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연재 예고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by 더굿북
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서, 평생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_유영국


유영국 선생은 산의 화가다. 선생이 그린 산은 그냥 그림 속의 산이 아니다. 당신 가슴속에 존재하는 산, 당신이 정신과 영혼으로 품은 산…, 유영국 선생 바로 그 자신이다.

선생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 화가다. 진정한 예술가란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오직 그 엄혹한 작품과 침묵의 삶만으로.

선생은 현대미술의 불모지였던 1900년 초중반 우리나라 미술계에 소중한 모더니즘의 씨앗을 심고 싹을 틔워 꽃까지 피워낸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다. 그러나 미술계 내에서 받는 평가나 존경과는 달리 선생의 작품과 삶은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분의 아름다운 삶과 예술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 역시 글 쓰는 사람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어서다.

이번에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유영국 선생의 일대기를 집필하면서 많은 날을 벅찬 감동으로 지샜다. 그분의 예술과 삶 속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가슴 뭉클하게 전해오는 뜨거운 고독과 찬란한 슬픔에 나도 젖어 저도 모르게 눈가를 적시곤 했기 때문이다.

선생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터이다. 먼저 선생이 일생 추구하신 추상미술은 그 특성상 그림에 내러티브가 들어 있지 않아 선뜻 이해하고 다가가기가 어렵다는 점이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유독 남 앞에 나서길 좋아하지 않는 타고난 선생의 겸손함과 강직함 때문에 대중과의 소통이 거의 부재했다는 점이 클 것이다. 선생은 일생 ‘예술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보여야 한다’며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는 일에는 좀체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렇게 순수한 예술혼을 일생 고집스럽게 간직한 선생이었지만 그 본 성품은 실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자상했다. 자신에게는 혹독하리만치 엄격했지만 식구들과 주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관대한 분이 바로 유영국 선생이었던 것이다.

중년에 심장이상과 뇌졸중 등으로 수십 차례 사경을 헤매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식구들에게 힘들거나 짜증스런 내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수술이 잘못되어 살이 썩어들어 가는 극한 고통 속에서도 신음소리조차 함부로 흘리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편한 얼굴과 담담한 어조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분, 남의 마음을 먼저 배려하고 자신의 아픔과 고통은 끝끝내 드러내지 않고 홀로 짊어지려 했던 분이 선생이었다.

그렇다. 유영국 선생의 예술과 삶에는 한 올의 ‘엄살’도, 일말의 ‘감상’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침묵으로 기도하는 사제와 같이, 처절하게 뼈를 깎으며 수행하는 설산의 수도승과 같이, 자신과의 싸움에만 모든 것을 걸었다. 그 결과 선생은 마침내 산으로 우뚝 섰다.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아우라를 추상이라는 화폭 속에서 눈부시도록 높고 찬란하게 펼치며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초석이자 최고봉이 되었다.

일생 형식과 타협을 거부하면서 오직 예술을 위한 한 길만을 고집했던 침묵의 화가 유영국.

선생이 탄생한 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시대를 초월하여 발하는 선생의 그 절대적 예술혼의 기품과 고독한 자유혼의 향기가 이 책을 통해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조금이나마 감동과 위로로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2016년 가을에,
박규리




저자 | 박규리

박규리(1960~ )
서울 출생. 1995년 《민족예술》에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시 <가구를 옮기다가> 외 4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2004년 <이 환장할 봄비에>(창비)가 있으며, 2010년 ‘제비꽃서민시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겸임교수로, 저서로 《경허 선시 연구》가 있으며, <법정 무소유에서 드러나는 선적 사유>,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 설하는 지혜와 자비와 인문학적 고찰>, <조주 십이시가의 선시학적 특성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연재 목차 및 일정]

01. 유서 깊은 집안에서 출생하다.
02. 태백의 산과 동해의 바다.
03. 군국주의에 짓밟힌 예술가의 자유혼
04. 바다로 나간 산사나이
05. 빼앗긴 서울에서
06. 서울 수복, 그리고 다시 1・4후퇴
07. 양조장을 시작하다.
08. 막걸리 띄우던 방에서 이어진 고독한 작업
09. 모던아트협회로 전위예술의 전기를 마련하다.
10.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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