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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May 17. 2017

10. 시선은 언제나 한 발 앞을 향하라. (마지막회)

<리더의 비전>

당고종의 후비로 다시 궁으로 들어가다.


정관 23년(649) 5월 이세민이 죽자 무후는 장안 감업사의 비구니가 되었다. 영휘 4년(654), 고종이 태종의 5주기 예불 참석을 구실로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홀로 쓸쓸히 지내는 무후의 모습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혔다. 무후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당시 무후는 30세였다. 고종보다 4살이나 많았다.

무후가 다시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과 후궁인 숙비 소씨(蕭氏)의 사랑 다툼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고종의 마음은 황후 왕씨의 라이벌이었던 숙비 소씨에게 쏠려 있었는데, 황후 왕씨는 그러한 고종의 마음을 숙비 소씨에게서 떼어놓기 위하여 고종에게 무후의 입궁을 부추겼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고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를 데려온 꼴이 됐다.

이런 통설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다. 『신당서』 「무후전」은 무후가 태종 사후 감업사에 들어가 여승이 됐다고 기록했으나 「황후왕씨전」에는 다르게 기록돼 있다.

“무후, 정관 말년에 선제의 궁인이 되어 소환돼 소의가 됐다.”

삭발했다면 반년 만에 머리가 제대로 다 자랄 수 없다는 관점에서 쓴 것이다. 소의로 있던 무후를 황후로 책립할 때의 칙서도 유력한 근거다. 이는 청나라 때 편찬된 『전당문(全唐文)』에 수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이세민이 무후를 고종에게 내준 것으로 되어 있다.

전당문



“마침내 무씨를 짐에게 내리셨다.”

이러한 기록을 따르자면 무후는 굳이 여승이 될 필요가 없었다. 어느 경우든 무후는 이세민이 좋아하는 유형이 아니라 고종이 좋아하는 유형이었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당초 고종은 무후를 ‘재인(才人)’에 임명했다. 이는 중하위급 내명부(內命婦)에 해당한다.

‘재인’은 서열 33위이다. 재인 9명 가운데 첫 번째 순서를 차지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뒷자리를 차지하면 서열은 더 내려간다. 물론 재인도 황제의 은총을 입기만 하면 비빈의 자리로 수직상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위로는 신뢰받고 아래로는 통제하라.

무후는 33위에서 올라 드디어 황후가 되었다. 성공의 비결과 관련해서는 여러 얘기가 있으나 모두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무후의 치열한 노력이 전제됐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다시 황궁으로 들어간 무후는 정성을 다해 황후 왕씨를 모시면서 고종의 마음을 잡아두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고종은 그런 무후를 더욱 좋아했다.

고종에게는 모두 12명의 자녀가 있었다. 뒤의 4남 2녀 모두 무후의 소생이다. 당시 무후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던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황제와 황후의 총애를 동시에 받으면서 무후의 품계도 정2품 소의까지 뛰어올랐다. 9명의 빈 가운데 으뜸이 된 것이다. 위에는 1명의 황후와 3명의 비밖에 없었다. 고종은 얼마 후 무후를 다시 정1품의 신비(宸妃)에 봉했다. 이로써 황후 왕씨와 겨우 한 끗 차이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일개 목재상의 딸이 후비들 중 가장 신분이 높은 황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셈이다.

드라마 무미랑전기의 측천무후


그러나 자존심이 강하여 다른 사람의 밑에 있지 못하였던 무후의 최종 목표는 황후였다. 무후는 자신의 위치가 탄탄해진 후에 본격적으로 그 본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갖은 방법으로 환관과 궁녀들을 구슬렸다. 특히 황후나 숙비 소씨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그들에게 황후와 숙비 소씨의 행동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간 황후 왕씨의 몰락과 관련해 오랫동안 무후가 자신의 딸을 목을 졸라 죽인 뒤 왕씨에게 뒤집어씌움으로써 마침내 황후의 자리를 꿰찬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에 기록되어있다.

최근에는 『구당서』의 기록을 기초로 무후가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였다는 통설을 뒤집는 새로운 해석이 인정받고 있다. 고종 자신이 왕씨의 폐위에 적극적이었고, 폐위의 직접적인 원인도 공주의 죽음이 아니라 왕씨가 무후를 저주한 사건을 먼저 일으킨 게 빌미가 됐고, 무후도 이를 황씨를 무함하는 구실로 삼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는 셈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왕씨의 폐위 선언은 어린 공주가 죽은 때로부터 1년이 훨씬 넘은 때였다. 『신당서』는 어린 공주의 죽음이 고종으로 하여금 황후 폐위의 생각을 갖게 했다고 기록해 놓았으나 무슨 근거가 있는 게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조치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주사건은 달랐다. 먼저 왕씨의 생모인 유씨의 입궁을 금지하고, 이후 왕씨의 생부인 유석을 좌천시켰다. 폐위사건을 불러온 것은 저주사건이지 공주의 사망사건은 아니라는 게 된다.

이는 낙빈왕(駱賓王)이 쓴 「토무후격(討武后檄)」이 뒷받침한다. 「토무후격」은 무후를 공격할 수 있는 모든 내용을 그러모은 것으로 유명하다. 여기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씨는 고종을 시해하고 생모를 독살했다. 고종의 사랑하는 아들을 별궁에 유폐시키기도 했다.”

이는 무후가 예종 이단(李旦)을 별궁에 유폐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토무후격」은 그 어느 대목에서도 무후가 어린 공주를 살해한 사실을 거론하지 않았다. 만일 당시 그런 소문이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토무후격」에 거론되었을 것이다.

무후가 자신의 딸을 죽였다는 주장은 헌종 때 나온 『대당신어(大唐新語)』에도 나오지 않는다. 의학전문가들은 공주의 죽음을 일종의 ‘영아급사증후군’으로 보고 있다. 1천 명 중 2~3명의 비율로 일어나는 희귀병이라고 한다. 건강한 영아가 돌연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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