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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Apr 21. 2017

55. 정의란 무엇인가? ♬

<공감사색>




공감의 시대에 만나는 공감 작가 강원상의 <공감사색>을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정의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자유, 행복, 사랑 등은 우리가 삶에 부여한 소중한 가치다. 정의는 그 소중함의 분배를 뜻하는 게 아닐까. 소중하다는 말은 한정됐다는 뜻이고 그 한정된 것을 어떻게 분배하는 게 옳은지를 결정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옳다’라는 기준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정의라는 가치를 시대적 관점에서 눈여겨봐야 한다.

“전차가 질주한다. 만약 내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선로에서 일하는 다섯 명의 인부가 죽고, 내가 선로를 변경하면 다른 선로에 있는 한 명만 죽는다. 당신은 선로를 바꿀 것인가, 아니면 다섯 명의 죽음을 바라볼 것인가?”

유명한 전차 문제다. 1967년 영국의 철학자 필리파 풋이 고안한 사고실험에 1985년 미국의 철학자 자비스 톰슨이 조금 살을 붙인 것이다. 자,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참고로 삼십 명의 직장인에게 묻자 이십 명이 선로를 바꾼다고 했으며, 다섯 명은 바꾸지 않겠다고 했고, 나머지 다섯 명은 선택을 포기했다. 

왜 대부분 사람은 선로를 바꾸겠다고 했을까? 바로 숫자 때문이다. 한 명을 희생하여 다섯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러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관점은 벤담의 공리주의와 같다. 쉽게 말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가져다주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효율성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의 투입으로 최대의 산출을 기대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가정을 더 제시하고 싶다. “만약 반대편 선로에서 혼자 일하고 있는 인부가 당신의 아버지라면 선로를 바꾸겠는가?” 이렇게 도덕 원칙은 서로 충돌하는 일이 많다. ‘가장 많은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원칙과 ‘단 한 명의 생명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원칙처럼 말이다. 

인권변호사 마거리트는 전차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전차가 방향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만약 공리적인 기준을 중시한다면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의 죽음은 좋다고 여겨질 것이다. 만약 뚱뚱한 사람을 떨어뜨려 전차를 멈출 수 있다면 허용되어야 한단 말인가?” 즉, 우리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피해를 보아도 정당한가’라는 질문도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에도 비슷한 문제가 나온다. 어벤저스 팀이 정의를 실현하는 동안 무고한 시민까지 희생된 점이 주목받자 정부는 UN의 허락을 받고 활동할 것을 지시한다. 세계 각국은 ‘슈퍼 히어로 등록제’에 찬성하고 UN에서 활동하지 않을 히어로는 은퇴하라는 강제성을 부과한다. 이런 정부의 결정에 아이언맨은 “우리는 통제가 필요하다.”며 동의했지만, 캡틴 아메리카는 “정부기구가 아닌 우리 스스로 책임질 문제”라며 반박한다.

모든 영웅의 목적은 사회의 정의 실현이다. 그 공통의 목적 아래 서로 다른 능력의 캐릭터들이 ‘악’이라는 공공의 적을 물리쳤고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러나 영화 <시빌워>는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닌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들 간의 첨예한 갈등을 다룬다. 영웅들 사이에는 정부라는 새로운 권력이 관여한다. 정부라는 권력은 영웅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다만 그 권력은 영웅들을 서로 대립시킬 만큼 거대하다는 것을 이 영화에서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영웅들이야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난 능력으로 스스로 판단해서 정의를 실현하지만, 정부는 무엇을 ‘정의’로 규정해서 실현하는가. 

그리스 시대에 국가의 정의에 관해 논한 두 철학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플라톤이 생각한 가장 훌륭한 국가의 조건은 가장 훌륭한 통치자를 갖는 것이었다. 그는 통치자와 피치자의 계급이 확고한 상태에서 정의로운 국가 실현은 오직 철인통치자를 통해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서 철인은 어떠한 위험 앞에서도 의연하고, 어떠한 쾌락의 유혹도 절제할 수 있는 의지를 겸비한 사람을 말한다. 즉 영웅 같은 존재다. 다만 플라톤은 정치권력이 철학을 만나지 않는다면 국가에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라시마코스의 의견은 달랐다. 그는 “정의란 결국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며 플라톤의 주장을 반박했다. “어느 국가에나 정권의 편익이 정의로운 것이다. 모든 정권은 자기의 편익을 목적으로 삼아 법률을 제정하는데 민주정치는 민주적인 법률을, 참주정치는 참주체제의 법률을, 그 밖의 정치체제가 다 이런 식으로 법률을 제정한다.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그것을 피치자에게 올바른 것으로 공포하고, 이를 위반한 자를 범법자 또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른 자로 처벌한다. 그래서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기 때문에 정권이 규정한 정의를 따르면 피치자에게 손해라고 주장했다. 

결국, 정의는 공리적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도, 선택의 자유에만 치중해서도 안 된다. 또한, 플라톤의 주장처럼 철학 없는 통치자의 정의는 재앙이며,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처럼 피치자는 통치자에만 의존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의를 실현해야 올바른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까?

《정의론》의 저자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란 어떤 상황에서도 평등이란 가치가 훼손되지 않으면서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고 했다. 대부분 시스템은 효율을 가장 우선시하므로, 정의의 문제에 부딪히면 매번 공리주의적 사고에 따라 다수는 소수에게 포기를 강요할 것이고, 이는 소수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 

국가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그보다 더 강한 결속을 주장한 파시즘, 그리고 특정 인종의 우수성을 강조한 나치즘 등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횡행한 적이 있다. 다수가 그릇된 명분을 내세워 죄 없는 소수에게 횡포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롤스는 이러한 변질을 미리 방지하고 다수의 우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우애의 원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북 큐레이터 | 김혜연
티브로드, KBS DMB에서 아나운서와 리포터로 일했으며 MBC 아카이브 스피치 강사이다. 더굿북에서 <책 듣는 5분> 북 큐레이터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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