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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09. 2017

03. 세 번째 방, 살아남은 아이

<일곱 개의 방>

‘또 이런 식이군. 이럴 줄 알았어.’ 

그레이스는 화가 났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빨간 머리를 쥐어뜯다가 다시 이씨에게 서툰 한국말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다른 집, 다른 집으로 이사합니다.” 
“이봐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금 잔금 치러야 하는데 이러면 어떡해요?” 

부동산 중개업자 이씨는 땀을 뻘뻘 흘리며 벌써 20분째 그레이스를 설득하고 있다. 

“달랐어요! 집, 깨끗한 집이었어요. 지금은 더럽습니다!” 
“나 참, 그러니까 전에 살던 사람이 이사하느라 더러워진 거잖아 요. 청소하면 깨끗해진다니까!” 

이씨도 참다못해 결국 그레이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요! 내 이럴 줄 알았어. 외국인한테 집을 소개하는 게 아니었는데! 중개업 20년 만에 이사하는 날 집 더러워졌다고 따지는 사람은 또 처음 봤네. 이사하고 청소를 하세요, 청소를!” 
“왜 내가 청소합니까? 못합니다. 나는 깨끗한 집에 이사합니다!” 

그레이스는 사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계약하기 전 둘러봤을 땐 분명 깨끗하고 예쁜 집이었는데, 이사를 하러 왔더니 바닥에 온통 발자국이 찍혀 있고 벽지는 너덜너덜했다. 베란다 창틀에는 새똥이 가득했다. 

‘속았어. 저 아저씨가 작정하고 날 속인 거야. 어떻게 해야 하지? 아,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때 그레이스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네, 301호에 짐 다 내렸는데 올라와서 가구 배치 한번 보세요.” 
“오, 노! 안 돼, 스톱!” 

그레이스는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3층으로 올라갔다. 더러운 집 안에는 이미 자신의 가구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끼는 소품들은 더러운 바닥 한쪽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식탁과 소파는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동산 사무실에 서 싸우는 사이 이미 이사가 끝난 것이다.
 
‘이 바닥, 이 벽지, 새똥……. 아, 어쩌지. 여기선 절대 못 자.’ 

“그래서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나요?” 
“직장 근처 호텔에서요. 그 집엔 들어가기도 싫어요. 나쁜 사람들, 난 사기당했어요!” 

그레이스는 어제 일을 떠올리자 다시 가슴이 들썩거리고 숨이 가 빠지기 시작했다. 어제 집을 나와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지만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강의를 마치자마자 J 박사를 찾아온 것이다. 

“그레이스, 진정해요. 그래도 이사한 집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요? 언제까지 호텔에서 지낼 순 없잖아요?” 
“다른 집을 찾을 거라고요. 박사님은 지금까지 제 얘길 다 듣고도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세상에, 제 얘기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J 박사는 일어나서 포트에 물을 데우더니 녹차를 우려 그레이스 앞에 놓았다. 

“그레이스, 일단 차를 한잔 마셔요.” 

‘이 와중에 차가 무슨 소용이람.’ 

그레이스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앞에 놓인 향기로운 녹차를 순순히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본 J 박사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잘했어요, 그레이스. 쉽지 않겠지만 다른 건 다 잊고 일단은 차의 향과 맛에만 집중해보도록 해요.” 

J 박사는 그레이스가 한국에서 영어로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레이스는 늘 극도로 화가 나 고 흥분한 상태에서 상담을 요청해왔다. 하지만 J 박사는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차 맛이 느껴져요?” 
“네, 씁쓸해요. 그래도 향은 좋아요.” 
“음악을 들을까 하는데 어떤 음악이 좋겠어요? 지금 듣고 싶은 음악 있어요?” 

그레이스는 말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을 틀었다. 음악 소리가 마치 먼 곳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잘했어요. 그럼 차를 마시면서 음악을 좀 들읍시다.” 

J 박사 역시 자기 몫으로 차를 한 잔 따르더니 맛을 음미하면서 마시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처음에는 멀게 느껴졌던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귀와 머릿속이 깨어나는 듯했다. 찻잔을 든 손에서는 따뜻한 차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숨결이 차분해졌다. 

“자, 그럼 다시 얘기를 들어볼까요? 아까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아무도 제 말을 안 들어서요. 집이 더러워졌다고 얘기를 했는데 집주인도, 부동산 중개인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넘겨버렸어요. 그러면서 나한테 청소를 하라고 하더군요. 내가 왜 청소를 해야 하죠? 난 청소하려고 그 집으로 이사한 게 아니에요!” 




세 번째 방, 감정 조절 분투기 

“나에게는 왜 나쁜 일만 일어날까? 왜 모두들 나를 힘들게만 하지?” 우리는 가끔 이런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듭니다. “혹시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레이스는 이런 부정적인 생각의 그늘에서 몇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하기 위해 DBT를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처음 DBT를 만나 익숙해지기까지는 매일매일이 전투와 같았습니다. 늘 새로운 문제 상황에서 길을 잃었고, 언뜻 보기에 간단한 문제들조차 해결하기 힘들어하며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극심한 자괴감과 분노 그리고 슬픔에 휩싸여버렸습니다. 하지만 DBT를 시작하면서 그레이스는 자신의 증상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게 됩니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겪은 두려움과 공포, 홀로 동생과 함께 세상을 헤쳐나가면서 받은 차별이 자신의 심적 고통의 원인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대인관계나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감정을 다루고 대응하는 행동 기술을 어린 시절에 잘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곱 살의 어린 그레이스는 이 세상이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까요? 하지만 어른이 된 그레이스는 용감하게 그늘을 헤쳐 나와 밝은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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