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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y 10. 2017

04. 환경보다 중요한 건 실행력이다.

<리더의 비전>

유방(劉邦)


역사에 남을 희대의 라이벌, 유방과 항우

항우와 유방은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던 라이벌이었다. 유방과 항우의 격돌은 약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원래 항우는 전쟁에서 거의 진 적이 없는 뛰어난 무용의 소유자였다. 24세에 거병한 그는 불과 3년 만에 천하를 호령하는 ‘패왕’이 되었다. 전반은 항우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그러나 대결이 2년째로 접어들면서 형세가 바뀌기 시작했고 3년째에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결국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는 애첩 우미인을 베고 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명문 귀족의 항우가 시골의 건달 출신 유방에게 패한 것이다. 실로 극적인 삶이다.

병법의 관점에서 항우의 패배 요인을 찾아보면 3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전술상의 실패이다. 항우는 유방이 자신을 ‘독안에 든 쥐’로 몰아가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둘째, 유방 쪽의 반간계에 걸려 범증과 같은 유능한 군사(軍師)를 잃게 되었다. 셋째, 보급망을 확보하지 못했다. 항우는 소모된 전력을 보충할 수 있는 후방의 보급망이 확보되지 않은 채로 싸움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싸움을 거듭할 때마다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명문가 출신의 능력자였던 항우

항우(項羽)는 기원전 232년에 초나라에서 대대로 장수를 배출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적(籍)’이고, ‘우’는 그의 자(字)이다. ‘항씨’는 지금의 하남성 침구현인 항(項) 땅을 식읍으로 받았다. 그는 키가 약 8척에 달해 무쇠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좋았다. 항우는 어렸을 때 진시황이 천하순행 도중 회계산 일대에 행차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내가 저 자를 대신할 것이다!”

다행히도 그 시간은 일찍 찾아왔다. 항우는 진승의 반기에 호응한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회계 군수 은통을 격살하고 회계를 장악했다. 당시 그의 나이 24세였다. 얼마 후 ‘장초’를 세운 진승의 휘하로 들어갔다.

기원전 207년 봄 광릉을 공략하던 진승의 휘하 장수 소평(召平)이 진승의 패사 소식을 듣고 딴 마음을 품었다. 그는 곧 장강을 건넌 뒤 진승의 명을 위조하여 항량을 초나라의 정승인 상주국으로 임명하면서 함양 공격을 명했다. 도중에 소규모 반란군을 이끌던 영포가 합류하면서 그 숫자가 6만~7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항량의 군사는 서둘러 진격하다가 진제국의 군사에게 대패했다. 진승의 휘하장수 진가(秦嘉)가 초나라 왕족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삼고는 항량에게 자신의 휘하로 들어올 것을 요구했다. 대로한 항량이 이같이 선언했다.
“지금 진승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진가가 진승을 배반하고 경구를 초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대역무도한 짓이다.”

결국 진가는 항량에게 패해 동쪽으로 도주하다가 죽었다. 경구도 곧 살해당했다.


건달 출신 시정잡배였던 유방

항우는 출발 때부터 초나라 명문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방(劉邦)은 진가의 휘하에 있는 소규모 반란군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 모인 자들은 그야말로 시정잡배 수준이었다. 번쾌(樊噲)는 개백정, 관영(灌嬰)은 비단장수, 주발(周勃)은 장례식 악사, 하후영(夏侯嬰)은 마부 출신이었다. 한(韓)나라의 명족 출신 장량(張良)을 제외하면 가장 학식이 높다는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조차도 일개 현의 아전일 뿐이었다. 게다가 유방은 주색을 밝힌 건달이었다. 『사기』 「고조본기」는 유방에 대해 이같이 기록했다.

“유방은 주색을 좋아해 늘 주점으로 가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면 그곳에 드러눕곤 했다.”

『사기』와 『한서』는 그의 부모를 태공(太公)과 유오(劉媼)로 기록해 놓았다. 당시 ‘태공’과 ‘오’는 남녀 노인에 대한 존칭이었다. 이들의 정확한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임의로 붙인 명칭이다.

실은 유방의 이름도 애매하다. 『사기』는 그의 본명을 ‘계(季)’로 써놓았으나 ‘계’는 백(伯)・중(仲)・숙(叔)・계로 이뤄지는 형제들의 명칭이며 ‘막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4형제의 막내였다. 그는 ‘자(字)’도 없었다. 유방의 ‘방(邦)’은 ‘자’가 아니다. ‘유방’이라는 이름은 황제 즉위 후 개명한 이름이다. 황제 즉위 후 개명했다는 것은 그의 본명이 입에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품위가 없었음을 알게 해준다.


환경보다 중요한 건 의지다.

유방은 30세가 되어서야 관리로 채용되었다. 자리는 정장(亭長)이었다. 정장은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정’을 책임지고 경비업무를 맡아보는 말직이었다. 사실 겉만 관리지 시중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하급관리직이 훗날 명문거족 출신인 항우와 천하를 놓고 다툴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당초 선보 출신 여공(呂公)은 원수진 사람을 피해 유방의 고향인 패현으로 와 현령의 식객이 되었다. 현령에게 귀빈이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찾아왔다. 아전의 우두머리로 있던 소하가 진상하는 예물을 주관하며 빈객들에게 말했다.
“진상한 예물이 1천 전에 이르지 않는 자는 당하(堂下)에 앉으시오.”

이때 유방은 가짜 명함을 제시하며 ‘하전만(賀錢萬)’이라고 써넣었다. 하례금 1만 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땡전 한 푼도 지참하지 않았다. 명함이 들어가자 여공이 크게 놀라 그를 문 앞에서 맞이했다. 평소 관상 보기를 좋아했던 여공은 유방을 보고 크게 놀라 곧 안으로 들였다. 소하가 말했다.
“그는 실로 큰소리만 많고, 실행은 적은 자입니다.”

주연 도중 여공이 눈짓으로 유방을 붙잡아 놓았다. 마침내 유방만 남게 되자 여공이 말했다.
“지금까지 여러 사람의 상을 보았으나 그대와 같은 상은 본 적이 없소. 나에게 딸이 있으니 받아주기 바라오.”

소식을 들은 여공의 부인이 화를 냈다.
“당신과 아는 사이인 패현 현령이 딸을 달라고 했을 때는 주지 않더니 이제 와서 어찌하여 그런 자에게 허락하시는 겁니까?”
여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는 아녀자가 알 수 있는 바가 아니오.”

여공의 딸이 바로 훗날 혜제 유영(劉盈)과 노원공주를 낳은 여후(呂后)다. 미관말직인 ‘정장’ 자리가 이런 인연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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