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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y 04. 2017

01. 리더의 비전이 가장 중요하다.

<리더의 비전>

한국과 중국은 역사 내지 지정학적으로 볼 때 오랫동안 이른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를 맺어 왔다. 냇물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이웃이라는 뜻이다. 물론 고구려와 백제가 패망할 당시의 당나라, 발해가 패망할 당시의 요나라, 고려가 지속적인 침공을 받을 당시의 원나라, 조선조 인조가 항복의식을 행한 청나라와는 극한의 원수관계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중원에 들어선 당나라는 선비족, 요나라는 거란족, 금나라는 여진족, 원나라는 몽골족, 청나라는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의 정복왕조이다. 이는 두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첫째, 중국의 전 역사는 결코 동북공정 내지 역사공정에서 억지 주장을 펴는 것처럼 한족의 역사로 전개된 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로 진행됐다는 점이다. 북방민족의 정복정권이 중원에 들어설 때 한족의 남조 정권, 송나라, 명나라 등은 아예 나라 자체가 없어졌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신라와 고려, 조선 등은 침략은 받았지만 나라가 패망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원나라 때는 부마국이 되어 전 세계를 호령한 몽골족과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원나라 말기 때는 황실이 고려의 혈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둘째, 우리의 역사는 늘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명실상부한 세계제국을 건설한 당제국의 선비족과 세계 최대 판도를 자랑한 원나라의 몽골족 및 그 이웃사촌격인 거란족,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선조격인 말갈족 모두 고구려 백성이었다. 지난 2013년 5월 고구려발해학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이런 논문이 발표됐다.

“고구려가 700여 년 동안 끊임없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수당제국에 버금가는 규모로 성장한 비결은 효율적인 ‘다문화 정책’에 있었다. 고구려는 처음부터 주변 민족을 흡수해 힘을 키웠다. 기원전 8년부터 선비족 일부를 복속시켜 대외 전쟁에 동원했다. 서기 49년에는 화북 지방의 깊숙한 곳까지 정벌했다. 이후 거란족 4만~5만 명이 고구려에 유입돼 말 양육과 조련 임무를 맡았다. 서기 313년 고구려에 병합된 낙랑유민 약 4만 명이 고구려의 외교 및 해외교역 등에 큰 역할을 했다. 서기 436년 5호16국의 하나인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망할 때 선비족의 많은 귀족과 군인이 고구려로 이주했다. 고구려는 핏줄보다 능력을 우선시해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과 자웅을 겨룰 수 있었다.”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감행했다가 30여 년 만에 패망한 것을 봐도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현재까지 역대 최고의 명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당태종도 무리한 원정을 했다가 전패한 뒤 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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