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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n 16. 2016

04. 꽃신을 찾아주세요.

<죽은 자들의 증언>

                                                        

“전쟁은 미친개들의 장난이다.”

어느 참전 용사의 한 맺힌 절규가 들려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행위를 전쟁 중에는 이런저런 사유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행위의 종말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2007년 어느 날 월남 파병 용사님들의 추억의 고장인 오음리 일대에서 발굴 작전을 시작하여 추곡 터널을 넘어 북산면 일대의 내평리와 추전리, 부귀리 일대를 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38선이 지나는 지점으로 6·25전쟁 당시에는 소양호가 없었고 남과 북이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마을 어귀에서 어렵지 않게 연세 드신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분들은 초기 전투뿐만 아니라 1·4후퇴 때의 정황과 국군이 다시 진격해 오던 당시의 전투 모습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곳은 지명으로만 보면 부귀터, 천리터 등 흔히 말하는 명당이라고 하여 한때는 도시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전쟁이 일어나고 비극이 생겼습니다.
     
80세가 넘은 할아버지께서 몰던 경운기를 길옆으로 세우고 손으로 가리키십니다.
“저기가 종로봉이여.” 종로봉, 저는 서울의 종로 거리가 떠올라 여기도 종로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봉우리 이름이 종로봉으로, 옛날에는 추곡령에서 소양강을 건너 사오랑 고개를 넘어 홍천읍에 이르는 지름길 역할을 했던 곳이랍니다. 그런 곳에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고 남과 북의 군인이 경계 근무를 서게 되어 한순간에 친척들이 생이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쟁 전 최 일선의 경계 근무 모습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동네에서 일부 청년이 군인과 함께 경계 근무를 서기도 하고 먹을 것을 조달하기도 했답니다. 때로는 북에서 넘어와 동네 사람을 잡아가기도 했고 자고 나면 하루아침에 일가친척이 사라지거나 때로는 없어졌던 사람이 다시 나타나기도 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동네가 난리였습니다. 피난 갈 겨를도 없었습니다. 일부는 국군이 있는 산으로 올라 함께 전투하고 일부는 길가로 내려온 북한군을 바라보며 벌벌 떨기도 하고 뒤죽박죽인 알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이기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며칠이 지나자 이곳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조용해졌답니다. 그래서 이전 군인 벙커가 있던 고지에 가보았답니다.
     
하지만 바로 도망쳐 내려왔습니다. 산등성이에는 시신과 총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벌써 어디서 왔는지 왕 쇠파리 떼가 달려들어 사람 피를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무섭고 징그러워 도망치다시피 다시 집으로 돌아와 숨었답니다. 본인은 키도 작고 배운 것도 없고 그저 지게 지고 산에 가는 일 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는데, 인제 보니 동네 형들도 대부분 없어졌고 어느새 완장 두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수군대며 활개를 치더랍니다.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인민 군가를 배우고 김일성 수령 동지를 위해 만세를 불러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자 완장 두른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갔던 인민군이 다시금 마을을 거쳐 북쪽으로 갔습니다. 그 뒤를 따라 아군이 들어왔습니다. 이제는 아군 만세가 되었습니다. 숨겨 둔 곡식으로 밥을 해서 국군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옛날 그 보초 서던 곳에 다시 국군이 올랐고 마을에서는 지게로 먹을 것을 해 날랐습니다. 인민군이 왔을 때는 원주까지 밤에 짐을 지고 내려갔다 왔는데, 이제는 국군을 따라 밥도 지어 나르고 포탄도 지고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 겨울이 왔는데 국군이 다시 내려오는 겁니다. 뒤이어 중공군이 내려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1·4후퇴입니다. 누비옷을 입고 줄줄이 내려오는 중공군을 따라 이제는 다시 남으로 가야 했습니다. 숨바꼭질도 아니고 어린 나이에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하라는 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동네에는 웬만한 사람은 없고 나이 드신 분과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사람과 아이들만 남았습니다. 얼마 지나자 또다시 중공군이 북쪽으로 가고 국군과 미군이 뒤쫓아 왔습니다. 이제는 좀 긴 시간 동안 왔다 갔다 하더랍니다. 할아버지의 회고는 계속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승용차들이 옆문을 열고 무슨 일인가 기웃거렸습니다.
     
사실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하는 싸움이기에 사람 관련 이야기가 제일 많습니다. 어떤 군인 아저씨는 장가들 여인을 선정해서 일정 기간 데리고 다녔고, 새로운 마을에 들어갈 때마다 어떤 집을 정해서 머물게 하고 떠날 때는 차에 태워 데려갔습니다. 또 어떤 군인은 동네 어귀에서 만난 피난민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인을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반대로 함께해 달라는 여인을 버릴 수 없어 밥이라도 짓고 세탁 일이라도 시킬 겸 같이 데리고 다니기도 하는 별별 사연이 많았습니다.
     
이곳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으나 몇 명의 여인이 군인을 따라와서 함께 보초를 섰다는 겁니다. 그런 곳에 우리는 유해를 찾으러 온 것입니다. 할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우리는 부창 고개 방향으로 이동했고, 종격실(縱隔室, 부대가 이동하는 방향과 평행하거나, 그 방향으로 연장되는 지형격실) 능선을 따라 많은 개인호를 찾아냈습니다. 소양강 가에서 뭍으로 오르는 중요한 지형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발굴 작전이 개시되자 곧이어 유해가 있다는 현장 보고가 있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직접 삽을 들고 흙을 긁어 보았습니다. 실탄이 나오고 철모 잔해가 나오고 전투화 잔해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구가 아닌 2∼3구의 유해가 얽혀 있었습니다. 좀 더 주변을 넓혀 땅을 파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입니까? 꽃신이 나온 것입니다.
     
저는 주변을 모두 물리쳤습니다. 극소수의 인원과 함께 진실을 찾아 접근해 나갔습니다. 호미로 긁어내는 묻힌 50년 세월, 그러나 너무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행여 편지 한 장이라도 나올까 손길이 바빠졌습니다. 아니 여자 군인이라는 징표가 될 만한 것이라도 찾고 싶었습니다. 전투화가 없어서 꽃신을 신고 장렬히 전사한 여군일까? 사랑하는 남편 군인을 따라 소양강 건너에 와서 잠시 머물다 적군의 기습으로 죽어 간 여인일까? 아니면 어젯밤 군인이 저 마을로 내려가 데려온 여인일까? 지금 이 여인을 찾고 있는 부모 형제는 없을까? 아니 한때는 죽도록 사랑했던 군인이 이 꽃신의 여인을 찾다 생을 마쳤을지 모릅니다. 꽃다운 나이, 시대를 바꾸면 내 누이요. 내 동생일 텐데……. 우리는 그곳에 꽃신을 정중히 모셨습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군인만 발굴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참전 용사 황대령 선배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미친개들의 장난! 왜 우리는 이런 짓을 수천 년 동안 반복해 오고 있는 것인가? 6·25가 그랬고 일제 36년이 그랬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몽골의 침공 등 매번 국난을 겪을 때마다 이 나라의 여인들은 몹쓸 짓을 당했으니 이제는 더는 외적들이 이 나라를 넘보지 못하도록 제대로 된 국방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땀 흘리는 것보다는 글 쓰는 것을 즐기고, 일하기보다 논쟁을 좋아하고, 병장기를 녹여 노리개를 만드는 썩은 풍토가 계속되는 한, 절대 우리 처자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환향녀, 위안부, 양색시로 이어졌던 한국 누이들의 슬픈 이야기는 이제 더는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어머니, 할머니가 그 대상이 아니었다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미친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군에는 엄격한 군율이 있어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이러한 범죄는 엄정하게 다스려져야만 합니다. 그래야 힘없고 불쌍한 민간인이 군을 신뢰할 수 있게 되고 국가는 더 큰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택동 군대가 중국을 적화시키는 데 성공한 저력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전방에서 근무한 군인이라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동두천, 용주골, 전곡 일대, 금촌, 그리고 사방거리, 법원리, 다목리, 문산 등지에 몰려 있었던 불쌍한 여인들의 집단촌을. 우리가 다른 나라 사람을 잘못했다고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부터 반성하고 그런 문화를 청산한 다음에 그들을 욕해야 합니다. 전쟁하는 군인이 마을을 점령하여 적군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기 전에 “여자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도 그 꽃신을 그려 봅니다. 어떤 이유로 산에 올라 용사님의 유해와 함께하고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멀리 전선으로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소양강을 건너 우여곡절 끝에 꿈에도 그리던 임을 만났는데 적군의 기습으로 함께 죽어 갔다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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