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콘서트>
고대의 평등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묵자가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희생되어 2000년 동안 역사에서 잠든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묵자에게는 소크라테스의 절제가 있고, 예수의 사랑이 있으며, 공자의 인(仁)을 넘어서는 실천적 평등주의가 있었다. 그런데도 묵자가 받은 천대와 괄시는 눈물이 날 정도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공자는 왕과 제후의 이야기를 담은 〈세가(世家)〉 편에 실렸지만 묵자는 〈열전(列傳)〉에도 못 끼는 찬밥신세를 당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묵자는 송나라 사람이다. 송나라는 은나라의 후예들이 살던 곳이며,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다. 따라서 묵가의 사상에는 동이족과 한족의 길항 관계, 그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제자백가들은 모두 송나라 사람들을 바보 취급한다. 《맹자》에는 곡식의 모가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모를 억지로 뽑아 올리는 알묘조장(揠苗助長)의 우화가 나오는데, 이 알묘조장의 주인공이 바로 송나라 사람이었다. 또 《한비자》에는 농부가 나무 그루터기에 토끼가 머리를 부딪쳐 죽기를 기다리는 수주대토(守株待兔)의 우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송나라 사람이었다. 묵자를 바라보는 사마천의 시선도 제자백가들과 마찬가지였을까. 사마천은 묵자의 글에 문학적인 가치가 없다고 혹평한다.
하지만 전국시대부터 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공묵(孔墨)이라 묶어 부를 만큼 묵자의 권위는 대단했다. 《장자》의 〈제물론〉에는 “그러므로 유가와 묵가는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우긴다”라며 작은 차이에 집착하는 유가와 묵가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서도 장자의 시대에 묵가가 유가 못지않게 영향력이 있는 집단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여씨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공자와 묵자는 전국시대 사상의 시장에서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두 선비는 모두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이들을 따르는 무리가 갈수록 늘어나고 제자들도 많아져 천하에 충만했다.” 그런데 묵자에 대한 《사기》의 기록은 너무 간략하다. 유가를 옹호하는 사마천의 눈에 묵자의 일관된 유가 비판이 거슬렸던 것일까?
묵자는 주나라의 귀족주의적 문물을 일관되게 비판한 인물이었다. 인간을 차별하는 것은 그릇된 짓이라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이익을 나눌 것을 주창한 이가 바로 묵자였다. 말로만 평화를 사랑하고 전시에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평화주의자와는 달리 묵자는 침략 전쟁을 직접 막아내는 수성(守成) 위주의 전투적 비공론(非攻論)을 내세웠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치려 하자 묵자와 제자 300명은 방어용 무기를 가지고 송나라의 성을 굳건히 지켰다.
살아서는 고생이요, 죽어서도 각박했던 묵자의 도는 우직한 송나라 사람들을 빼면 실행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장자마저 묵자의 전투적 실천주의에 고개를 흔들었을까? “묵가의 원칙은 각박하다. 뜻은 좋지만, 실천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고행을 자초하여 종아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에 터럭이 없는 것으로 서로 경쟁을 벌이게 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묵자의 실천주의가 좋다. 묵자는 한 끼에 두 가지 고기반찬을 먹지 말라고 가르쳤고, 장사를 지내면서 재물을 땅에 묻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묵자 자신은 흙으로 만든 그릇에 거친 밥과 콩잎 국을 먹었다고 한다. 앎과 행동이 일치되는 삶을 산 것이다. 입으로 말해놓고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다. 묵자는 이 위선을 싫어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인물, 그가 바로 묵자였다.
묵자는 일관된 유신론자였다. 이것 때문에 지난 1960년대 문화혁명 기간에 중국공산당에 또 한 차례 혹독한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묵자의 상제(上帝, 天)는 의지와 감각을 가진 완전한 인격 신이었다. 겸애하는 자에게는 상제가 상을 주고 서로 차별하여 증오하는 자에게는 벌을 준다고 묵자는 말했다. 도덕의 근거를 상제에게서 찾은 묵가는 길흉화복의 주재자인 상제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하늘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가? 하늘은 의로움을 바라고 불의를 싫어한다. 그러니 천하의 백성을 거느리고 의로움에 종사한다는 것은 곧 하늘이 바라는 일을 내가 행하는 것이다. 하늘이 바라는 일을 내가 하면 하늘 역시 내가 바라는 일을 해준다.
이어서 묵자는 귀신의 존재를 옹호한다. 물론 귀신 이야기를 당시의 지식인들도 곧이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지식인들을 향해 묵자는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공격하여 주왕(紂王)을 징벌했을 때, 제후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만약 귀신이 없다면 무왕이 무엇 때문에 제사를 지내도록 했겠는가?” 그렇다. 제사란 귀신이 없다면 무용한 일이다.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제사는 진중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위선이다. 만약 귀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제사는 술과 제삿밥 등의 재물을 도랑에 쏟아버리는 것과 진배없다. 유가의 모순을 묵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귀신은 없지만, 군자는 제사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공자의 제자들은 말한다. 귀신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제사의 예를 배우라는 것은 마치 손님이 없는데도 손님 접대의 예를 배우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여기서 묵자는 공자의 제자들을 상대로 공자와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 귀신이 없다고? 그럼 제사는 왜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