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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06. 2017

05. 용기, 절제, 지혜는 중용인가?

<서양 철학>

완전한 덕과 중용


먼저 인간 영혼의 구조부터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비이성적 요소와 이성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비이성적 요소는 다시 식물들도 가지고 있는 식물적인 영의 능력(예, 성장, 영양공급)과 인간과 동물에 공통되는 동물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완전한 덕을 위해서는 동물적 요소에 속하는 감성적 욕구들이 실천적 지혜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 중요하다. 감성적 욕구들은 언제나 지나치다. ‘실천적 지혜’를 가리키는 헬라어 ‘프로네시스’(φρόνεσις; pronesis)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을 알고 통제하는 능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 적절한 비율을 “중용”(μέσοτες; mesotes)이라 한다. 

따라서 프로네시스는 ‘중용을 아는 실천이성의 능력’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프로네시스가 없다면 어떤 다른 덕들(용기, 절제, 정의 등)도 불가능하다. 모든 덕들은 덕이 아닌 요소들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있는 중용의 상태이며, 프로네시스는 중용을 아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중용은 모든 덕들 중의 덕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그렇다면 중용이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완전한 덕’이란 부덕한 요소가 전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고통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비합리적인 요소가 없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덕은 고통들과 이런 고통들에서 나오는 행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덕은 영혼의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인 부분들을 다스리고 조절하는데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많음과 지나치게 모자람을 피하고 그 사이의 적절한 비율, 즉 중용을 찾아내는 것이다. 완전한 덕이란 부덕한 요소를 전혀 가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덕한 요소들 사이의 가장 적절한 비율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다. 완전한 덕은 덕이 아닌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원리와도 일치한다. 하나의 사물은 그 사물이 아닌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지 그 요소들이 그 사물에 고유한 비율로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만물은 100여개의 분자들이 각각의 사물에 가장 적절한 비율로 결합되어 저마다의 고유성을 가지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덕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용기(이데아로서 용기)란 비겁과 만용 사이의 가장 적절한 비율이 되는 지점이다. 따라서 용기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덕목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절제는 인색함과 낭비 사이의 중용이며, 지혜는 지나치게 약삭빠름과 어리석음 사이의 중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올바른 정신이 개인에게 구현될 뿐만 아니라 국가를 통해 보다 완전하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공동체를 통해서 비로소 선이 완성된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로서 선을 지향하는 시민들로 구성된 윤리적 공동체를 형성할 때 비로소 그의 본질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법과 도덕에 기초한 선한 국가에 속한 시민들의 윤리적 공동체야말로 인륜의 가장 고귀한 현실태이다. 따라서 덕에 관한 연구는 윤리학의 예비적 단계로, 그 이론은 국가를 통해 실천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통치체제는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통치체제는 통치자의 수에 따라 군주제, 귀족정치, 민주주의로 구분된다. 군주제는 일인지배체제이며, 귀족정치는 소수지배체제이고,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지배체제이다. 그리고 각각의 지배체제들은 폭군정치, 과두정치, 우민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정치체제와 민주주의가 혼합된 정치체제를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로 보았다. 중간 계층이 국체의 중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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