를 염탐하지 않기로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염탐한다.
법적으로 NSA는 모든 일을 멋대로 처리할 수 없다. 미국 수정헌법 제4조는 미국 시민을 상대로 부당한 수색 및 압수를 금하고 있다. 통신감청을 포함한 수색은 ‘타당한 이유’와 법관이 발부한 영장이 뒷받침된 구체적인 혐의가 있을 때만 합법이다. 이 같은 안전장치는 현실성이 없거나 시대에 뒤진 규제가 아니다. 1970년대 닉슨 대통령은 악명 높은 미너렛(Minaret) 작전 하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몇몇 미국인의 전화를 도청하라고 NSA에 명령함으로써 이런 권력이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지 보여줬다. NSA가 불법으로 도청해온 감시 대상에는 미국 상원의원 일부,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작가 벤저민 스포크(Benjamin Spock), 영화배우 제인 폰더(Jane Fonda), 흑인 운동가 휘트니 영(Whitney Young)과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비평가들이 포함됐다.
미너렛 스캔들로 1978년 제정된 법에 따라 NSA는 영장이 없는 한, 미국 내 또는 미국인이 관련된 통신에 접근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NSA의 영국 협력기관 GCHQ의 경우는 달랐다. GCHQ는 성문헌법이 없었고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정부 각료들에게 원하는 것을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할 수 있었기에 자유로웠다. GCHQ는 나중에 밝혀진 문서에서 “영국의 감시체제는 미국과 비교할 때 가볍다.”라고 떠벌렸다.
9·11 테러 공격 발생 전에 NSA는 ‘접속 연쇄화(contact chaining)’라는 실험을 진행 중이었다. 이 실험은 사람들의 전화를 듣거나 이메일 내용을 읽지 않고도 사람의 관계도를 수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페이스북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NSA는 소셜 네트워크를 ‘소셜 그래프’라는 이름으로 그려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실험에는 문제가 있었다. 1999년 법무부 소속 ‘정보정책과’는 이 실험이 전자감시 범주에 포함된다고 결정했다. 미국과 무관한 통신 대상 감시는 합법이지만, 미국인이 연관되면 NSA가 법을 어기게 되는 셈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9·11 테러가 발생한 후 상황은 달라졌다. 헤이든, 테닛, 체니, 그리고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들은 전쟁에 미쳐 있던 국회로 가서 해외정보감시법 개정을 통해 더 많은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에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당시 국회와 하원은 연방 수사관에게 더 큰 수색 시행 권한을 부여하는 애국자 법(Patriot Act)을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시켰다. 이 여세를 몰아 해외정보 감시법 개정까지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공개적으로 더 큰 권한을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백악관은 헤이든에게 비밀리에 감시 프로그램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헤이든이 이끄는 NSA는 철저한 비밀 보장과 동시에 전통적인 NSA의 한계를 벗어나는 새로운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 작전은 전화통화, 전화 메타데이터, 이메일과 웹 검색 같은 인터넷 통신, 인터넷 메타데이터라는 네 가지 방향으로 전개됐다. NSA는 이런 자료를 최대한 많이 수집했다. 외국인에게서 미국인으로 연결되는 접속 연쇄화를 다시 시작했고 미국을 지나가는 외국 통신도 수집했다. 이 작전에 ‘스텔라 윈드’라는 우아한 코드명이 붙었지만, 일부 NSA 기술자들은 이를 빅 애스 그래프(Big Ass Graph)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01년 10월 4일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공식 허가서와 초기 경비 2,500만 달러를 발판으로 스텔라 윈드 작전이 시작됐다. 공식적인 작전명은 10월 31일 핼러윈에 붙었다. 스텔라 윈드에 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부시가 서명한 허가서를 헤이든은 금고 속에 보관했다. 이 작전을 수행하던 NSA 직원 90여 명과 NSA 최고 변호사가 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일이 합법이길 바랐다. 하지만 법원의 승인은 없었다. 2002년 1월이 될 때까지 비밀 해외정보감시법 법원장은 이 작전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다. 법원장 동료들 역시 한 명을 제외하면 그 이후로도 4년 동안 이에 대해 알지 못했다. 심지어 NSA 내부 감시역인 감찰관조차 이 작전이 존재한 지 1년 후인 2002년 8월까지 알지 못했다.
국회의원 대부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상하원 정보위원회에 소속된 민주당과 공화당 고위층 간부만이 이를 알고 있었다. 1월이 되자 NSA는 상원 예산을 관장하는 상원 세출위원회 위원장 켄 이노우에(Ken Inouye) 민주당 위원과 테드 스티븐스(Ted Stevens) 공화당 위원에게 스텔라 윈드의 존재를 알렸다. 2007년 1월이 되어서야 미국 국회의원 525명 중 60명이 스텔라 윈드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스텔라 윈드는 처음 실행 단계부터 주요 통신회사 및 인터넷 서비스 제공 회사들로부터 열렬한 지원을 받았다. 이는 결정적인 문제였다. 구소련이나 현재 중국과 달리 미국 정부는 미국을 거쳐 가는 인터넷 광섬유 케이블과 교환기를 직접 소유하거나 운영하고 있지 않다. NSA가 전화 및 이메일 기록을 수집하고자 하는 경우 이런 회사들의 협력은 필수였다. NSA 내부 기록에 따르면 익명의 ‘민간부문 협력자들’이 해외에서 들어온 전화, 인터넷 통신 내용은 스텔라 윈드 작전을 시작한 2001년 10월부터, 미국 내에서 발생한 전화 및 인터넷 메타데이터는 그다음 달부터 NSA에 제공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민간 회사들이 NSA에 공개한 통신 소통량은 엄청났다. NSA가 ‘기업 협력자’라고 부르는 3사가 제어하고 있는 기반시설은 미국을 통과하는 국제전화 중 어림잡아 81%에 해당했다. 통신사와 밀접하고 비밀스럽게 협력하는 관계는 NSA에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사실 NSA 설립 이래 줄곧 이어진 운영 방식이다. 이렇게 다년간 맺어진 관계가 9·11 테러 이후 상처받은 국가의 애국심과 결합하여 더 커졌을 뿐이다. 그 증거로 ‘기업 협력자’ 3사 중 두 곳은 스텔라 윈드 작전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도 전부터 NSA에 연락을 취해 “도움이 되기 위해 우리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이후 2년 동안 스텔라 윈드는 적어도 3개 이상의 통신회사에 지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추가적 데이터 요구는 법원의 명령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이는 NSA의 일방적인 요구로서, 정기적으로 스텔라 윈드 작전을 갱신하던 법무부 장관 존 애시크로프트(John Ashcroft)가 공문을 덧붙였을 뿐이었고 애시크로프트는 판사도 아니었다. NSA 내부 기록 초안에 따르면 NSA가 이메일 내용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던 한 곳은 ‘기업 책임 문제’를 들어 반기를 들었다. 나머지 한 곳은 외부 변호사들에게 의뢰해 요구 수락의 적법성을 검토하고자 했다.
노출 위험이 너무 크다고 여긴 NSA는 고민했다. 법무부 내부에서도 스텔라 윈드의 적법성에 관한 우려가 있었다. 법무부 차관 제임스 코미(James Comey)는 장관 애시크로프트가 병가 중일 때 갱신을 승인하는 서명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NSA 책임자인 헤이든뿐만 아니라 부시 대통령 자신도 스텔라 윈드 작전에 관한 폭로 기사 게재를 금지하기 위해 <뉴욕타임스>에 압력을 가하는 시도에 직접 개입했다. 차후 라이즌과 함께 <뉴욕타임스>에 이 스캔들을 폭로한 기자 중 한 명인 에릭 리크트블라우(Eric Lichtblau)는 “부시 행정부는 이 도청작전이 합법이라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오도했습니다.”라고 말한다.
2005년 12월 NSA가 우려하던 최악의 사태가 마침내 일어났다. ‘부시 대통령 법원 영장 없는 발신자 염탐 허용’이라는 머리기사가 <뉴욕타임스> 1면을 장식했다. 이 기사는 전체 그림 중 일부만을 보여준다. 기사는 기본적으로 NSA가 미국 내 모든 사람 및 그들과 연관된 해외 거주자들의 소셜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메타데이터를 대량으로 수집해왔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미국 내 국제전화 및 이메일 소통을 영장 없이 감청한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부시는 <뉴욕타임스>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가운데 해당 작전이 9·11 테러 이후 수행한 가장 큰 정보 성과라고 강력하게 옹호하기 시작했다. 부시는 한층 약삭빠르게 스텔라 윈드 작전 중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부분의 존재를 공식화하고 비평가들을 수세로 몰아넣을 정치적으로 강력한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바로 테러리스트 감시 작전(Terrorist Surveillance Program)이었다. 부시가 취한 거의 모든 국가안보 정책 요소가 그랬듯 뒤이어 벌어진 소란은 대부분 당파적이고 예측 가능했다.
공화당 측은 테러리스트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는 무영장 감시가 필요하다고 안간힘을 다해 옹호했다. 민주당 측은 서둘러 이를 헌법 유린 행위라고 규탄했다. 캘리포니아 출신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이자 책사 낸시 펠로시(Nancy Pelosi)는 하원 정보위원회 소속 최고위 민주당원으로 2001년 10월 헤이든이 실시한 초기 브리핑에 참석했다. 부시 행정부 간부 및 협력자들은 위선과 기회주의의 냄새를 풍기며 펠로시가 비밀을 지켜왔음에도 이 작전을 저버렸다고 비난했다.
펠로시는 반격했다. 그녀는 스텔라 윈드 작전이 가동된 지 며칠 후에 자신이 헤이든에게 보낸 서한을 공개했으며, 이는 우려를 표하는 내용이었다. “이 일을 진행하는 적절한 수단을 결정하는 데 있어 그 권한이 충분한지에 대한 법률 분석을 더 잘 이해할 때까지 나는 계속해서 우려를 표할 것입니다.”
폭로로 인해 개인적 영향을 받은 인물이 펠로시뿐만은 아니었다. 비토 포텐차(Vito Potenza) 역시 <뉴욕타임스>가 이 기사를 게재한 당시 문제를 겪고 있었다. NSA의 법무 자문위원인 포텐차는 통신회사 및 인터넷 서비스 제공 회사와 소통하고 그들이 NSA에 협력하는 행위가 합법임을 보증하는 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유지하기엔 손쉬운 협의였다. 하지만 이제 <뉴욕타임스>가 내막을 보도했으므로 통신회사들은 손익과 법정 분쟁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NSA와의 협력관계 청산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이 중 한 통신회사가 포텐차에게 잠재적인 해결책을 전해주었다.
“우리에게 전화 메타데이터를 제공하라고 요청하지 말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라.” NSA 내부 기록에는 “그 회사는 법원 명령에 따라 강제로 데이터를 제공하게 하라고 요청했다.”라는 언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