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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굿북 Jul 14. 2017

07. 호주 이민, 버스 운전사로서의 삶을 시작하다.

<나는 호주의 행복한 버스 드라이버>

하루 2천여 장의 벽돌을 손으로 운반하고, 장비 규격이 한국의 것들보다 크고 무거운 각종 기자재를 손으로 직접 다루어야 했던 탓에 6개월 만에 나는 양쪽 손목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압박붕대로 양 손목을 감고 일을 계속하였으나 통증은 점점 심해질 뿐이었고, 결국 더 이상 일을 지속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것은 극복의 단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나는 결국 공사현장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벽돌공으로 정착하여 내 손으로 직접 우리집을 지어보겠다는 나의 꿈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호주인들은 한국에서처럼 하나의 직업을 오랫동안 유지하기보다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여 일하는 중에도 항상 다음 스텝을 준비한다. 시간의 단절은 본인에게나 가족에게 매우 큰 고통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목의 고통이 시작될 때부터 나는 다음의 스텝을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버스운전사가 되리라 상상이나 해보았겠는가? 그것도 이역만리 호주라는 낯선 나라에서 말이다. 호주에서 버스운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굴절 버스(버스가 2개 연결된 버스)로 면허증을 취득하여야 한다. 한국으로 설명하자면, 트레일러(대형버스) 자격증이 이에 해당된다. 8년 전 당시만 하더라도, 버스 회사는 원서에서 2배수로 뽑은 다음, 면허시험에서 50%를 탈락시키는 방법으로 버스운전사를 채용하였다.


호주의 버스 회사의 직원 채용법은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면접(당시 약 25대 1로 기억한다)을 통과한 15명 정도의 훈련생들은 한 달간의 운전 교육을 받는다. 버스가 2개 연결된 굴절 버스로 교육을 받고, 동시에 안전사고의 대비에 따른 모든 관련 규정들을 교육받는다. 특이한 점은, 아직 정식 직원은 아니어도 모든 훈련생에게 훈련받는 한 달 동안 일급(104호주달러)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일급은 훈련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버스 회사에서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지급한다.

호주는 회사가 새로운 일자리 고용을 창출하는 경우 정부가 펀드를 지급하는데, 고용 절차에 필요한 비용을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제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에는 한 달여의 교육기간 중 총 3회의 운전면허 시험의 기회가 주어졌다. 만약 세 번의 기회 모두를 실패하면 즉시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운전실기시험에 실패하고, 마지막 한 번의 기회만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의 면허시험에서도 나는 당황한 나머지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당시 시험관은 정부교통국 소속으로 실기점수를 평가하여 80점 이상을 받으면 즉시 면허증을 교부해 주었다. 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시험관의 점수 집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당신의 점수는 76점이므로 불합격입니다.”

나는 실망감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순간 시험관이 내게 물었다.
“결혼하였습니까?”
“예, 딸이 둘입니다.”
“나도 딸이 둘입니다. 당신은 딸들을 잘 키울 의무가 있지요. 당신은 세 번의 기회에서 모두 실패하였지만, 시험에 응하는 당신의 태도가 매우 훌륭하였고, 마지막 점수가 아깝게 실패하였으므로 나의 직권으로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이상 어떤 다른 말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후 나는 예외적인 네 번째 실기시험에 응시하게 되었다. 청심환도 하나 먹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가며 최선을 다하였다. 만약 이번에도 실패하면 내 길이 아니라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다행히 시험은 무사히 끝났다. 후진 정차에 실패한 것 말고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았다. 사실 버스 두 량이 연결된 굴절 버스의 후진은 지금도 잘 못한다. 아무튼 나는 마지막으로 시험관의 점수 집계 상황을 바라보며 결과를 기다렸다.

“합격입니다. 축하합니다!”

나는 지금도 시험관이 내게 축하의 말을 건넨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대학 졸업 전 금융기관에 취업했던 것 이상으로 기뻤다. 이제 가족을 위하여 안정적으로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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