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 인생의 첫날이다>
“내부에서만 유통되는 보고서에 디자인적 요소로 에너지가 낭비되는 일은 생산적이지 않다.” - 정태영
대기업의 보고서, 특히 전략기획실의 보고서는 대부분 PPT를 주로 활용한다. 회사 내의 복잡한 사업구조의 여러 내·외부 이해관계자들을 신속하게 이해시키고 만족하게 하는 방법으로는 PPT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직원들은 누구나 PPT에 숙달될 필요가 있다. 마치 군대에 갓 입대한 신병이 제식훈련을 마친 뒤에 사격술을 익히는 과정과 비슷하다. 어느 병과이든 기본적으로 개인 소총을 다룰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직장인의 사격술은 PPT를 잘 작성하고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PT는 ‘스토리텔링을 위한 도구’이다. 이 점에 착안하여 3가지 요소(스토리 Story, 텔링 Telling, 도구 Tool)로 나누면 이해가 쉽다.
1. 스토리(줄거리, 논점)
각 PPT에는 각자의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그 스토리는 체계적이고, 분석적이고, 현실을 반영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밑바닥 현실과 데이터에서 기인한 스토리라면 중간 단계에서 임의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 가감하고 싶다면 최종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예 처음부터 새로 작성하는 것이 맞다.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출시를 처음 발표할 때 직접 만들고 사용한 PPT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조직들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스토리를 중간의 누군가 가감하는 경향이 있다. 남의 기획에 끼어들어 공을 나눠 갖고 싶은 ‘밥숟가락 들이밀기’다. 상부에 “나도 이렇게 열심히 검토했어요.” 주장하고 싶은 ‘사업 놀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수정과 재보고, 야근과 주말 특근이 수없이 발생한다. 창의적인 전략기획에 몰두하거나 거래처, 고객의 생생한 의견을 반영할 때 쓰여야 할 귀중한 자원과 시간이 사무실에 앉아 그림 디자인과 문구 수정에 낭비되는 것이다.
2. 텔링(전달, 표현)
PPT는 이슈를 간략하게 요약, 제시하는 특성상 역사적인 배경 설명, 깊이 있는 전후좌우의 다양한 의견, 제대로 된 예측을 보여주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천재가 최선을 다해 만든 아이폰 PPT에서도 아이폰 등장 이후 스마트폰이 얼마나 세상을 크게 변화시킬지 전부 보여주지 못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PPT의 태생적 한계를 이해하고 전달과 표현에 과도하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PPT는 단시간 내에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전달과 표현이 뛰어난 만큼, 오랜 시간에 걸쳐 전문 소수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상황에서는 그만큼의 전달과 표현이 필요하지도 않고 효율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단기적인 중독성도 강하여 PPT에 빠져 멍하니 보고 있을 때는 마치 내용을 다 이해한 것 같지만 돌아서면 즉시 증발해 버린다. 그러므로 중요하고 복잡한 의사결정 시에는 소수집단의 깊이 있는 토론과 브레인스토밍이면 충분하다. 또한 PPT에서는 청중이 단숨에 이해하기 좋게 작성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압축, 요약, 그래픽화 되기 때문에 자칫 왜곡되기 쉬우며, 순식간에 내용이 지나가므로 오류가 있어도 지적하기가 쉽지 않다.
3. 도구
PPT는 중요 의사결정에 참고되는 정보 주입의 한 도구일 뿐이다. PPT의 작성이나 관람 자체가 의사결정이 아니다. 컨설팅 업체나 광고회사의 발표를 제외하고는 아무리 뛰어난 PPT라도 그것만으로는 어떤 물건을 사거나 팔 수 없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전략기획을 담당하는, 또 담당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 점에 유념해야 한다.
소총을 백발백중으로 잘 쏜다 해서 전쟁에 이기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그 소총 사격이 상급부대의 전투검열을 잘 통과하기 위해 편안한 환경에서 고정된 목표를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전투 사격은 생사가 오가는 열악한 상황에서,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면서 계속 움직이는 목표를 향해 사격하는 것이다. 기업 내부에서 PPT 양식에 집착하는 것은 안전하고 차분한 상태에서 이룬 결과를 가지고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