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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y 17. 2017

09. 아무리 높은 나무라도 꼭대기까지 보라.

<리더의 비전>

중국 최초의 여황제 측천무후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는 태종 이세민이 이룬 ‘정관지치(貞觀之治)’ 못지않은 성공을 거뒀다. 이를 무주지치(武周之治)라고 한다. 무후가 주(周)나라를 세워 뛰어난 정사를 펼쳤다는 뜻이다. 무주혁명(武周革命)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고종


대개 고종 사후 20년가량을 무후의 시대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후가 황후가 된 후 고종이 죽을 때까지의 29년도 무후 시대로 포함시켜야 한다. 사실상의 대권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결국 반세기에 걸쳐 천하를 호령한 셈이다.


무후의 진짜 이름이 있다?

무후의 원래 이름은 오랫동안 무조(武照)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무후는 주나라 황제에 등극한 후 자신의 이름을 ‘밝을 명(明)’자 아래 하늘을 뜻하는 ‘공(空)’자를 결합한 새로운 ‘조(曌)’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자신의 자(字)를 조합해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낸 셈이다. 사가들은 이를 ‘측천문자’라고 한다. 무후는 약 20개의 ‘측천문자’를 만들었다. 현재는 17자가 확인된 상황이다.


입지전적의 아버지, 여장부 어머니의 딸 측천무후

측천무후


무후의 부친 무사확은 이연이 당나라를 건립할 때 큰 공을 세웠다. 14명의 공신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렸다. 무덕 7년(624), 무사확은 정 1품의 응국공에 봉해졌다. 이연이 자신의 일족을 이끌고 자신에게 헌신한 무사확에게 주는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다음의 내용은 『책부원구(冊府元龜)』에 수록된 이연의 언급이다. 

“공부상서 무사확은 충절이 넘친다. 작년에 아들이 죽고 처마저 죽었다. 그는 정부에 요구하지도 않고, 휴가를 가지도 않고, 열심히 일했다. 만일 모든 사람이 그를 본받아 일신과 가족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면 우리 당나라는 크게 발전할 것이다.”

『책부원구』

1,005년 북송 초기, 상고 시대부터 5대(五代)까지 역대 군신 및 정치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일종의 백과사전. 31부 1,000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현무문지변’이 일어나고 이연이 이세민에게 양위하면서 무사확의 입지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무덕 9년(626), 예주 도독으로 좌천되었고, 이듬해인 정관 원년(627)에 다시 이주 도독으로 밀려났다. 정관 5년(631) 형주 도독으로 자리를 옮긴 뒤 정관 9년(635) 순직할 때까지 계속 지방관으로만 있었다. 이세민은 그의 사후 예부상서로 추증했다. 시호는 ‘정(定)’이었다. 무후는 부친의 파란만장한 삶을 눈으로 지켜보며 권력에 대한 욕망을 크게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는 모친 양씨의 영향도 컸다. 원래 양씨는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과 화장과 같은 여인의 일보다 경서와 사서를 즐겨 읽는 등 당대 최고로 재주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무사확과 만날 때 이미 44세에 달해 있었다. 무사확에게 양씨의 존재는 신분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무후는 무사확과 양씨 사이에서 두 번째 딸로 태어났다. 무후는 당대 최고의 재원인 명문가의 모친과 빈손에서 천하의 재부를 거머쥔 뒤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져 대신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셈이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천하경영을 염두에 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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