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콘서트>
“수보리여! 만일 중생들이 마음에 상을 가지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 집착하지 말 것이며, 법이 아닌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너희 비구들이여!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다. 법조차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非法)이야!”
_ 《금강경》, 제6품 〈바른 신심을 지니기가 힘들다(正信希有分)〉 중에서
어떤 사람이 여행하는데 커다란 홍수를 만났다. 이 언덕은 위험하고 저 언덕은 안전한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데는 다리도 없고 나룻배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풀과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모아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에 몸을 싣고 두 손으로 저어 건너편 언덕으로 갔다.
그런데 건너편 언덕에 도착하자 뗏목을 버리기 아쉬웠다. 그리하여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뗏목을 머리에 이고 가면 어떨까?’ 뗏목은 방편이다. 지금 싯다르타는 속세의 차안에서 열반의 피안으로 건너는 지혜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해탈을 이루는 것은 모든 고대인의 염원이었다. 싯다르타의 법은 우리를 차안에서 피안으로 옮겨주는 뗏목이다. 그런데 법이 좋다고 뗏목처럼 법을 머리에 지고 가는 사람이 있다.
이론은 우리를 진리로 안내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진리를 깨닫는 일, 즉 정각(正覺)에는 게으르고, 자신의 현학(玄學)을 드러내는 도구로 이론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위해 싯다르타는 ‘뗏목의 우화’를 들려준다. 싯다르타가 설하는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처음 만나는 불교 성전은 나에게 붓다의 신선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평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고 후배들에게 역설해오던 터에 ‘자기 자신과 법을 등불 삼아 귀의처로 삼으라’는 싯다르타의 말씀은 내게 한마디로 느낌표였다. 나는 불교를 염세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알고 있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보타바루와 싯다르타의 대화는 충격 그 자체였다.
보타바루│죽은 뒤에 사람은 존재하는 것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싯다르타│그것은 내가 설하지 않는 바다.
보타바루│그렇다면 세존은 무엇을 설하십니까?
싯다르타│보타바루여, 나는 괴로움을 설하고 괴로움의 원인을 설하며 괴로움의 소멸을 설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하느니라.
싯다르타는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자들의 말장난을 애당초 좋아하지 않았다. 오직 괴로움에 붙들려 사는 인간의 삶을 자유롭게 하려고 설법한 것이다. 이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민중의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푸른 것은 저 영원한 생명의 나무”라고 괴테는 말했다.
우리는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현실과 이것을 집약한 이론에 얽매이지만 중요한 것은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의 움직임을 따라잡고 연구하는 태도다. 법까지도 뗏목처럼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비법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