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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07. 2017

06. 의심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

<서양 철학>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모든 것이 그에게 종합되어 전승되었다. 여기서는 진리와 하나님에 관한 그의 견해와 인간에 관한 그의 견해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다.



1. 진리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다 회의주의에 빠진 적도 있었으나 기독교에서 그 진리를 발견한다. 그는 회의주의와는 달리 절대적인 진리와 그 인식 가능성을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 의심 자체에 대해서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De trinitate X, 10) 그는 절대적 진리의 장소를 인간의 내면에 있는 ‘의심하는 자아’에서 발견했다. 


따라서 그는 말한다. “밖에서 찾지 말고 내면으로 돌아가라. 인간의 내면에 진리가 거한다.”(De vera religione 39, 72f.)이 내면에는 우리가 모든 감각적인 것과 관계할 때 그 척도가 되는 규칙들, 즉 이념들이 있다. 이 이념들은 선천적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은 다른 여타의 존재자들보다 우월한 자율적인 존재자이다. 이런 그의 사상은 후에 데카르트에게 다시 나타나며, 칸트에게까지 이어진다. 이 이념들은 모든 진리인식의 근원이다.

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내면에 진리인식의 근원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의 근거는 하나님의 정신에 내재하는 이데아들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이 이데아들은 존재론적으로 최고 지위를 차지한다. 인간이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정신이 하나님을 통해 밝아져 깨달음을 가질 때이다. 이때 신적인(순수한) 정신(mundus intelligibilis)이 그 이데아들을 인간의 정신에 직접 비춰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 밖에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한다. 인간은 이처럼 근원으로부터 개별적인 진리들을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 진리들로부터 출발하여 모든 진리를 진리이게 하는 근원적인 진리, 즉 진리 자체에까지 도달할 수도 있다. 이 진리 자체는 모든 선한 것들의 선이며,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인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카테고리들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인식할 수 있다. 모든 세계는 그의 형상이며 비유이기 때문이다.



2. 인간론


인간은 그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원죄를 물려받았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죄란 무엇인가?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 입각하여 죄를 설명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현상계의 사물들은 이데아의 모방이며 그림자로 그 이데아를 조금 나누어 가지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이며 동시에 비존재이다. 그 피조물들은 그들의 존재가 신으로부터 유래했기 때문에 존재이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를 나누어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존재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비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실재성의 부족’을 그 특징으로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와 같이 완전한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실재도 아닌 ‘실재성의 부족’이 바로 죄이다.


모든 피조물들이 본질적으로 죄에 속하긴 하지만 모든 피조물들의 행위가 악은 아니다. 죄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운명에 속하는 데 반해, 악은 인간의 의지와 관련된 문제이다. 악은 의지의 자유를 전제한다. 따라서 오직 의지의 자유를 가지는 인간만이 악을 범할 가능성을 가진다. 인간만이 이성을 가지고 판단하고 그렇게 판단된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지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돌이나 식물이나 동물에게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긴 하지만, 그 모든 현상들은 자연의 필연적인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악은 피조물이며 동시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초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타락할 가능성을 가지기도 한다. 인간은 초월과 타락 사이에서 결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자유는 악을 범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다. 인간이 그의 결단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면 그것이 곧 악이다. ‘악’을 가리키는 한자어 ‘惡’은 ‘亞’(버금 아)와 ‘心’(마음 심)의 합성어로 ‘버금가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버금간다는 것은 온전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악’은 비뚤어진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비뚤어진 마음에서 악이 발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발악’(發惡)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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