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굿북 Apr 05. 2017

01. 천성이 게을러서 취직을 못한다?

<경제학 위의 오늘>

주류경제학은 기독교 문화로부터 독특한 방식으로 노동을 해석한다. 곧, 노동에 관한 주류경제학의 생각은 특수한 문화적 기반과 영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일하지 않고 매일 놀았다. 하지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말았다. 그것은 원죄다! 

     

죄의 대가로 둘은 노동의 형벌을 받았다. 여가는 낙원이 제공하는 축복이고, 노동은 추방된 죄인이 받은 형벌이다. 따라서 인간은 형벌로서의 노동을 혐오하고 여가를 선호한다. 인간은 이제 본성상 원죄를 저지른 악한 존재일 뿐 아니라 노동을 꺼리는 ‘게으른’ 존재다. 틈만 나면 인간은 일터에서 도망치려 한다. 이런 존재들은 스스로 노동하지 않으려 한다. 

     

이들에게 일을 시키려면 감시와 통제, 나아가 고통이 가해져야 한다. 몽둥이나 굶주림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인문학적 질문에 대한 주류경제학의 생각, 곧 주류경제학에 고유한 ‘노동의 인문학’이다. 

     

이제 이 노동의 인문학으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실업자들을 한번 바라보자. 어떻게 보이는가? 그는 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노는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이를 ‘자발적 실업(voluntary unemployment)’이라고 부른다. 주류경제학자들에게 실업은 자발적이며, 항상 그렇다! 모든 실업자는 놀고 싶어 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노동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일하도록 끝없이 압력을 가하거나 다그치면 된다. 그것도 안 통하면 배를 곯리면 된다. 배고프면 일터로 나오기 때문이다. 감시와 압박, 저임금과 빈곤이 실업을 해결해준다. 

     

하지만 비주류경제학자들은 이와 다른 노동의 인문학을 갖고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에게 인간은 노동을 통해 비로소 자아를 실현하는 존재, 곧 노동하는 존재로 선언된다. 이런 생각은 인간을 제작하는 존재, 곧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 정의한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과 같다. 이런 형이상학적 설명과 달리 소스타인 베블런의 생각은 좀 더 과학적이다. 인간의 본능은 다양한데 그중에 ‘제작 본능(workmanship instinct)’이 있다. 노동과 관련된 이 본유적 능력은 진화과정에서 선택됐다. 인간은 제작함으로써 공동체의 삶에 이바지하며 보람도 느낀다. 이들에게 노동은 인간의 본성일 뿐 아니라 삶의 의미를 충족시켜주는 행복한 활동이다. 

     

고역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나머지 달콤한 휴식을 갈망하는 21세기 한국 노동자들에게 이런 노동의 인문학은 냉소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2주간 휴식은 달콤할지언정 2년 휴식이 악몽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은 본래 게으르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하지 않고 생활은 물론 생존마저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도 놀고 있다면? 그는 일하고 싶거나 일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가피하게 놀고 있는 것이다. 비주류경제학자에게 실업은 항상 ‘비자발적(involuntary)’이다!


비주류경제학에서는 노동의 인문학과 이런 현실을 종합해 볼 때 노동하도록 사람을 굳이 압박하거나 채근할 필요는 없다. 그러잖아도 일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하지만 일할 곳이 없다! 


구조조정 문제로 요즘 대학가 분위기가 흉흉하다. 이 와중에 기준으로 내놓은 교육부의 잣대가 가관이다. 취업률 잣대가 그중 하나인 데, 취업률이 낮은 대학을 구조조정의 1순위로 삼겠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학교수들은 거의 매주 취업대책회의를 연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는데 대학이 무슨 수로 취업률을 높인단 말인가. 그저 취업자 수만 조사하고 전화로 취업 여부를 확인하며 취업을 독려하는 게 전부다. 

     

교육부는 졸업생들을 자발적 실업자로 취급하는 것 같다. 천성이 게을러 놀고 싶어 노는 작자들이니 교수들이 독려하면 노동현장에 나서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마냥 놀고 싶어 하는 제자들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모두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이다. 취업 안 된 제자를 독려하는 교수도 마음 아프고, 전화를 받는 제자도 숨고 싶을 뿐이다. 주류경제학적 노동의 인문학에 세뇌된 교육부 때문에 요즘 온 세상이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06. 메뉴가 많아야 잘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