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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Feb 21. 2017

02. 예상하지 못한 나비효과

<도널드 트럼프의 빅뱅>

이제는 일반 상식이 되어버린 물리학 이론 가운데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다. 중국 베이징 나비의 날개 퍼덕임이 대기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폭되어 뉴욕을 강타하는 허리케인을 초래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소한 사건 하나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나비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인단 투표를 석 달 정도 앞둔 2016년 8월 18일 새벽, 뉴욕 맨해튼 유니언 스퀘어에 도널드 트럼프의 조각상이 세워졌다.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나 공화당 지도부에서 세운 것이 아니었다. 조각상을 세운 것은 도널드 트럼프를 싫어하는 미국 무정부주의 단체인 디클라인이었다. 이들은 같은 날, 뉴욕 외에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클리블랜드, 시애틀 같은 주요 도시에도 똑같은 모양을 한 조각상을 세웠다.

조각상은 실제 도널드 트럼프의 모습과 달리 과장되고 희화되었다. 조각상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하체가 빈약한 배불뚝이 모습을 띠고 있다. 조각상을 만든 ‘진저’라는 예명의 설치미술가는 “변비에 걸린 트럼프의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조각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조각상의 얼굴은 과장되게 늙어 보이지만 독특한 머리 모양만 봐도 단박에 누구를 상징하는지 알 수 있게 묘사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조각상은 두 손을 깍지 낀 채 배에 올려두고 있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서는 비밀결사 조직 프리메이슨 반지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프리메이슨 소속은 아니라고 알려져 있지만, 진저는 도널드 트럼프 손가락에 프리메이슨 반지를 끼워놓았다. 마치 도널드 트럼프에게 세상의 모든 안 좋은 것을 관련지어 뒤집어씌우겠다는 태도였다.

이 황제는 고환이 없다(The Emperor Has No Balls)


그런데 이 조각상에는 없는 사실이 또 하나 과장되어 있다. 조각상의 제목은 “이 황제는 고환이 없다(The Emperor Has No Balls)”이다. 영어 ‘balls’는 일차적으론 남성의 고환을 뜻하지만, 때때로 용기나 남자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조각상의 제목을 “이 황제는 용기(혹은 남자다움)가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조각상의 제목은 ‘도널드 트럼프에게는 진정한 남자다운 용기가 없다’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진저는 고환이 없는 조각상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가 지닌 편협한 남성우월주의를 비판할 의도였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가 남자답지 못한 까닭에 더욱 용기(혹은 남자다움)를 과시하려 한다는 뜻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 조각상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고, 조각상은 미국 선거법에 따라 이내 철거되었다. 하지만 진저가 만든 트럼프 조각상은 순식간에 많은 유권자의 관심을 불러 모았고, 대통령 선거기간 내내 인구에 회자되었다.

진저는 조각상의 모티프를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얻었다고 언론에 밝혔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벌거벗은 임금님》은 허영심 강한 임금님이 거짓말쟁이 재봉사 두 명에게 속아서 벌거벗은 채로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는 이야기다. 진저는 “도널드 트럼프가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한 채 자신의 이미지에만 집착하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도널드 트럼프를 비하할 의도로 제작된 것과 달리, 도리어 당선에 크게 기여를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비효과가 지닌 놀라운 역설이다. 죽이려고 만든 올무가 살길로 인도하는 든든한 동아줄이 되었다. 그래서 일부 분석가들은 “이 황제는 고환이 없다”의 제작비를 도널드 트럼프가 댄 것이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우선 조각상 “이 황제는 고환이 없다”는 대선 기간 내내 도널드 트럼프의 마스코트 역할을 했다. 조각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유권자들이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조각상 사진을 실어 날랐고, 언론도 이에 뒤질세라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출간된 각종 출판물에도 이 조각상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희화되고 과장된 이 조각상은 예상과 달리 유권자들의 호감을 샀다. 언론에서는 연일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비판적 기사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벌거벗은 도널드 트럼프는 이런 상황과 관계없이 멀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자체가 코미디였다. 도널드 트럼프 선거 지원팀이나 공화당 지도부에서 매력적이고 박력 있는 모습의 캐리커처나 조각상을 내세웠다면, 오히려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반감만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를 비하하고 조롱하기 위해 만든 조각상이었기에, 그의 반대자들 사이에서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상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에게는 조각상이 결집을 자극하는 매개체가 되고 만 것이다. 조각상은 반트럼프 진영에게는 트럼프 마스코트로, 트럼프 진영에게는 결집 요소로 작용하면서, 자연스럽게 힐러리 클린턴은 잊히기 시작했다. 결국 그사이에 도널드 트럼프 조각상은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를 “트럼프냐, 힐러리냐?”에서 “트럼프냐, 아니냐?”로 전환해가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이 황제는 고환이 없다”라는 조각상의 제목은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기정사실화 한 측면이 강하다. “트럼프에게는 고환이 없다”는 제목이었다면 선거법에 위반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저는 도널드 트럼프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 ‘황제’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물론 황제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순식간에 황제로 둔갑했다. 도널드 트럼프 측에서 조각상을 문제 삼지 않은 것은 그것에 대해 아예 몰랐거나, 문제로 삼을 경우 닥쳐올 후폭풍을 계산해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황제’라는 표현을 사용한 탓에 잠잠하게 대응한 것일 수도 있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을 황제로 불러줬으니, 도널드 트럼프는 오히려 황송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선거와 유세 과정을 마케팅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도널드 트럼프를 폄하하고 조롱하기 위한 조각상은 오히려 제작 의도와 다르게 작용했다. 도널드 트럼프를 벌거벗은 왕으로 조롱하면서 대통령 당선을 인정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세 번째로 “이 황제는 고환이 없다”는 제목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전략을 대중에게 제대로 전달한 것일 수도 있다. 진저는 조각상의 제목으로 도널드 트럼프의 허영을 꼬집고 싶어 했겠지만,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미국이 벌거벗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조각상은 도리어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전략을 중의적으로 상징한 결과에 이른 것일 수도 있다.

경쟁자 힐러리 클린턴은 “함께, 더 강하게”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이는 오늘날 미국의 현실을 반영한다기보다 버락 오바마 정권을 계승한다는 인상이 짙었다. 한마디로 “함께, (지금도 강하지만, 앞으로) 더 강하게”로 읽힐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구호 “함께, 더 강하게”는 “미국은 지금도 강하다”는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앞으로) 더 강하게 (만들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힐러리 클린턴의 구호에는 미국 대통령으로서 지녀야 할 포부 대신, 오히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해결하지 못한 대선 공약을 계승,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담긴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기간 내내 “미국은 지금 위기 상황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2016년의 미국이 2008년 이전의 미국보다 모든 면에서 약해졌다고 강변하며, 더는 허세를 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은 지금 벌거벗고 있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도널드 트럼프의 폭로는 미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의 실업률이 5% 이하라고 내세우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그것이 언론 조작, 거짓말이라고 맹비난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이렇게 미국 국민을 설득하는 차에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런 와중이었으니, 조각상 “이 황제는 고환이 없다”가 도널드 트럼프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을지 짐작할 만하다. 도널드 트럼프의 관점에서 보면, 옷을 벗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조각상의 제목이 뜻한 바는 결국 “이 황제의 나라는 벌거벗고 있다”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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