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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y 15. 2017

07. 최고의 원칙은 통합과 포용이다.

<리더의 비전>

한족과 선비족, 천하를 놓고 다투다.


수나라가 그랬듯 당나라 역시 북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최초의 왕조, 북위의 후예가 세웠다. 일찍이 북위의 효문제는 한화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으로 많은 선비족들이 낙양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귀족이 되어 출세했다. 그러나 한화에 반대한 일부 선비족들은 북방에 남아 있었다. 그들이 남아 있었던 일대를 무천진이라고 부른다. 특히 무천진 관중 일대의 선비족들은 단순히 변방을 지키는 하급관원 혹은 지방호족이 되었다. 그러나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갈라지고, 서위의 우문태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후에 서위를 이어 북주를 세우는 우문태는 호화(胡化) 정책을 썼다.

북위 효문제



한화와 호화
북중국의 왕조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선비족이 중국식 제도와 습속을 채택한 것을 한화 즉 시니사이제이션(Sinicization)으로 표현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이 호화이다. 영어로 시엔베이제이션(Xianbeization)이 그것이다. 선비화(鮮卑化)로도 표현한다.

효문제는 한화(漢化) 정책의 일환으로 성씨를 한족처럼 단성(單姓)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우문태는 성씨를 다시 선비족 특유의 복성(復姓)으로 돌려놓았다. 관중에 있는 한족 출신 직업 군인, 부병(府兵)에게도 선비족 복성 사용을 허용했다. 당시 대공을 세운 선비족 장수들은 모두 36개 성씨를 받고, 그 다음의 공을 세운 사람은 99개 성씨를 하사받았다. 이들 휘하의 한족 병사들 모두 자신들을 지휘하는 장수의 성씨를 좇았다. 동위의 후신인 북제(北齊)에서 선비족과 한족을 지배족과 피지배족으로 나누고 한족을 멸시한 것과 대비된다.

호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무천진에 남아있던 선비족들이 중앙으로 발탁되었다. 우문태의 호화 정책은 북방민족과 한족이 융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수당이 실시한 민족통합정책인 ‘호한융합’의 뿌리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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