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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2. 2017

03. 여행그릇, 여행을 오롯이 남기는 것

<여행의 취향>

                                           

여행그릇, 여행을 오롯이 담고 남기는 것. 찰나의 순간과 감흥을 남길 수 있는 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행하고 느낀 것이라도, 실체 없는 경험과 감정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여행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어쩌면 불가능한 일임에도 많은 여행자들이 사진을 찍고, 기념품을 사는 단순한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여행을 기록하고자 하는 건 소중한 것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해 결국은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투영일 터. 나 역시 꽤 오랜 시간 동안 기록과 사진이라는 여행그릇을 통해 나의 여행을 담고 남겨 왔다. 내가 ‘기록’과 ‘사진’을 여행그릇으로 택한 건 글을 쓰고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내가 아는 가장 값싸고 작은 부피와 가벼운 무게를 가진 여행그릇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동안 그리 넉넉지 않은 여행자였던 나는 여행비용에 여유가 조금 생기면 열쇠고리나 배지, 엽서 따위 소박한 기념품을 사는 사치를 부려 보곤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의 여행을 담는 그릇이 될 수는 없었다. 내게 그것들은 별다른 의미 없이 쉽게 살 수 있고 보관이 수월했던 물건일 뿐이었다. 무릇 여행그릇이란 내 여행의 의미와 기억을 담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상당한 기간 그 역할은 기록과 사진이 수행해왔다. 그러다 특정한 아이템을 또 다른 여행그릇으로 삼게 되었다. 자신만의 여행 기념품을 수집하는 여행자들을 보며 흥미롭다고 느꼈다. 대만 타이베이에서 만난 한 친구는 착하게도 여행하는 내내 가족 생각을 하고 가족에게 가져갈 선물만 사고 자신을 위한 건 아무것도 사지 않더니, 공항에서 출국 전에 대만 지도 모양의 열쇠고리를 딱 하나 자신을 위한 기념품으로 골랐다. 친구는 자신의 방을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그 방에는 벽에 붙여둔 투명한 고리마다 여행지에서 사 온 열쇠고리가 걸려 있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함께했던 친구는 여행지에서 기념엽서를 사서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그 편지를 받아 수집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상에 자신에게 하고 싶은 조언이나 격려를 덧붙여 집으로 엽서를 보내는 것은 여행지에서만 해볼 수 있는 뜻깊은 체험이고, 여행을 마치고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를 받아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했다.

많은 여행친구들이 여행지에서 마그네틱을 사서 냉장고나 철제 가구에 붙여둔다. 마그네틱 수집을 무척 좋아하는 한 블로그 친구는 섬세하게 제품을 고르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블로그에 올려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덕분에 이웃 블로거들로부터 다양한 여행지 마그네틱을 선물 받기도 했다. 나도 마그네틱을 보면 이 친구가 생각날 정도다.

열쇠고리, 배지, 엽서, 마그네틱, 달력 등 다양한 기념품이 여행지의 특징과 수집하는 사람의 취향을 반영하며 수집자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나는 인형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인형은 여행지의 특색과 문화를 가장 잘 담고 있으며, 인간의 삶과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여행지 특유의 의상이나 머리장식을 갖추거나, 그 지역의 문화나 신앙을 드러내는 인형을 보면 마치 여행지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이 친구와 함께 집에 돌아와 여행을 추억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여행지에서 만나 함께 여행하고 내 집에 안착한 인형들, 이들은 여행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그 기억을 나와 공유하는 것 같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여행 친구다. 표정도 모양도 제각각인 이들에게서 읽어내는 여행지 특유의 문화와 관습이 흥미롭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다른 표정을 지으며, 다른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어떤 이는 인형은 사람을 닮은 것 같아 무섭지 않냐고 하지만, 난 사람을, 나를 닮은 그들이 친근하다.

내 여행과 일상, 삶의 공간을 나누며, 나의 삶을 나의 취향과 방식으로 담아내 주는 여행그릇인 그들이 고맙고 친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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