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1916년 봄날, 백두대간의 울창한 산림과 푸른 동해 바다가 연꽃처럼 동그랗게 감싸 안은, 사시사철 대자연의 향연이 형형색색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 울진에서 유영국은 태어났다.
400년 된 유서 깊고 아담한 한옥에서 아버지 유문종과 어머니 홍동호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난 유영국은 위로는 두 형님과 세 누나가, 아래로는 남동생과 누이가 한 명씩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소문난 부자였다. 원주에서 내려와 울진에 정착한 유영국의 조부 유재업은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울진과 부산 지역을 오가며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조부가 쌓은 부는 고스란히 아버지 유문종에게로 이어졌다. 몇 천석꾼에 50톤급 어선 두 대 외에도 세 개의 양조장을 운영했던 유문종은 강릉에까지 ‘울진 유부자’로 소문이 날 정도의 큰 부자였다.
과묵하고 의지가 굳은 아버지 유문종은 한학자면서도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던 당시 동포들을 외면치 않던 의식 있는 애국지사였다. 유문종은 사재를 털어 울진에 제동초등학교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의 제국학교에서는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가난한 아이들은 그 학교마저도 갈 수조차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유문종은 학교를 설립하여 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물론,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어른들까지 받아들여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유문종이 막대한 사비를 들여가며 교육 사업을 계속해나간 것은 고향 사람들에게 민족의 뿌리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제동초등학교가 1925년 정식인가를 받고 개교할 때에는 큰돈을 기부하여 명문사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제국주의의 횡포가 하루가 다르게 가열되던 그 시절, 깊은 산이 사방으로 둘러싸인 울진에는 항일투쟁에 나선 의병들이 많이 숨어 있었다. 평민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신돌석도 불영계곡에 있는 불영사를 근거로의병 활동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의병들이 유영국의 집에 찾아왔다. 아버지 유문종은 이들을 그냥 돌려보내는 척하면서 남들 몰래 밤에 다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설프게 돕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집안이 무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곤 밤에 몰래 찾아온 의병들에게 미리 준비해놓은 거액의 돈과 쌀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는 써야 할 곳에 돈을 쓸 줄 아는 진정한 부자였고, 의식 있는 민족주의자였다.
민족애 못지않게 교육열이 남다르게 높았던 아버지는 자식들이 공부하는 데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영국의 형을 비롯해 의과대학을 다닌 남동생 등 아들 넷과 사위를 모두 일본에 유학시켰다.
학교에서 일본어만 배워야 했던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유영국에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독선생으로부터 한글과 천자문을 모두 깨우치도록 했다. 이 덕분에 아홉 살에 울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을 때 유영국은 한문에도 능통하고 글씨도 달필이었다.
유영국은 울진공립보통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형들이 다녔던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복중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1931년 서울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영국의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