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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0. 2017

02. 여행, 머무는 취향

<여행의 취향>

여행에서 숙소는 베이스캠프다. 숙소는 여행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여행 숙소’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추적추적 내리던 비를 맞으며 도착했던 런던 게스트하우스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한창 더운 7월 초, 맥시 드레스에 얇아서 속이 비칠 정도인 시폰 카디건만 걸치고 도착한 런던은 비가 내려 무척 추웠다. 아마 첫 홀로 여행, 첫 여정지라는 긴장감까지 더해져 더욱 쌀쌀했을 수도 있다.


길치인 내가 웬일로 히스로 공항에서 피카딜리 서커스 역 부근에 있는 숙소 근처까지 잘도 찾아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비 오는 거리에서 쩔쩔매다가 숙소로 연락했다. 달려 나온 숙소 사장님과 함께 도착한 숙소는 빌라촌에 있었다. 늦은 오후라 투숙객 모두 방을 비워 숙소는 텅텅 비어 있었다. 지금 같으면 도착과 동시에 짐을 대충 꾸려 밖으로 나가고 볼 텐데, 그때는 그저 쉬고만 싶었다. 14시간의 긴 비행으로 지친 데다, 비도 맞았고 정신도 없었다. 그러나 지나친 피곤에는 잠도 오지 않는 법.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오도카니 빈방을 지키고 있으니 투숙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웠다. 나보다 좀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첫 여정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 더 늦게 도착해서 같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에 있던 친구, 밤늦게야 숙소에 도착한 친구 등. 같은 방을 쓰게 된 친구들과 금방 친해져 밤늦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이어 가다 어느 순간 스르르, 풀썩,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린 건 이제는 투숙객에서 친구가 된 이들이 흔들어 깨울 때였다. 간신히 일어나 식당으로 갔다. 하룻밤 내리 자고 났는데도 피곤이 안 풀린 데다 입맛도 없었다. 게다가 닭고기에 닭국이라니! 아침부터! 사장님이 유학생이라는데 아침식사 준비를 제대로나 했을까, 걱정스러웠다. 본인 먹을 것도 제대로 못 챙길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 만든 실험식을 먹는 건 아닌지, 의심으로 한 숟갈을 떴지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른 아침에(지금 생각해보면 조미료를 썼을지도 모르겠지만) 특별할 것 없는 재료로 기대 이상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우리 엄마 말고 또 있었다. 같은 방 친구들과 한자리 제대로 차지하고 앉아서 국에 밥을 말아 양껏 먹었다. 아침식사를 하며 이 숙소의 장점은 밥이구나, 깨달았다.

전날부터 숙소의 장점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쓰던 참이었다. 사장님의 친절함과 주요 여행지에서 가까운 좋은 위치 외에 도무지 장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것 같아 우울해지던 참이었다. 아무리 날씨가 좋지 않은 런던이지만 침대와 이불이 심하게 축축했고, 집안 곳곳은 깨끗한 것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남자 사장님이라서 그런가 하는 성차별적 판단을 내리려던 때, 그나마 단점을 일부분 상쇄했던 게 사장님의 음식 솜씨였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단점이 많은 곳이었다기보다는 나와 잘 안 맞는 곳이었을 뿐이다. 나중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 숙소에 만족한 친구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런던의 숙소를 고를 당시, 나는 나의 숙소 취향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미숙한 여행자였던 거다.

숙소를 고를 때 나에게 중요한 부분은 ‘청결’이다. 위치나 식사, 안전등도 고려 항목이지만 청결함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편이다. 유별나게 깔끔한 성격이라서가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최소한으로 지키고 싶은 안락함 때문이다. 낯선 공간을 내 취향과 체취로 채우려면 일단 그 공간이 비워져 있어야 가능하지 않은가 싶다.

내가 경험한 숙소들은 호텔, 펜션, 리조트, 민박, 호스텔, 집 렌트, 게스트하우스 등 여행지가 늘어날 때마다 그 종류도 다양해졌는데, 가장 좋아하는 형태는 호스텔이다. ‘깨끗하고 위치 좋은 호스텔’이 내가 생각하는 최적의 숙소다. 나중에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호스텔은 ‘다양한 친구와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 홀로 여행을 즐기며,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길치’인 내게 가장 잘 맞는 숙박 형태다. 호스텔을 좋아한다고 하면 굉장히 털털하고 어느 정도의 소음이나 더러움에 무딘 사람일 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못한 게 나도 아쉽다. 소음은 어느 선까지는 견딜 만한데, 청결은 양보하기 어려운 조건이다.

한국 청송 게스트하우스

일본 오사카 에어비앤비

독일 뮌헨 호스텔 1인실, 조식

오스트리아 빈 호스텔

홍콩 호스텔


여행자는 끊임없이 머무는 존재다. 여행자에게는 자신이 자리 잡는 공간에서 자신을 어떤 형태로 담아낼지, 그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경험할지, 그 공간이 어떤 필요충분조건을 갖춰야 할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머무는 공간에서 오래 살건, 잠시 잠깐 머물건 자신에게 맞는 공간을 찾는 게 중요한 거다. 머무는 데도 취향이 있는 거다.

여행자 취향에 맞는 공간의 ‘조건’은 매우 유연하다. 내게는 청결함이 중요하지만, 때때로 내가 원하는 공간의 조건이 늘 선호하던 ‘청결함’이 아닌 ‘나의 취향과는 다른 낯선 새로움’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주요 관광지와의 짧고 편리한 경로가 좋은 숙소의 조건일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숙소 내부의 안락함이나 맛있는 식사가 중요할 수도 있다. 여행자마다 다양한 취향이 있으니 각자 머무는 공간을 특징짓는 조건 역시 무수히 많다. 중요한 것은 여행자 자신의 취향을 아는 것이다.

그 순간, 그 시점에서 나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 여행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인 만큼 자신을 잘 아는 자의 여행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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