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책수다> 언어의 온도

by 더굿북

북 큐레이터 : KBS 오수진 캐스터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삼삼한 책수다>가 이번 주에 만난 책은 <언어의 온도>입니다. 저자는 <말글터>의 대표인 이기주입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의 온도’를 확인하는 데는 세 페이지면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더 따뜻한 온도가 있는 다음 페이지가 궁금했습니다.

지난겨울 주말이었다. 밀린 업무로 정신이 없었다. 창밖을 내다봤더니 밤새 내린 눈이 얼어붙으면서 전국의 도로가 태릉 아이스링크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추위도 기승을 부렸다.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칼바람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 오후, 어머니가 급한 볼일이 생겨 외출하셨는데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어디에 계세요?”

버스정류장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다. 잠시 뒤 꽁꽁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어머니가 힘겹게 차에 오르면서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기주야….”

부모는 참 그렇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주고, 자신의 꿈을 덜어 자식의 꿈을 불려주고, 밖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돈을 벌어다 주고, 그렇게 늘 줬는데도 자식이 커서 뭔가 해 드리려 하면 매번 ‘미안하다’고 말한다. 단지 받는 게 미안해서가 아닐 것이다. 더 주고 싶지만 주지 못하니까,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향해 ‘미안하다’고 입을 여는 게 아닐까.

난 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하며 콜록콜록 공연한 기침만 해댔다. 어떤 말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해서 그냥 공중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굳이 민망하게 두 번 세 번 주고받으며 서로의 심경을 확인할 이유가 없다. 괜스레 마음만 더 아프다.

나는 어머니가 흘린 말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차디찬 빙판길에 ‘미안’이란 단어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난 자동차 히터를 더 크게 트는 일밖에 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미안하다’는 말이 시끄러운 히터 소리에 묻혀버리도록….

더 주지 못해 미안한 부모의 마음, 그 마음을 알기에 작아지는 자식의 마음, 한겨울 부모와 자식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온도를 느껴본 <삼삼한 책수다> 오수진이었습니다.




북 큐레이터 ㅣ 오수진
성균관대학교 영문학과(중문학 복수전공)를 졸업한 후, 현재 KBS에서 기상 캐스터로 근무하고 있다. 더굿북의 북 큐레이션을 담당하고 있으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독서봉사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환경부에서 홍보 대사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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