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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r 23. 2017

14. 칸트는 왜 결혼하지 못했을까?

<철학 콘서트>

단순한 것, 그것이 칸트의 삶이었다. 그는 독일 북동쪽 국경의 오래된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고리타분한 독신의 삶을 살았다. 칸트는 성당의 시계보다도 더 규칙적으로 일상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홍차를 마시며 일과를 시작하고, 7시에 강의를 하며, 9시에는 집필을 한다. 오후 1시가 되면 친구들을 초대해 식사하고, 3시가 되면 산책을 한다.

     

이 모든 일이 정해진 시각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이웃들은 칸트가 회색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손에 든 채 문을 나서 보리수나무 길을 지날 때가 정확히 오후 3시 반임을 알았다. 그 유명한 철학자의 산책이 시작되고 있었다.


칸트라고 하면 괴팍한 철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칸트도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이었다. 칸트의 일과 중에 가장 흥겨운 시간은 점심시간으로, 그는 주로 시민들과 환담을 하며 식사를 했다. 칸트의 이야기는 밝고 유머와 기지가 넘치며 매력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칸트는 지리에도 해박하여 가본 적도 없는 이탈리아의 풍광과 런던의 다리 모습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는 국무대신과 귀족, 군인과 은행가 등의 집에 자주 초대되었는데, 특히 살롱의 중심이었던 카이저링크 백작 집에 자주 초대를 받았다. 재색을 겸비한 백작 부인은 칸트에게 각별한 친근함과 존경을 보냈다. 칸트도 결혼하려고 한 적이 있었다. 결혼이 별거냐? 칸트는 결혼을 ‘생식기의 상호적 사용을 위한 두 사람의 동의’라고 규정했다. 

     

그는 구혼을 두 번 시도했다. 첫 번째는 너무 오랫동안 시간을 끌며 고민하는 바람에 여자가 더 대담한 남자와 결혼해버렸다. 그다음 두 번째로 철학자가 결혼에 예속되기로 하고 구혼하려고 보니 이미 여자가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칸트를 철학밖에 모르는 서생으로 알고 있겠지만, 칸트는 여자를 좋아했고 돈도 싫어하지 않았다. 또한, 내기 당구를 무척 즐긴 사람이기도 했다.

     

칸트는 31세에서 46세까지 무려 15년 동안 대학에서 사(私) 강사로 지냈다. 당시 독일의 사 강사는 대학에서 급여를 받지 않고 청강하는 학생들에게서 직접 수강료를 챙겨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학원 강사인 셈이다. “교수님의 강의는 항상 심원했고 유쾌했다. 박식한 탓에 자주 삼천포로 빠지곤 했지만, 그 탈선은 늘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제자 보로프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헤르더 역시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유머와 기지, 재치와 기발함이 돋보이는 화법을 구사했다. 강의는 즐거운 사교 모임과도 같았다.”

   

칸트의 철학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눈뜨도록 하는 것이었다. 칸트가 개설한 강의는 논리학과 형이상학은 기본이고 물리학과 수학까지 넘나들었다. 거기에 자연법학과 윤리학, 자연신학을 강의했고 나중에는 자연지리학과 인간학도 강의했다. 칸트는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주문했다.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 하는 것을 배우시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시오. 자기의 두 발로 서시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평생토록 외국 여행 한 번 떠나지 않고 단조롭기 그지없는 삶을 살아간 한 철학자의 머리에서 2000년 서양철학사를 뒤엎는 혁명적 아이디어가 구성되었다. 시인 하이네는 칸트 사상의 혁명적 의의를 이렇게 정의했다.

     

“칸트의 단조로운 일상과 세계를 뒤흔든 그의 파괴적 사상은 얼마나 기이한 대조인가!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이 칸트가 수행한 성취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그들은 망나니를 볼 때보다 더 커다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칸트는 분명 선량한 철학 교수였다. 하지만 이마누엘 칸트, 그는 무서운 사상의 파괴자였다. 철학에서 칸트가 수행한 혁명은 프랑스혁명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수행한 성취에 비견된다.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했는데, 칸트는 신을 추방했다.”

   

물론 칸트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칸트는 모태에서부터 하느님을 찬양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칸트의 어머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자연으로 나가 신의 전능을 찬미하면서 창조주에 대한 외경을 아들의 마음에 새겨주었다. 칸트는 여느 무신론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성의 칼을 휘둘러 신을 난도질하는 무신론자들의 수중에서 그 칼을 회수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 같은 형이상학의 논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취급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고 선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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